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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여 하나님의 손에 잡힌 세상 임금
본문 : 행 5:33-39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쌔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간 밖에 나가게 하고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 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 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아멘.
오늘은 이제 가말리엘의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사도들을 이제 산헤드린 고회가 아주 분노하여 죽이려고, 없이 하려고 지금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요. 그렇죠? 이제 그냥 놔두면 죽을 겁니다. 그런데 가말리엘이 벌떡 일어났어요. 가말리엘은 여러분이 아시듯이 사도행전 22장에 보면은 그 가말리엘은 사도바울의 스승입니다. 그죠?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갔을 때에 사도바울이 그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그러죠? 나는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랐다. 다소에서, 다소는 이제 헬라 문명과 문화가 가득 차있는 곳이었고 그 예루살렘은 유대주의가 다스리던 그런 곳이었죠? 그러니까 다소와 예루살렘 두 곳에서 자라고 태어나고 자란 그 사도바울은 그 헬라주의와 유대주의를 아주 뭐 그냥 줄줄이 꿰고 있던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 (?)문헌에 보면은 사도바울은 헬라철학에 대해서도 아주 능통한 사람이었고 그리고 유대교, 유대주의에 관해서도 아주 뭐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래요. 그러니까 그 스테반을 죽이려고 할 때에 돌로 들어서 유대인들이 이제 스테반을 죽이려고 할 때에 그렇게 옷까지 자기가 맡아갖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옷을 맡아 놓고 있었다는 건 내가 책임진다, 라는 그런 표시였거든요. 내가 책임지고 이건 내가 주도하는 거다! 이렇게 그런 상징으로 옷을 맡아갖고 있었던 거예요. 그마 만큼 유대주의에 확신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가 그런 유대주의를 누구한테 배웠느냐 하면 바로 이 가말리엘한테 배운 거예요. 내가 가말리엘 수하에서 그 율법의 모든 것을 다 배웠다, 그러잖아요? 사도바울이?
그러니까 그 가말리엘이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어요. 산헤드린 공회라는 것은 당시의 유대인들의 그 국회 같은 거예요. 입법기관이기도 했지만 그들이 실지로 사법처리까지도 다 했던 그런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산헤드린 이 사람들이, 뭐 당시는 로마의 식민지였으니까 사형에 해당하는 것은 로마의 허가를 받아서 재가를 받아서 사형을 집행하고 했지만 실지로 이 사람들이 결정하면 그냥 죽이면 돼요. 그래서 스테반 같은 사람 돌로 때려 죽여 버린 것입니다. 로마의 허락도 안 받고. 그래도 로마가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결정하면.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만장일치로 결정하면 그냥 때려 죽여도 돼요. 그래서 그 간음한 여자, 현장에서 붙들린 여자도 데려 와갖고 돌로 때려죽이려고 했었죠? 그때 예수님이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예수님이 그 말 안 했으면 거기서 그 자리에서 죽은 겁니다, 그 여자는요.
그리고 실지로 지금도 그 이 유대주의를 좀 변형된 유대주이지만 그걸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이들이 이슬람교인들이에요, 사실은요. 그래서 이슬람, 과격파 이슬람 교인들은요 요즘도 돌로 때려죽입니다, 사람을. 그거를 제가 동영상으로 한번 본 적이 있어요. 근데 그게 좀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난 사형집행은 얼굴을 가리거든요.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그리고 돌을 가지고 와서 각자 (?)에서 찍습니다, 던지는 게 아니라. 얼굴을 찍고 몸을 찍고 뭐 그렇게 찍어요. 그리고 이제 거기 있는 사람들은 저리고 떨어져가지고 던지죠. 이만한 돌을 머리에다가 던지고. 금방 죽더라고요. 사람이 그렇게 던지니까요. 근데 진짜 잔인한 인간들은요 몸을 묶어놓고 몸을 다 땅에다가 묻어요. 움직이지 못하게. 그래놓고 돌로 찍습니다, 와서. 여러분 인간이 그냥 한 번에 탁 죽으면 괜찮은데 그렇게 그것도 자기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에 의해 돌로 찍혀죽을 때 그 고통이 얼마나 크겠어요? 근데 유대주의가,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주의가 그러한 사형집행을 정말 너무나 자주 그리고 너무나 쉽게 그렇게 감행을 하고 있었어요.
사도들이 지금 그렇게 죽을 판이었던 거죠. 사도바울이 그 한번 돌에 흠씬 맞아 거의 죽은 것 같이 되어서 사람들이 갖다 버렸다 그랬죠? 근데 다시 일어나가지고 성으로 들어간 일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얼마나 맞았으면 사람들이 죽었는지 알았어요? 그냥. 숨이 끊어져버려서. 근데 툴툴 털고 다시 또 자기를 그렇게 두드려 패는 성으로 들어간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손에 잡힌 이들의 무서움입니다. 그게, 그게 진짜 강한 거예요. 사람들이 무서운 게 아니라 하나님이 두려운 거예요. 그래서 그냥 하나님의 일을 사람들이 막 그렇게 두드려 패도 하나님 때문에 세상을 이겨버리는 게 성도의 삶이어야 되는 거예요. 우리가 그렇게 되려면 이 세상에서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돼요. 사랑하는 자가.
