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깊어가는 날, 사월 초파일이 지나고….
나쁜 질병으로 인해 초파일 행사도 모두 취소가 되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때
멀리 함양으로 나들이를 떠납니다.
가는 길 만만치 않습니다.
국도를 타고 논산 - 익산 – 전주 – 남원 – 인월 그리고 함양으로….
부처님 오신 날이 있는 음력 4월에는 사찰여행을 많이 다니네요.
오늘은 함양의 산속에 있는 벽송사 이야기를 올립니다.
한국 선불교 최고의 종가 벽송사
아내와 함께 떠나는 벽송사 길, 남원에서 점심으로 추어탕을 먹고
인월지나 마천으로 달려갑니다.
지리산자락을 끼고 도는 인월에서 마천 가는 길은
고불고불 산길을 넘어갑니다.
지리산에서 흘러 내려온 큰 계곡물을 따라 흘러갑니다.
돌고 돌아 도착한 벽송사 입구입니다.
근처에는 수행도량인 서암정사가 있습니다.
언덕진 도로를 따라 벽송사 주차장으로 올라갑니다.
벽송사 입구의 주차장에 주차하고 저 멀리 구름 속의
지리산을 바라봅니다.
확 트인 전망이 좋은 사찰입니다.
벽송사의 송자는 소나무를 뜻하나 봅니다.
멋진 소나무가 주차장 옆에 자리한 모습입니다.
벽송사는 조선 중종 시대인 1520년 벽송지엄 선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수행하여 도를 깨달은 유서 깊은 절입니다.
입구에서 올려본 벽송사 모습입니다.
구름에 가려진 산을 등지고 서 있는 모습에
사찰의 고요함이 흐르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 불교의 선맥을 보면 벽계정심, 벽송지엄, 부용영관,
경성일선, 청허휴정(서산), 부휴선수, 송운유정(사명) 등 기라성 같은
정통조사들이 벽송사에서 수행 교화하여
조선 선불교의 최고 종가를 이루었다 합니다.
벽송사에서는 선교를 겸수한 대종장들을 108분이나 배출하여
일명 “백팔조사 행화도량”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답니다.
벽송사 경내 동영상
벽송사 녹색의 담쟁이가 울타리처럼 자리한 모습입니다.
벽송사는 지리산의 천봉만학을 앞뒤 동산과 정원으로 하여 연꽃이
활짝 핀 것과 같은 부용만개, 혹은 푸른 학이 알을 품고 있다는 뜻의
청학포란의 형국에 자리하고 있답니다.
벽송사 기와 불사 시주…. 입구에 무인으로 시주함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벽송사를 창건한 벽송선사는 태고보우, 벽계정심 선사로부터 내려오는
심인을 전해 받아 조계정문의 정통조사가 되었답니다.
제2대 조사인 부용영관 선사는 도가 높고 학문이 깊어
승속 제자가 문전성시를 이루었으며 특히 영호남 일대의
선비들이 가르침을 많이 받았답니다.
벽송사에 은은한 불두화가 만발했습니다.
무용영관 문하의 많은 제자 중에 가장 유명한 분이
서산대사라 불리는 청허휴정과 부휴선수라 합니다.
벽송사의 종루입니다. 종소리는 지리산 계곡으로
퍼져가며 부처의 자비를 전파합니다.
서산대사는 깨달음을 얻어 벽송산문의 3대 조사가 되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팔도도총섭이 되어 승군을 일으켜
도탄에 빠진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데 진력을 다하게 됩니다.
벽송사 경내의 풍경입니다.
부용영관의 다른 한 사람의 수법 제자인 부휴선수 선사 또한
벽송사에서 도를 깨닫고 벽송산문의 조사가 되어 오랫동안
지리산에서 행화하였답니다.
오늘날 한국불교 출가 스님의 모두가 서산문파와 부휴문파에 속한답니다.
벽송사의 돌계단,,,부처를 만나러 오르는 계단입니다.
숙종 30년인 1704년 환성지완 대사가 벽송사에 주석하며
도량을 크게 중수하였습니다.
이때 불당, 법당, 선강, 강당, 요사 등 30여 동의 전각이
있었다 합니다.
벽송사 원통전입니다. 흐린 날 평일 오후의 벽송사에는
세상을 떠난 고승들의 쉼터가 되어 고요함이 가득합니다.
숙종 시대에는 상주하는 스님이 300여 명에 이르고
부속암자는 10여 개가 넘었다 합니다.
원통보전의 부처님 모습입니다.
당시에 금대암에 선원이 개설되어 수선납자가 운집하고
벽송사 본당에는 강원이 개설되어 일제강점기까지 지속하였답니다.
벽송사 샘물 동영상
벽송사의 소나무 한그루가 인상적입니다.
벽송사 강원의 마지막 강주를 역임한 초월동조 대사는 일제강점기에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혜화전문학교의 교장을 역임하고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옥고를 치르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답니다.
벽송사 산신각 모습입니다.
일제의 조선불교 말살 정책으로 인해 400여 년간 지속하여 온
한국불교 최고의 조정지인 벽송사의 사세도 기울고 특히 한국전쟁 때
지리산 빨치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이 되어 이로 인해 국군에 의해 방화, 완전히 소실되는 슬픈 역사를 맞이합니다.
함양 벽송사 목장승 누각입니다.
조선 시대 장승은 지방에 따라 벅수, 벅시, 법수, 당산할배 등의 명칭으로 불렸습니다.
벽송사 입구의 장승은 대략 일제강점기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전합니다.
장승은 사찰에 들어오는 악귀의 퇴치, 사찰 경내에서 행해지는 불법 어로와 사냥금지 등 다양한 목적으로 세워집니다.
이 장승의 모습은 머리와 큰 눈, 큰 코와 일자형 입술과 수염 등
그 모습이 무서운 것 같으면서 순박하고 위풍당당하며 불교와 민간신앙이 어우러진 걸작 조형물입니다.
1960년대 이후 구한원응 대사의 원력에 의해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특히 벽송선원을 낙성하여 2005년 하안거에 개원하여 눈푸른 납자들이 수선정진할 수 있는 선찰종가로 거듭났습니다.
벽송사 담장의 야생화의 모습이 아주 곱습니다.
벽송사에는 신라 양식을 계승한 3층 석탑과 벽송선사진영, 경암집 책판, 모법연화경 등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벽송사 선방에서는 도인이 유례없이 많이 나와서 ‘선방의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한다’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조선 시대의 고찰, 많은 명승의 득도의 사찰인 벽송사에서 봄날 오후의 시간을 보내며 지리산을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