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페르시아 제국. 유다 공동체 재건
에즈라기, 느헤미야기(기원전 539~330년)
30.1 페르시아 제국
페르시아인들은 인도·유럽어족으로, 엘람 동편에 자리 잡고 엘람에 한동안 복속되어 있었다. 기원전 6세기 이전의 그들 역사에 대한 정보는 미미하고 모호하다. 그들은 엘람을 정복하고 아케메네스Achemene의 아들 혹은 그 후손인 테이스페스Teispe 통치 때 수도를 파사르가다이Pasargade에서 고대의 수사Susa로 옮겼다. 아케메네스의 이름을 따 아케메네스Achemenidi왕조라 불린다. 테이스페스의 뒤를 이어 키루스Cyro 1세와 캄비세스Cambise 1세(기원전 640~560년)가 다스렸다. 키루스 대왕(기원전 559~529년)부터 페르시아가 그 세력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는 기원전 552년 메디아 왕 아스티아게스Astiage(아시리아의 권한이 종지부를 찍는 데 일조한 키악사레스의 아들)를 무찌르고 수도 엑바타나Ecbatana를 점령하여 영토를 자신의 왕국에 합병했다(성경도 메디아인과 페르시아인들의 왕국을 이야기한다. 다니 5,28 참조). 기원전 546년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Creso(당시 아나톨리아 전체에 대한 권력을 지닌)는 키루스에 패했고, 키루스는 현재의 터키 전체에 해당하는 지역을 정복할 수 있었다. 나보니도스와 연합한 크로이소스의 패배로 나보니도스의 위치도 흔들렸다. 오피스Opis(현재의 바그다드 지역)에서 바빌로니아 군대에게 한 번 승리를 거두고 키루스는 쉽게 바빌로니아에 입성했다. 그렇게 새로운 대제국이 건설되는데, 키루스는 복속된 백성의 국가 전통을 존중하고 우호 정책을 펼쳤다. 여기서 페르시아제국의 역사에 등장하는 왕들의 연대기를 짧게 살펴보자. 캄비세스 2세(기원전 529~522년)는 프삼티크 3세를 무찌르고 기원전 525년 이집트를 점령했다. 그 뒤를 이어 가우마타Gaumata라는 자의 반란을 진압한 다리우스 1세(기원전 522~486년)가 왕위를 올랐는데, 그는 왕국을 사트라피Satrafia라는 20개의 행정구역(이는 다시 세부 구역으로 나뉜다)으로 나누고 페르세폴리스Persepoli를 건축했다. 크세르크세스Serse 1세(기원전 486~465년)가 반란으로 목숨을 잃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롱기마누스, ‘긴 팔’이라는 뜻](기원전 465~423년)가 뒤를 이었다. 그 뒤를 이어 크세르크세스 2세(기원전 423년)가 고작 몇 주를 다스리다가 살해당하자 다리우스 2세(기원전 423~404년)가 왕위를 계승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기원전 404~358년) 통치 초기에 이집트는 독립을 회복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기원전 358~338년)는 기원전 341년 이집트를 재정복했지만 왕궁의 음모로 독살 당한다. 후계자 아르세스Arses/오아르세스Oarse(기원전 338~336년) 역시 음모의 희생양이 되고, 다리우스 3세 코도만누스Condomano(기원전 336~330년)가 왕위에 오르는데,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인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패했다.
30.2 유다 공동체 재건. 느헤미야 시대의 예루살렘 성전
1) 페르시아 시대의 유다 역사에 대한 사료는 근본적으로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인데, 이 책들은 연대기와 그 해석에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거기에 서술된 사건들을 도식화해 보면 이렇다.
기원전 538년: 키루스가 선포한 칙령(각 국가의 전통을 존중하는 정책을 펴 민족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에 따라 히브리 유배인 한 무리가 세스바차르의 지도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에즈 1-2장). 제단이 재건되고 희생 제사가 바쳐졌다. 세스바차르는 유프라테스 강과 지중해 사이 지역을 포함한 유프라테스 서부(아바르 나하라Abar Nahara)에 있으며 얼마간 자치권을 지닌 속주 유다의 지방장관직을 맡았던 것 같다.