근데 보세요. 얼마나, 얼마나 연약합니까? 우리가? 지난 주일날 설교를 하고 급히 이제 안디옥 교회에 가서 거기서 설교를 하고 돌아왔어요. 우리 토레스 지역의 구역예배에 제가 또 심방을 가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또 금방 설교 끝나자마자 토레스로 다시 가가지고 구역예배에 참석했어요. 근데 내가 설교를 할 때도 그랬지만, 주일날 설교할 때 정말 많은 분들이 통곡을 하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나가는데 보니까 일부 때도 그랬고 눈이 전부 벌게져가지고 다 나가셨어요. 야, (?) 쳤구나! 안디옥 교회에 가서 거기도 이제 복, 복.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이런 교회거든요. 그러니까 뒤에서 보니까 저 프랭카드를 딱 붙여놨는데 열심히 충성 봉사하여 하늘에 상급을 쌓자! 딱 교회에 써놨더라고요. 아, 참 아군은 하나도 없고 (?) 혼자 뛰어와서 딱 앉아 있는데 우리 둘밖에 없는 거죠. 그 목사님은 뒤에서 팔짱끼고 딱 보고 있고. ㅎ.
그래서 제가 뭐라고 시작했겠어요?
이 복에 환장한 기독교인들아! 로 시작했죠. ㅎㅎ. 사람들이 그냥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ㅎ, 그리고 구역예배에 내려갔어요. 내려가 갖고 이제 나는 이제 들었죠. 제 설교에 대해서 나누니까.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뭔가 이렇게 감동을 받아 울긴 울었는데 그게 하나님이 너무 사랑스러워서가 아니라는 걸 제가 알아요. 하나님이 너무 감사하고 그분이 너무 좋아서, 그 은혜가 너무너무 정말 감격스러워서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라 그냥 자기가 그 평소에 느꼈던 우울함 고통 고난 이런 것에 대해서 누군가가 이렇게 확인을 시켜줬을 때 그런 데서 터져 나오는 그런 울음. 그런 것도 그냥 나쁜 건 아니지만 정말 우리가 눈물을 흘리는, 가치 있는 눈물을 흘리는다는 것은요, 내가 정말 이런 지금 당장 하나님이 나를 지옥에 보내도 나는 아무 할 말 없는 존재인데 근데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해주셨을까? 그때 그분의 손을 꼭 붙들고 그때 흘리는 눈물 그것이 진짜 가치 있는 눈물이 되는 거예요.
근데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 모르는 거예요. 그 은혜에 대해서 너무 몰라요.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사람들이요.
내가 왜 그렇게 죄인, 내가 뭐 그렇게 큰 죄를 지었느냐는 거죠, 다들. 그러니까 죄에 대해서 지적을 하면 상당히 불쾌해하고 기분이 언짢아가지고들 그러시는데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우리가 구원을 받을 때 아, 내가 정말 이렇게 큰 죄인이기 때문에 나에게 진짜 어떤 도움의 손길이 없으면 나는 큰일 나겠구나! 이렇게 스스로 자각하여 구원받은 사람 있습니까?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시는 거예요. 찾아오셔갖고 그때부터 도대체 그럼 내가 왜? 이 하나님을 내가 왜 받아야 되는 거야? 왜 이분의 은혜를 받아야 되는 거야를 (?)께 통하여 배우는 거거든요. 경험으로, 삶으로. 그랬을 때 왜 내가 구원을 받게 되면 그때부터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폭로당해야 돼요. 발각당하는 거예요. 그때부터요. 그때부터 성자로 변해가는 게 아니라 나는 왜 이렇게 악당일 수밖에 없는가가 내 스스로에게 자각이 돼야 된다니까요. 그렇지 않고는 내가 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돼? 이게 안 돼요. 이해가 안 된단 말에요.
여러분 한번 보십쇼.
우리가 어떤 질병에 걸렸어요. 질병에 걸려서 무지무지하게 고통을 당하고 있었어요. 너무너무 막 힘들고 아프고. 아 차라리 이럴 거면, 이럴 거면 그냥 죽는 게 낫지, 라는 정도로 너무 아팠어요.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그런데 진짜 아주 희귀한 명약이 하나 나타나갖고 이거 먹으면 낫는다고 갖고 왔어요, 누가. 그래서 진짜 의심 반 기대 반 먹었는데 낫어요. 그때 야, 이 약이 진짜 신통한 거구나 라는 걸 알라면 그 사람에게 그 질병으로 인한 고통이 경험이 있어야 돼요. 그래야 그 약이 진짜 가치 있는 것이구나를 알게 되거든요. 그런데 아무런 증상도 없었는데 너는 이 약 때문에 나은 거야. 라고 누군가 얘길 해줬어요. 내가 뭐 어디가 어팠는데? 야, 너 조사해보니까 옛날에 간염이 있었더라. 그런데 넌 자각하지 못했겠지만 이 약 때문에 나은 거다. 그 사람에게, 그래? 뭐 그런가보지 라는 뭐 그런 동의는 끌어낼 수 있겠지만. 근데 이게 왜 나에게 고마운지를 이 사람은 몰라요.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찾아오셔서 도대체 이 ‘신약’과 ‘구약’이라는 이 하나님의 약, 이 하나님의 말씀, 복음이라는 이 하나님의 은혜의 보고가 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고 우리는 왜 그걸 붙들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를 신앙생활을 통하여 가르치신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통하여 그냥 금방 성자처럼 너무 너무나 착하고 너무 너무나 교양 있고 너무 너무나 선하게 이렇게 변해가는 게 아니에요. 그거는 성품에 따라 어떤 사람은 그럴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안 그럴 수도 있고 그럴 수 있어요. 예수 안 믿는 사람도 얼마나 교양이 넘치고 얼마나 착하고 선한 이가 많습니까? 제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에 예수 안 믿는 사람들 중에 훨씬 더 많았어요. 교양 있고 착하고 정말 지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들.
