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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제목부터 특이한 이 시집은 전남 여수에서 장애인 거주시설인 ‘동백원’을 설립하여 활동하고 있는 저자가 평소 사용하는 말을 그대로 활용한 시들을 창작하여 수록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전라도 사투리가 작품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고 하겠는데, ‘사회복지 현장의 이야기를 알리고 싶어’ 고민하다가 ‘뜽금없이 모금에 관한 글들을 시로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복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는데 쓰다봉께 살아오면서 느꼈던 불합리나 역사, 정치까지 쓰게 되었’음을 밝히면서, 시집에 흔히 첨부되는 ‘발문 써줄 사람도 없고 추천사는 더더구나 부탁할 생각도 못’하고 자신의 작품으로만 시집을 꾸렸다고 한다.
그래서 서문이라고 할 수 있는 글도 ‘들어감서’라는 제목으로 시 형식으로 꾸며 놓았고, 시집에 수록된 마지막 작품 역시 ‘나감서’라는 제목의 시로 마무리하고 있다. 스스로 ‘씀서 시원하고 읽음서 후련한 시를 쓰고 싶’다는 포부를 피력하고 있는데, 적어도 나에게는 충분히 공감되고 시원하게 느껴지는 작품들이었다. 우선 저자가 평소에 사용하는 ‘일상어’를 그대로 시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일상시’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으며, 그럼에도 작품에서 느껴지는 의미는 충분히 깊은 맛을 던져주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에 대한 동의로도 읽힐 수 있으며, 조금은 냉소적인 뜻을 담고 있기도 한 <글먼 근갑다>라는 제목에서 저자의 품성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했다.
모두 3부로 구성된 목차에서 먼저 ‘글먼 근갑다’라는 1부의 수록 작품들은 저자가 느낀 우리 감정들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어, 읽으면서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다.
인생은
대나캐나 살면
한없이 길고
치열하게 살면 너무나 짧다.
세월은
다
다르게 오고 간다.
(‘다른 시간’ 전문)
시집의 처음에 수록된 작품으로, 일상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시간이 다르게 느껴진다는 평범한 진리를 저자의 일상어를 통해서 표현하고 있다. ‘대나캐나’는 ‘아무렇게나’ 혹은 ‘대충대충’의 뜻이니, 우리네 삶을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시간 의식도 달라질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라고 하겠다. 아마도 저자는 ‘대나캐나’ 살지 않고, 누군가를 위해 ‘치열하게’ 살아왔기에 이렇게 형상화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이해된다.
저자가 애초에 쓰고 싶었던 내용들은 아마도 ‘흩날리는 복지’라는 제목의 2부에 수록된 작품들이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우리 사회의 복지 시설이나 장애인에 대한 그릇된 시선에 대해서 저자의 소신을 피력하고, 기금 모금을 위해서 화면 속에서 소모되는 ‘눈물의 아프리카’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고 있는 작품들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가난을 처절하고 비참하게 만들어 가는 모금단체들 때문에 // 가난한 사람은 절망하고 / 서럽게’ 우는 현실을 꼬집으면서, ‘가난 속의 웃음’이야말로 진정 필요한 자세라고 역설하기도 한다. 복지는 그저 단순한 시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한 사람으로 그들의 삶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자세가 전제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내용이라고 하겠다. 이와 함께 또 다른 작품(흩날리는 복지)에서는 ‘사회적 안전망이 촘촘히 깔린 나라가 복지국가’임을 강조하면서, ‘정책을 제시하는 교수나 입안하는 공무원들이 아니라 / 일선에서 복지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이 행복해야 / 혜택을 받는 사람들도 행복을 느낀다.’는 평범한 진리를 설파하기도 한다.
마지막 ‘타짜’라는 제목의 3부에 수록된 작품들은 자본의 논리와 기득권에 휘둘리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저자의 시각에서 비틀어 풍자하는 내용들이 대부분이라고 여겨진다. ‘곡학아세(曲學阿世)’가 판치는 현실을 비판하고, 때로는 권력자들의 전횡을 비판하면서 조선시대의 현실을 그대로 가져와 그러한 상황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역설하기도 한다. 비록 저명한 이들의 ‘발문’과 ‘추천사’ 따위가 없지만, 오랜 세월 ‘사회복지’를 담당하면서 품었던 생각과 철학들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작품들이기에 독자로서 더욱 공감할 수 있었다. 일상어로 시를 쓰더라도 충분히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에, 이 시집이 ‘많이나 팔리면 쓰것다’라는 저자의 바람이 이뤄지기를 진심으로 기대해 본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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