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감상)
자작나무의 방향계
김장순
한해를 돌아보니/빈손이었다.//
살아온 날의 뒷길에는/푸른 빛 한 줄기/내일로 가는 방향계//
빈손이 하얗다.//
치악산 마른 숲에서/춥게 서 있는 자작나무 앞에/방향계가 멈추고 있다.//
자작나무 숲은 영하 이십도를 부둥켜안고//
흰 겨울과 하늘에/몸을 맡기고 있다.//
따뜻한 서정성과 담채색 수묵화
아침 창가에서 김장순 시인의 시첩(詩帖)을 펼쳐 들면 ‘정결함과 순수함의 상징인 자작나무가 겨울 산의 적막감’에 조화로운 한 폭의 담채색(淡彩色) 수묵화로 클로즈업(close-up)된다. 그렇다. “아무도 걷지 않은 눈밭 길이라도 함부로 걷지 말아라. 네가 남긴 발자국은 누군가의 이정표가 되느니라.”라는 서산대사의「답설(踏雪)」을 새삼 헤아리지 않더라도 밝은 미래가 불투명한 시간대에서 “한해를 돌아보니/빈손이었다.”라는 화자의 담담한 술회(述懷)는 시선의 끝이 하나의 소실점을 찍는’ 시 심리의 현상이다. 까닭에 “살아온 날의 뒷길에는/푸른 빛 한 줄기/내일로 가는 방향계”는 또 한편 오래된 기억의 잔상(殘像)을 스키마(schema)로 끄집어낼 것이다. 마치 ‘창조한 꽃의 사물화’로 명성을 얻은 미국의 여류화가인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의 “꽃은 작고, 들여다보는 일에는 시간이 걸린다.”라는 그 역설처럼 삶의 일상에서 “빈손이 하얗다.”라는 시적 감응(感應)은 잠시 멈춰 섬이 지극히 좋은 일임’을 분별한 행위이다.
차제에 “치악산 마른 숲에서/춥게 서 있는 자작나무 앞에/방향계가 멈추고 있다.”라는 일면에서 ‘풍향계가 아닌 방향계’의 그 가시화(可視化)는 날(刃) 푸른 생명의 엄숙성을 가늠한 존재감으로 신선한 충격이다. 각론하고 “자작나무 숲은 영하 이십도를 부둥켜안고”에서 새삼 확증되는 시적 형사(形似)는 혹한(酷寒) 뒤 그만의 깊은 심상(心傷) 또한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의 역설인 ‘그 신비스러운 동반자’와의 맞물림이다. 이처럼 동시대의 그 어느 시인보다 치열한 삶의 일상에서 견고한 고뇌와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로서 시적 의미망을 결(結) 곱게 직조한 정신작업은 “흰 겨울과 하늘에/몸을 맡기고 있다.”라는 상황정리로 ‘눈 덮힌 산과 하늘의 구도처리’는 ‘불림(佛林)의 적막함’에 언희(pun)를 거부한 ‘자기만의 육성, 체취, 느낌’의 정감은 ‘오호라!’ 한껏 가슴을 저며줄 따름이다.
(엄창섭, 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 월간『모던포엠』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