그러면 예수를 믿고 나서 나타나는 변화는 그거랑은 좀 달라야 되잖아요? 예수를 믿고 나타나야 하는 인간 측에서의 변화라는 건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이었으며 나는 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은 그냥 죽은 흙에 불과한 존재인가를 배우는 거예요. 그거 아는 거예요. 그리고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하나님만 사랑해야 되는가. 나는 하나님 사랑만 받아야 되는 건가?를 배우고 가는 겁니다. 그게 성도의 삶이에요.
그러면 사람들이 그러죠, 아주 지적인 사람들이. 그리고 개혁적인 사람들이. 사회 정화나 사회 개혁, 이런 걸 외치는 사람들이 그러죠. 그러면 나머지 인간들은 뭐냐? 그럼 이 세상은 뭐냐? 이 세상은 아무 가치가 없는 거냐? 이렇게 물어요. 이 세상이 왜 아무 가치가 없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에 필요한 게 세상이기 때문에 가치 있어요. 그 이외에는 그 어떤 가치도 없어요, 이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이 토해 내놓는 것이 얼마나 더러운 거를 배우고 하나님의 은혜를 꼭 붙든 이들이 왜 하나님의 은혜만을 붙들어야 되는지의 그 이유를 배우는 그 가치. 그것 이외에 다른 가치를 부여할 수 없어요, 조금도, 이 세상에서. 그럼 다른 가치는 뭐냐? 다른 인간들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모든 존재는 다 뭐죠? 흙이에요, 흙, 흙. 그래서 하나님의 먼지로 만들었다고 그랬어요. 아다마, 먼지. 더스트. 그냥 먼지에요. 다 먼지로 만들었다고. 모든 생물을 다.
그러면 하나님의 생리가 뭔지 알았을 때의 그 존재는 아무리 살아 움직인다할지라도 그냥 먼지에요. 먼지. 그러니까 자꾸 인간의 가치, 인간의 존엄 뭐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는 거는 하나님을 몰라서 그래요. 모든 인간이 다 가치 있고 모든 인간이 다 존엄성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관계하여, 하나님과 관계가 있다, 라는 건 하나님의 생명력이 그에게 부어지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게. 그게 여러분이거든요, 그게 교회에요. 하나님의 생명력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관계하는 고 관계로 부어지는 거죠. 그들은 가치 있어요. 그들이 산자에요, 산자. 생명. 성경이 말하는. 왜냐하면 그들에게 하나님의 생명력이 부어진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과 그들이 연합이 된다, 라는 의미이거든요. 언젠가는 이게 다 지워지고 하나님과 합쳐졌을 때 그걸 하나님과의 연합이라 그러고. 그는 하나님과 떼려야 뗄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머리이고 우리가 몸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처럼. 신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합되어 하나님이 누리는 모든 것을 다 누릴 수 있는 그런 신적 존재가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러죠? 시편의 말씀을 인용을 해서 ‘야,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다 신이라고 하였거늘‘. 우리가 신이 된다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그런 존재,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비워내는 그런 존재로 신적 존재가 된다는 거예요. 그 시편에 이미 나와 있단 말입니다. 자기 힘으로 제사 지내고 율법 지키고 이러면서 그렇게 자기가 신인 줄 알고 살아가는 거예요. 그때 예수님이 그러는 거예요.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과 관계있는 자, 하나님을 섬기는 자를 신이라고 하였거늘 너희는 너희가 신이라고 생각하고 있구나? 나는 진짜 하나님과 관계있는 존재야.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러는데 왜 그걸로 날 죽일라고 그래?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렇게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서 그렇게 하나님과 관계있는 자로 내가 지어지게 된 그 이유, 그리고 그 목적, 삶의 이유 삶의 목적, 그리고 우리의 이 삶의 지향점이 어딘가를 잘 배우고 그리고 훌훌 털고 떠나면 돼요.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을 덥석 잡아주시면서 얘야, 그동안 내가 보이지 않아서 얼마나 너 많이 흔들렸니? 이제 날 봐, 이제 날 봐. 진짜 내가 여기 있잖아? 하고 손 내민다고요.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눈에 보이는 육신을 입고 기다려주신다고요.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에 가서도 하나님을 못 봅니다. 예수를 통해서만 볼 수 있어요.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를 믿지 않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는데 눈에 보이는 예수를 못 알아봐서 죽은 거예요, 다. 지옥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데 하나님, 하나님 이름을 부르지만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아야 되고 하나님을 본다는 건, 바로 예수가 하나님의 은혜로 오셨잖아요? 