기원전 520년: 지방장관 즈루빠벨과 대사제 예수아는 예언자 하까이와 즈카르야의 촉구에 따라 예루살렘 성전 재건 공사를 시작해 기원전 515년에 완성했다. 사마리아 귀족들의 반대로 크세르크세스 1세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치하에서는 예루살렘 재건 공사가 중지되었던 것 같다(에즈 4,6-7.23-24).
기원전 458년: 새로운 유배인 집단에서의 에즈라의 사명(에즈 7-10장; 느헤 7,72-9,37. 여기서 사료가 약 50년을 건너뛰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페르시아 왕으로부터 에즈라가 받은 사명은 ‘하느님의 법’이 ‘왕의 법’, 즉 국법과 같은 효력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토라는 유다 공동체의 근본적인 구심점이 되었다. 토라는 지금의 모세오경(성경의 첫 다섯 권)과 매우 비슷한 형태였음이 틀림없다.
기원전 446년: 느헤미야가 지방장관직을 맡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 복구를 마무리하는 동시에 일련의 사회적·종교적 개혁을 단행했다. 그의 직무는 기원전 433년(느헤 1-6장; 10,1-13,3)에 끝났지만, 같은 해나 이듬해에 두 번째 직무로 이어졌다(느헤 13,4-13).
성경 자료에 일관성이 없어서 이에 따른 연대기에 대해 여러 의구심이 제기된다. 성경 저자는 이 자료들을 역사적 기준이 아니라 신학적이고 종교적인 관심을 기준으로 배열했다. 여러 학자는 느헤미야가 지방장관직을 먼저 맡았고 그다음에 에즈라가 맡았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어떤 이들은 에즈라가 예루살렘에 도착한 것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통치 제7년(기원전 458년)이 아니라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통치 제7년(기원전 398/397년)이라고 본다. 또 다른 이들은 본문 필사의 오류로 보면서 에즈라가 예루살렘에 도착한 것이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통치 제7년이 아니라 제37년(기원전 428년)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 가설들은 궁극적 검증이 필요하고 현재 연구 상황으로는 분명하지 않다.
2) 이 약도는 느헤 2,11-15; 3,1-32; 12,27-43의 기록을 재구성하여 예루살렘을 나타낸 것이다. ① 양(혹은 양의 못) 문, ② 경비대 문, ③ 동 문, ④ 말 문, ⑤ 물 문, ⑥ 샘 문, ⑦ 토기 문, ⑧ 거름 문, ⑨ 모퉁이(혹은 가마) 문과 탑, ⑩ 에프라임 문, ⑪ 물고기 문, ⑫ 하난엘 탑. 느헤미야 시대에 예루살렘이 확장된 것에 대해서 고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동의하지 않는다. 관련 자료가 부족하고, 예루살렘은 이 성경 본문에 묘사된 것보다 더 작다고 보는 저자가 많다. 어떤 학자들은 티로페온 골짜기(이 책 27장 지도 2 참조) 서편 지역은 느헤미야의 성벽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보고, 다른 학자들은 그 지역 일부, 즉 남쪽 부분이 요새화된 도시 내부에 포함된다고 본다.
30.3 예루살렘 관할구역 도시들(느헤 11,20-36)
느헤미야기 11장 20-36절은 유배 이후에 재이주한 유다의 도시와 마을의 목록을 소개한다. 이 목록은 실제로 재이주한 도시들과 새로이 확장하고자 하는 이상이 섞여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사실 여호수아기 15장 21-47절도 매우 비슷한 특징이 있다. 따라서 이 목록들이 역사적으로 확실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이 지도로 예루살렘 관할구역에 포함된 도시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