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력(萬曆) 15년 정해년(1587) 27일(병술)
맑음. 국기일(國忌日)이어서 재계하고 소식(食)하였다. 장인대인 곽몽징이 하정을 보내왔다. 예단(禮單)을 올렸으나 받지 않고, 교역을 명분으로 요구하는 것이 끝이 없었다.
晴. 以國忌齊素. 掌印大人郭夢徵送下程. 呈禮單不受, 托名交易, 徵求無厭.
만력(萬曆) 15년 정해년(1587) 28일(정해)
맑음. 晴.
만력(萬曆) 15년 정해년(1587) 29일 (무자)
맑음. 도사(都司)에서 베푼 잔치를 받았다. 장인(掌印) 곽몽징과 이대인(大人) 유병절(劉秉節)이 자리에 앉았기에 처음에 중간 계단으로 나가서 서쪽을 향해 다섯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렸으며(五拜三叩頭), 다음에 대인에게 재배하고 예를 행하였다.
탁자 앞으로 자리를 옮기자 여러 음악을 교차하며 연주하였다. 시작할 때는 한 사람이 들어와 춤을 추었고, 중간에는 두 사람, 마지막에는 다섯 사람이었다. 모두 가면을 쓰고 무기를 들었는데, 어떤 자는 창을 들었고, 어떤 자는 깃발과 몽둥이를 들었다. 펄쩍펄쩍 뛰며 교전하는 모습이 마치 전투가 한창 달아오른 형상이었다. 또 다섯 사람으로 달자무(舞)를 추며 공연을 마쳤다.
길이 양 도독(楊都督) 집을 경과하였는데, 원림(園林)이 지극히 성대하였다. 소당(小堂) 뒤에 청석(靑石)이 있었으며, 바위 둘을 꽂꽂이 세워서 안치하였고 길이는 8척, 폭은 3척이었다. 그 곁에 있는 큰 소나무 또한, 기이하고 절묘하였다. 주인 양응규(楊應奎)는 도독의 형이었으며, 도독이 북경에 있어서, 응규가 그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 마음이 속되지 않아 다과를 차려서 우리를 위로하였다. 좌석에는 삼대인(三大人) 부사충(思忠), 포정사(布政司) 율재정(栗在廷), 어사(御史) 왕국필(王弼)이 있었다.
晴. 受宴於都司. 掌印郭夢徵二大人劉秉節在座, 初出中階, 西向五拜三叩頭, 次行再拜禮於大人. 移坐卓面, 衆樂交作. 始以一人入舞,中以二人, 終以五人, 皆著假面持兵器, 或戈戟或旗梃. 踴躍交鋒, 如戰酣狀, 又以五人為撻子舞而罷. 路經楊都督家, 園林極盛, 小堂後有青石, 以兩石兀而安之, 長八尺廣三尺, 傍有長松, 亦奇絕也。主人楊應奎, 乃都督之兄也, 都督在京,應奎守其家, 其心不俗, 設茶果以慰之, 座有三大人傅思忠, 布政司在廷, 御史王國弼也.
▶이대인(大人) : 흔히 사신단의 정사를 '대대인(大大人)', 부사를 '이대인(二大人)', 서장관을 '삼대인(三大人)'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위의 기록은 요동 도지휘사사(遼東都揮使司) 즉 '요동 도사(遼東都司)'의 관리를 가리키는 말이므로 이때의 '이대인'은 요동 도지휘사(遼東都指揮使)(정2품, 도사의 총책임자) 아래의 '도지휘 동지(都指揮同知)'(종2품)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또 이 기록 하단에는 '삼대인(大人)'이라는 호칭도 나오는데 이 역시 '도지휘동지' 아래의 '도지휘첨사(都僉事)'(정3품)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 달자무(舞): 달자(子)는 중국 명나라 시대에 몽골, 여진 등 북방 이민족을 낮추어 부르던 말로 흔히 '달적(賊)'이라고도 한다. 그들이 추던 춤을 '달자무(舞)'라고 부른다.
《국역 배삼익 조천록》 p163 ~ 164, 김영문(세종대왕기념사업회 국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