십자가 지러 오셨으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고 나는 은혜를 받아야 되는 존재구나, 라는 것을 배우라는 게 그런 존재로 살아가는 게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라는 뜻이에요. 아니고 그냥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만을 본다면 그 하나님을 내 소유로 만들어서 내 삶에 내가 원하는 목적과 비전과 야망을 성취하는 데에 방법과 도구로밖에 쓸 수가 없어요. 모든 살아있는 인간은 자기가 갖고 있는 걸 전부 소유로 만들어서 자기 인격화 해버려요. 그건 신앙도 그렇고 믿음도 그렇고 성화도 그렇고 다 그냥 자기 걸 만들어서 내 걸로 만들어서 그게 내거라고 생각을 해요. 그러니까 하나님마저도 내거로 만들어서요 나라는 우상을 섬기는 데에 방법과 힘과 도구로 써버리는 거예요, 하나님을.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신앙이라는 건, 믿음이라는 것도 마찬가지. 그건 내가 소유하는 게 아닙니다. 큰 거시적인 믿음이라는 것 자체가 갈대아우르에서 아브라함을 꺼내서 모리아 산에 세울 때까지의 전 과정, 하나님의 열심을 가리켜 믿음이라고 해요. 그게 믿음이에요. 믿음은 일차적으로 내께 아니에요. 하나님꺼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갈대아우르, 바벨론이죠? 갈대아가. 바벨론에서 세상을 상징하는 바벨론에서 하나님이 찾아가셔서 우상을 만들어 팔던 자, 그 중에 가장 연약하고 지저분하고 추한 자를 쫓아간 거예요. 하필이면 갈대아우르에서 우상을 ‘만들어’ 팔던 자를 쫓아가냐고요. 그게 믿음이라는 걸 (?) 보여준 거예요. 아니 그때 당시 아브라함과 같이 동시대에 살았던 의인 있잖아요? 욥. 그를 찾아가지 차라리. 왜 우상 만들어 팔던 아브라함을 찾아가냐고요. 찾아가서 뽑아낸 거예요, 하나님이. 뽑아내서 지 안위를 위해 마누라를 두 번씩이나 팔아먹고 온갖 임기응변 권모술수를 사용하여 자기 이익만 챙기던 자를 결국 자기 존재의 가장 큰 Extension, 자식, 그건 나에요, 나. 나보다 더 소중한 게 자식이거든요. 그 나. 너를 죽여라, 라는 그 자리에 그래요 죽을게요, 라는 절대 순종의 자리로 끌고 가는 전체의 과정을 믿음이라 그래요, 하나님의 믿음.
엄마나 아빠가 자식에게 아빠는 너 믿어, 라고 했을 때 믿어, 라는 거에 아빠의 계획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기대가 들어가 있고 아빠의 소원이 들어가 있는 거거든요. 아빠는 너 믿어! 근데 인간인 아빠는 너 믿어, 라고 하지만, 네가 열심히 안 하면 너는 안 돼. 그러니까 열심히 해줘. 아빠는 이런 기대가 있지만 네가 도와줘야 돼. 이게 아빠의 기대에요, 아빠의 믿음이에요, 인간적인 아빠의 믿음.
그러나 하나님의 믿음이라는 건, 아빠가 너 믿는다. 너 반드시 모리아 산에 가야 돼. 근데 그분은 전지전능한 분이에요. 그래서 아빠의 믿음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믿음은, 우리를 그리로 완전히 데리고 가면서 완결시키고 종결시켜버리겠다, 라는 그 의지까지도 함께 들어가 있는, 함의 되어 있는 믿음이란 말에요. 그걸 믿음이라 그래요. 그렇게 하나님에 의해서 끌려 가다보니까 어, 하나님이 진짜 나를 내 소원이나 내 비전이나 야망을 묵인하고, 들어주지도 않고 아버지의 소원대로 날 끌고 가는구나!를 배워서 그러면 이 아버지가 끌고 가는 곳이 진짜 좋은 곳이겠구나,를 경험을 조금씩, 조금씩 배워 내걸로 내어놓는 걸 그걸 이차적인 주관적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 믿음은,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믿음이 없이는 격발될 수가 없는 믿음이에요. 그러니까 그 믿음 또한 내께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믿음이 있다,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믿음을 소유하여 그 믿음을 발휘할 수 있다 그래요. 그게 변화산 아래에서 귀신 들린 아이를 고쳐주려고 했던 제자들에게 있었던 가짜 믿음인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내려오셔서 이 패역한 세대여 너희들이 믿음이 없구나! 그러는 거예요. 왜 믿음이 없어요? 그들이요? 근데 그들이 (?)했던 게 뭐냐면, 내가 얼마 전에 예수님에 의해 파송됐을 때 귀신을 쫓아낸 경험이 있었거든요. 근데 그때는 예수님이 보냈단 말입니다. 능력을 주어서 보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예수님이 시키지도 않았습니다. 근데 내가 전에 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게 내 능력인줄 아는 거예요. 그게 내 수준인줄 아는 거예요. 그래서 가갖고 고치려고 했는데 안 돼요. 그때 예수님이 그러시는 거예요. 그거 니네 믿음 아냐. 이 믿음이 없는 세대야. 너희가 겨자씨 한 알 만큼만의 믿음만 있었어도 이것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말은, 믿음은 겨자씨가 생산하는 거야. 안 보이는 거야. 이 겨자씨 같은 믿음. 이 겨자씨 같은 믿음이 난 나에게서는 없는 것 같지만 실지로는 내가 부인이 되고 하나님의 믿음이 나를 이끌어가는 게 진짜 믿음인데 내가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그 믿음을 갖고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아무것도 일어나지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들은 겨자씨만 한 믿음도 없구나! 그런 것입니다. 믿음은 겨자씨 같아야 되는데 너희들은 그 믿음도 없기 때문에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는 거야. 겨자씨 같은 믿음이어야 되는데 태산 같은 믿음을 갖고 있잖아요, 다들. 그러니까 그게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는 거예요. 그것도 없다는 거예요.
겨자씨는 눈에 보이지도 않아요. 돋보기 쓰고 봐야 보이거든요. 사람들이 뭐 성지순례 갔다가 가지고 온 겨자씨는 되게 큰 겨자씨에요. 왜냐하면 상인들이 팔아먹어야 되기 때문에 겨자씨 중에 제일 큰 것들 골라서 그거 붙여주는 거거든요. 안 보이는 거 살 수는 없잖아요? ㅎㅎ 벌거숭이 임금님처럼. 그러니까 그거 팔아먹을라고 큰 겨자씨를, 근데 그것도 얼마전엔가요? 보니까 이 깨를 한 백분의 일로 쪼갠 거 같아요. 그런 믿음도 없다, 라는 건 아예 없다는 뜻이에요.
여러분, 우리에게는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믿음이 없어요. 그래서 가끔 믿음이 있다고 하는 여러분에게 전혀 믿음과 상관없는 자의 삶 같은 삶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럼 그때 그 삶은 뭐냐고요? 하나님이 경험케 하시는 거예요. 믿음은 너희들이 갖고 있는 게 아니라 너희들이 나와 관계있을 때에만 너희에게 보여지는 거라는 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놓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분의 은혜만을 꼭 붙들어야 되는 거예요.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이 나를 놓으면 난 이렇게 되는구나. 그냥 옛날로 금방 돌아가요. 우리는 그런 연약한 존재에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만 꼭 붙들고 그분만 꼭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우리 그거 배우고 가는 거예요.
근데 이 가말리엘이 여기서 지금 사도들을 놓아줘라, 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많은 이들이 이 가말리엘을 굉장히 높이 평가를 하는 그런, 신학자들조차 굉장히 높이 평가를 하는데. 여러분 한번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리고 오늘날 교회의 그런 타락한 모습들을 염두에 두고 한번 잘 읽어보세요. 이 가말리엘이 진짜 선한 선생입니까? 이 참, 이 사람이 괜찮은 사람인 거예요? 진짜? 어떤 면에서는, 그래 인간들의 선악의 기준으로 도덕이라든지 합리성이라든지 뭐 이런 걸 기준으로 해서 볼 때는 괜찮은 사람이죠. 산헤드린 공회 전체가 분노가 일어나가지고, 그것도 괜한 분노가 아니고요. 금방 자기 앞에서 앉은뱅이가 일어났어요. 그 사람이 거기에 있었단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안 보이는 거예요, 이 사람들 눈에. 정신이 좀 온전했으면 궁금했을 거라고요.
도대체 어떻게 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자가 일어나서 걸어다니냔 말에요.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앉은뱅이가 일어났는데 그 사람이 안 보여요. 두렵기라도 했을 텐데 그게 안 보이고 자기들이 때려죽인,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님을 빌라도의 법정에 끌고 가서 죽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이 그분이 살았다고 하니까 그게 무서운 거예요. 그분이 살았다고 하면 자기들이 유죄거든요. 그러니까 안 되는 거예요. 이들을 땅에 묻어버리고 싶은 겁니다. 인간은 그래요. 자기의 죄가 발각이 되면 뉘우치는 게 아니라 그 발각시킨 존재를 묻어버리고 싶은 거예요.
옛날에 아프리카 선교사님이 처음 아프리카 오지에 들어갈 때 거울을 갖고 갔는데 아침마다 면도도 해야 되니까 밖에다가 거울을 걸어놨는데 이게 너무너무 신기하니까 그 지역 추장 와이프가 거울을 팔으라고. 그래서 팔긴 뭘 파냐 가져라, 줬더니. 거울을 딱 보자마자 이게 누구냐고? ㅎㅎ, 그게 너다 그랬더니 거울을 깨버렸네 그 자리에서. 팍 깨버리더래요, 그 자리에서. 말도 안 돼! 이게 나야? 이 킹콩 같은 게 나란 말야? ㅎㅎ. 여러분 그게 인간입니다. 예수를 그래서 죽인 거예요. 니네들 죄인이야, 회개해야 돼! 그러니까 우린 제사 지내고 율법 잘 지키면서 잘살았는데 왜 니가 나를 죄인이라 그래? 여태까지 아무도 그런 말 한 사람이 없었는데 왜 니가 와서, 왜 니가 와서 날 죄인이라 그래? 거울을 확 깨버린 것입니다. 그게 십자가인 거예요. 그런, 그런 의도로 지금 산헤드린 공회 전체가 분노를 하여 사도들을 죽이자, 그랬어요. 죽이자.
그때 가말리엘이 벌떡 일어나서 침착해라. 다들 존경했다 그러죠, 그분을요, 그죠? 교법사로, 그 율법을 가르치던 자에요. 가르칠 교, (?)법. 율법을 가말리엘 그 문하에서 배운 이들이 산헤드린 공회가 됐으니 얼마나 존경 받았겠어요? 여기선 대장(?). 그런 원로가 딱 일어나서 침착해라 그러니까 조용해진 거죠. 뭐 그렇게 호들갑이냐? 야, 예전에 드다라는 놈이 일어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봉기를 했었냐? 근데 다 죽었잖니? 얘네들도 만약에 하나님이 보내신 거면 흥왕할 것이요, 안 그러면 죽을 건데 놔둬라. 아우 멋있죠?
여러분 이 사람이 뭘 근거로 지금 어떤 판단 기준을 갖고 이 사람이 성공, 진짜 하나님이 보낸 사람인지 아닌지를 구별할라고 그러죠? 지금? 세상적 성공이에요. 이들이 망하고 죽으면 그들은 하나님이 보낸 거 아니고 이들이 살고 이들이 진짜 흥왕을 하면 그게 하나님이 보낸 거야. 나중에 한번 두고 보자. 시간과 성공이라는 걸 판단기준으로 하여 지금 이들이 하나님이 보낸 자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고 있다고요. 그게 세상이에요. 근데 이들이 다 죽었잖아요? 나중에 가말리엘이 뭐라 그랬을까요? 거봐라, 망했잖아! 그랬을 거예요. 내가 그때 뭐라 그랬어? 죽었잖아. 근데 하나님은? 그게 성공이야 그러시죠?(?). 예수님이 죽었을 때 세상은 전부 박수를 치며 쾌재를 불렀어요. 우리가 이겼다. 죽였으니까. 근데 하나님은? 아냐, 내 아들이 이긴 거야. 오른 손으로 그를 높이 들었다, 그래요. 그게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거든요.
그런데 가말리엘은 이렇게 똑똑한 교법산데도 불구하고 놔둬, 진짜 그들이 하나님이 보낸 이들이면 흥할 거야. 아니면 망할 거야. 이게 불신앙이에요. 이렇게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똑똑하고 깨끗한 사람이. 뿐만 아니라 이들은 이 가말리엘은, 이 사도들이 하는 일이 뭔지를 전혀 알아먹지 못했어요. 고작 비교를 하는 게 드다와 유다. 이 사람들은 그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 민중봉기를 했던 사람들이거든요. 그러니까 그 정도의, 그 정도의 어떤 그 민중의 리더, 사람들을 격동시켜서 뭔가 세상적인 어떤 공헌을 하는 그 정도로만 보는 거예요.
지금 이 사도들은 생명을 전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의 생명. 그런데 가말리엘은 유다나 드다 같이 그냥 그러다 말거야. 그러니까 그런 문제로 보는 거예요. 자기들 앞에서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이 있었는데 그 사도들로 인해 일어난 사람이 서있는데 그걸 보는 눈이 없는 거예요. 이 똑똑한 사람이. 그런데 여러분은 아시죠, 그죠?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 미문에 앉아있던 그가 벌떡 일어났죠? 미문이라는 건 아름다운 문입니다. 미문에 앉아. 세상은, 사람들은 (?) 세상이 전부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죠? 사랑하는 자식, 사랑하는 부모, 사랑하는 가족, 이웃, 내가, 나를 먹여살려주는 직업, 일. 이런 것들이 이제 잘 되니까 행복하고 기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야 뭐 죽을 맛으로 살지만.
그런, 그러나 만일 세상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봐요. 평생 죽도록 일하는 거예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 거죠. 그런데 이 사람은 날 때부터 앉은뱅이에요. 누가 데려다가 딱 놓고 동냥 통을 그 앞에 놔주면 동냥을 이렇게 턱턱 던져주면 그거 받아서 아름다운 미문에서, 아름다운 세상에서 그거 갖고 먹고 사는 거예요. 그게 세상이에요. 자기가 앉은뱅이인줄을 몰라요. 그냥 놔두면 그 자리에서 그냥 꽂혀있어야 되는 그런 지옥의 불쏘시개인줄을 몰라요. 그리고는 고 세상이 던져주는 동냥에, 고거에 그냥 일희일비를 하는 거예요. 아이고 오늘은 동냥이 많이 들어왔네. 아이고 올해 연봉은 한 오만불이 늘었네, 그 동냥. 올해 연봉은 이만불이 깎였네? 그러니까 동냥이 늘어나고 줄어드는 거에 의해 일희일비하는 세상인 거예요.
그런데 어떤 이들이 오더니 동냥 통만 바라보고 있는 앉은뱅이에게 ‘나를 주목하라!’ 동냥 통 보지 말고 나를 봐라! 그런다고요. 우리들이 전부 바라보고 있는 게 뭐에요? 돈 명예 자식 관계, 이딴 거잖아요? 거기에 찾아오셔서 하나님이 너 어디 보고 있어? 나 봐! 봤더니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나는 네 동냥 통에 관심 없어. 나는 네 동냥 통에 관심 없어.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너는 이걸 가져야 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거기서 나오라는 거예요. Come out my people! 바벨론, 갈대아우르, 애굽. 나와라. 그랬더니 벌떡 일어난 거예요. 그게 구원이에요. 그걸 바라보는 게 성도에요.
가말리엘은? 야, 그딴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 이 세상에서의 독립 쟁취, 성공번영 이런 게 중요한 거지. 그걸로 모든 걸 판단하고 있는 거예요. 오늘날도 거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그런 식으로 기독교를 바라봐요. 신비주의 기복주의는 물론이고. 그거는 뭐 백 프로죠, 백 프로.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 하는 이유가 전부 돈 많이 벌고 성공하여 잘 먹고 잘살자. 구역예배 갔더니 거기에 한국 금란교회 출신 권사님이 한분 우리교회에 새로 오셨어요. 정말 열심히 하셨더구만요. 옛날에 그 김홍도 목사님이라는 분이 이 짜는 데에는 도사거든요, 아주. 하여튼 빚내서, 빚내서 헌금하시고 남편 병원비, 암으로 돌아가셨다는데, 병원비를 모아놨던 걸 병원을 못 데리고 가고 헌금하셨다니. 그러니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얼마나 미안했겠어요? 남편한테. 그런데 그러면 상 받을 줄 알았다는 거죠, 그러면. 그리고 그렇게 해서 진짜 칭찬 많이 받았고. 그런데 어느 날 그렇게 열심히 하던 사람인데 이게 진짜일까?(?) 라는 회의가 들더라는 거예요. 그때 인제 우리교회 설교를 어떻게 듣게 되셔갖고 확 뒤집어져갖고 오셨는데. 너무 자유로웠다는 거예요. 너무 자유롭다는 거예요. 예전에는 안 그러면은 정말 큰 벌 받을 것 같고 내가 받을 상 못 받을 거 같고. 이 땅에서도 가난하게 사는데 천국에서는 내가 떵떵거리면서 다른 사람보다 더 잘 살겠다, 라는 그런 생각으로 하늘의 상급 받겠다고 그렇게 남편 병원비까지 빼서 헌금해버리고. 근데 제가 그러더래요. 어느 날 설교하는데, 거기서도 빈부의 격차가 있고 거기서도 상과 벌이 있으면 그게 무슨 천국이냐! 막 소리를 지르더래요. 생각해보니까 어, 그러네. 거기서도 나보다 잘 사는 사람이 있고 못사는 사람이 있으면 거기서도 굉장히 불만족스러울 텐데 그게 천국일까? 생각하다보니까 그동안 사기 당했던 게 너무 억울하더라는 것이죠. 근데 이미 다 바친 걸 어떡해? ㅎㅎ. 아이고 똑같은 생각 하셨네. 다 바치고 다 망하기 전에 그때 목사님 만났어야 되는 건데. 그전에는 못 만나요. 우리교회에도 그런 사람 많잖아요? 저 아래 그 요즘 부도난, bankrupt 난 그 교회 다니면서 집 다 팔아갖고 다 거기다가 헌금하고 완전히 알거지 돼서 우리 교회 오신 분들 꽤 돼요. ㅎ. 그때 좀 오시지.
그런데 그럴 때는 하나님이 안 보여요. 왜냐하면 내가 뭔가 하나님을 돕고 있다, 라고 생각하거든요. 내가 지금 뭔가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때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필연성이 느껴지지 않아요. 정말 탈탈 털고 바닥을 칠 때 하나님께서 너 이제 뭘로 살래? 물어보시죠? 그때 은혜 붙드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야죠,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게 복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 가말리엘처럼 자기가 누리는 거 다 누리고 있으면서 그게 뭔지는 아니까 세상적인 성공 그리고 어떤 시간, 시간에 의한 발전, 번영 이런 걸 판단기준으로 삼아서 진짜 하나님이 관여하는지 안 하는지 이렇게 판단하는 게. 이게 무슨, 이게 가말리엘 같은 신앙이 오늘날 교회의 신앙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요? 그건 신앙도 아닙니다, 여러분. 그래서 이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닌 거예요. 그냥 하나님이 사도들을 그때 죽이면 안 되니까 잠깐 들어서 사용한 것뿐이죠.
여러분은 어떠세요? 예수를 왜 믿으십니까? 도대체? 여러분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해결 받기 위해서 믿으세요? 세상의 성공과 번영을 위해서 믿으십니까? 뭣 때문에 믿으시는 거예요? 여러분 불교인들도 이 세상은 아무것도 아닌 일루션 공이며 허입니다. 이걸 깨닫고 그리고 이 참 진리의 실체인 브라만에 연합이 되겠다고 그렇게 애를 쓰는데 아니 기독교인이, 불교인들만도 못해요, 어떻게? 아니 불교뿐만이 아니에요. 증산도 같은 그런 잡교를 믿는 사람들도 이 세상의 것은 다 흘러가는 물, 들풀의 꽃 그런 거니까 우리 다가오는 신천지 그거 새 하늘과 새 땅 아니에요? 그 사람도 신천지 얘기해요. 거기 바라보며 열심히 수도하고 수행을 하고 살자. 다른 종교인들도 그 정도는 다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열심히 충성 봉사하여 이 세상에서의 힘을 얻어내려고 하고 있다면 이거는 세상의 그 종교보다도 못한 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아는 거예요.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거예요. 하나님과 친해지셔야 돼요. 지금 여러분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분과 친하다는 이런 자신이 없다면 여러분은 엎드려서 두려워 떠셔야 돼요. 벌벌 떠셔야 돼요. 입에 거품을 물고 어떡하면 돼요? 어떡하면 되냐고 그 먼저 믿음의 길을 가고 있는 이들의 바짓가랑이를 붙드셔야 돼요. 그게 매번 일어났던 영적 대각성 운동의 시작이에요. 조나단 에드워드나 스펄젼 목사님 조지 스프리트나 이런 사람들의 부흥의 도구로 쓰여서 첫 번째 설교를 했을 때 일어났던 일들이 다 그겁니다. 사람들이 삽시간에 확 쓰러져가지고 난 어떻게 해야 되냐고? 난 어떻게 해야 되냐고. 조나단 에드워드의 그 유명한 설교. 하나님의 진노의 손길 안에 놓여 있는 이 죄인들. 지금 읽어보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책이 한 권이에요, 설교 한 편이. 한 네 다섯 시간 했을 거예요, 아마. 그리고 그분은 지독한 근시이기 때문에 설교 원고를 들고 읽었대요, 등불을 들고 줄줄줄줄. 뭐 저처럼 소릴 지르고 이런 것도 아니에요. 근데 성령이 확 그들을 사로잡으니까 그냥 줄줄줄줄 읽었는데 사람들이 하나하나 쓰러지고 뒤에 있던 사회 보던 목사님이 입에 거품을 물고 엉금엉금 기어오더니 설교하던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님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대요. 나 어떻게 하면 되냐고. 그게 시작이어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근데 나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거기서 시작한 사람들이 조금 이따가 그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왜 나를 안 도와 주냐고! 이게 가능해요? 그러니까 맨 가짜라는 거예요, 제가.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거 아닌데. 구원의 시작은 지옥에서부터 시작하는 거라니까요. 내가, 내가 가야 할 그 지옥에서 시작이 되어서 어떻게 근데 하나님이 나를 하늘의 왕으로 삼으셨는가를 그 절절한 내용을 배워가는 게 기독교 신앙이에요. 뭐 대단한 거 할 필요 없어요, 여러분. 하나님을 알아가세요. 열심히 노력해보세요. 그리고 그 은혜 속에서 푹 젖어서 사세요. 그러면 돼요. 다른 사람들하고 친할 필요 없어요. 목사들하고 친할 필요도 없고 목사한테 잘 보일 필요도 없어요. 그 권사님은 목사님이 항상 그 저 헌금 내역을 보신대요. 그리고는 이 예배 시간에 그냥 공개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래요. 아무개 권사 교회가 이렇게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데 모든 권사직분 받은 사람은 지금 이천만 원씩 내라 그랬는데 너는 왜 천오백만 원밖에 안냈느냐고. 어 이렇게 노골적으로 하니까 그걸 안 내고는 못 배긴대요. 장로 오천, 권사 뭐 삼천, 안수집사 이천, 이런 식으로 금액을 딱 정해준대요. 그리고 그걸 매일 확인을 하니까 단 한 사람도 그걸 안 내고 못 배긴대요.
여러분 안심하세요. 저는 육년 동안 단 한 번도 그걸 본적이 없어요. 누가 헌금을 얼마 했는지. 그러니까 헌금이 늘어날 턱이 없지만 앞으로도 안 그럴 거예요. (?)기간인데 헌금을 고정적으로 많이 내는 그런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제가 그걸 안다면. 못 봐요. 저는요. 그렇게 동일하게 사람들을 평가하지 못할 거예요.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신앙의, 믿음의 분량대로 자기 것을 버리는. 우리를 위해 먼저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생명으로 헌금을 해주셨기 때문에 나도 내 소유를 하나님께 이렇게 정말 버리듯 드립니다, 라는 그 고백으로 그 분량만큼 헌금을 하게끔 기도를 한단 말에요. 헌금의 양이 사람의 믿음을 판단하지 못하지만 그 사람의 지금 신앙이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잣대는 될 수 있어요. 그게 그렇게 아까워갖고 그냥. 심지어 어떤 목사님들은 그런다고 하는데 얌체 같은 것들이 와갖고 밥만 먹고 간다고. ㅎㅎ. 밥값도 안 내고 밥만 먹고 간다고. 아, 밥만 먹고 갈 수도 있지 뭘 그걸 가지고. 그렇지만 끝까지 얌체가 되면 안 되죠. (?). 내가 그런 신앙인으로써의 어떤 나타나야 될 표지가 아니니까요.
밥값을 내라는 게 아니라 헌금이라는 건 여러분, 내가 갖고 있는 세상의 힘을 하나님 앞에 던져 버리는 거예요. 땅에 묻는 것입니다. 이게 어디 좋은 곳에 쓰였으면 좋겠다, 가 아니에요. 버리는 거라니까요. 그래서 교회 헌금은 너무 보람되게 쓰여도 안 돼요. 뭘 어떤 일을 하는 게 보람된 일이냐고요, 한번 생각해보잔 말에요. 뭐가 보람 있는 일이에요, 도대체? 그냥 버려지는 거예요. 세상의 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렇게 쓰레기처럼 여겨지는구나,를 오히려 세상과 구별되어 보여주는 게 교회인 것입니다. 그런데 뭐 그걸 그냥 어떻게 써야 되는지 어디에 뭐 어떻게. 여전히 돈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으로 무슨 일을 하겠다고 자꾸 나서는 거죠. 하나님은 그거 갖고 일하지 않으세요. 당신이 일을 하시죠. 스스로 일을 하시고 그런 것들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 누가 될 뿐이에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돕는다고 나서서 정말 하나님에게 도움이 될 거 같으십니까?
우리 애들이 제가 집에서 개집을 만들고 있는데 옆에 와가지고 못질해버리면요 저는 일을 두 배로 더 해야 돼요. 그거 뽑아서 다시 박아야 되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거기에 동참시켜주는 건 나중에 우리에게 면류관 씌워주시려고 당신이 손해와 상함과 돌아감을 감수하시고 그냥 우리를 동역자로 불러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조심스럽게 감사하며 면목 없이 그 일에 동참해야지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의 이런 인간들이 있어요.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그 사람들이 불신잡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도울 수 없어요. 하나님이 우릴 도우시는 거예요. 그 일을 행하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이 감동시키고 하나님이 만지셔서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 헌금하라, 봉사하라, 구제하라, 선교하라 하시는 것이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거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려서 항복하면 되는 거예요. 가말리엘처럼 그냥 깨끗한 척, 아는 척, 잘난 척 그렇게 하면 사람들에게는 존경을 받는데 전혀 하나님과는 관계없는 그런 인간들 되시면 안 되고 오히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무시 받고 이 사도들처럼 결국에는 두들겨 맞다가 죽는 모양으로 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인정하시면 되는 거예요. 그 일을 기도하시면서 베푸시면서 잘 가시면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
참 이 시대가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너무나 의심스러워집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한 번도 배워본 적도 없고
그냥 하나님을 이용하여 복 받는 방법만 배워온 이 시대에
어떻게 하나님이 이들을 내 딸아, 내 아들아 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말씀 속에서 복음 속에서 그 은혜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해주시고
우리의 본전을 본질을 더욱 더 깊이 직시하게 해주시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그 은혜의 필연성을 깊이 깨달아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