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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서 먹을거리(糧食)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최치국 2016.06.01.
아래,성서에 나오는 대표적인 먹을거리(糧食)에 대하여 몇 가지만을 추려본다.
[빵,포도주,물,생선]
1).출애굽기에서 시작된 유월절(Pascha-가톨릭)때 먹는 누룩 안든 빵
너희는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으라(출애굽기 12:15)
지금도 유대인들은 모세(Moses)의 인도로 홍해바다를 가로질러 이집트 대탈출(엑소더즈(Exodus)을 시도하여 유대인의 이집트 노예생활을 청산한 기념으로 행하는 유월절 명절때에는 반드시 누룩을 넣은 빵을 먹지 않고,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빵(무교병)을 먹고 있다.
2).사마리아여인과 우물가에서 예수와 대화(요한복음)에서 예수가주는 생수(生水=물)
유대인과 교제관계가 없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가 우물물을 달라고 부탁하면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라고 생수에 대해서 가르쳤다.
또한 가나(Cana)의 혼인잔치에서는 예수가 물을 포도주(와인)로 바꾼 첫 번째 예수의 기적
이야기가 성서에 기술 되어 있다.
3).최후의 만찬(-Lord’s Supper)에서 빵과 포도주
새크라멘트(sacrament)라는 행사때, 가톨릭에서는 영성체, 즉 성체성사(7성사의 하나)의 미사때 신부가 떼어주는 빵조각이 살아있는 빵이 되어, 즉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의 몸(살)과 피로 변화한다고 가르쳐 왔다.
초기 가톨릭에서는 "이것은 내 몸이고 이것은 내 피"라는 예수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결과이다. 시간이 흘러 대략 1500년대에 종교개혁이 일어나서 개신교에서는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예수의 말씀이라는 영적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4).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
나(예수)는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35)
나(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니 사람이 이 빵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빵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6:51)
5).오병이어(五餠二魚,five loaves of bread and two fishes)의 기적에 기술된 5개의 빵과
2마리의 물고기(생선)
6).주기도문(主祈禱文,Lord's Prayer)에 기술된 일용할 양식(糧食)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태복음 6:11)
7).그외 예수가 참여한 식사와 잔치들에서 먹을거리들
지금부터 대략 2000년 훨씬 전, 바로 그 옛날 유대지방에 나타난 예수(Jesus)는 신(神,GOD)의 아들이라 칭하였다.
바로 신(GOD)이 말씀하신 그 빵에 대하여 알아보자.(개역성경에서는 떡)
먹을거리(糧食)중 빵은 입(mouth)으로 들어가 그 찌거기는 뒤(항문)로 나오는 그런 양식인가? 아닌가? 아니면 무엇인가?
감각기관(感覺器官,sensoryorgan)을 통하여 마음(心,mind)속으로 들어가 탐욕(貪欲-욕망)이 되어 나오는 빵(음식)에 대하여 알아보자.
인간은 욕망을 떨쳐버리고는 단 1시간도 살수 없다. 모든 것이 욕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5개의 감각기관을 오관(五官)이라 한다
오관(五官)은, 눈(眼)ㆍ귀(耳)ㆍ코(鼻)ㆍ입(舌-口)ㆍ몸(身體-몸통,팔,다리포함)을 말한다
이 오관(五官)을 통하여 배출되는 욕망을 오욕(五慾)이라 한다.
이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눈(eve)이다.
눈(eve)--소경(장님,맹인),눈은 감각활동의 90%이상을 차지한다
귀--귀머거리
코--죽은 자(숨을 못 쉬므로-->호흡)
입--벙어리
몸--중풍병자 문둥병
옛날 우리말로 불구자, 즉 감각기관이 못 쓰게 된 장애인들인것이다.
신약성서(바이블)를 조금이라도 읽어 본 사람이라면 예수와 위의 불구자들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예수는 위에 나열된 불구자들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기술이 요한복음 9장의 소경을 눈을 뜨게 한 치유의 이야기이다.
또한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형상에서 위의 것들을 상상하여 볼 수도 있다
얼굴(눈,귀,코,입)과 팔,다리(몸)
또한 나자로(Lazarus)의 부활이야기에서 얼굴(눈,귀,코,입)과 팔,다리(몸)을 상상하여 보자.
죽은 자가 수족(손과 발)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요한복음 11:44)
예수의 부활(復活)만큼 또 중요한 부활이 나자로의 부활이다.
삼베쪼각으로 손과 발이 묶여 있었다.(몸-손과 발)
수건(붕대)로 얼굴이 칭칭 감겨 있었다.(얼굴-눈,귀,코,입)
“나사로야 나오라”예수가 말씀하시니 죽었던 나자로가 살아나 나왔던 현장의 모습속에서도
5개의 감각기관인 오관(五官)을 상상 할 수가 있다.
키에르캐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도 유명한 이야기가 바로 나자로의 죽을병인 것이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요한복음 11:4)
나자로가 병들었을 때 예수가 하신 말씀이다.
위에서 말한 우린 인체의 오관(五官)의 감각작용을 죽일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육신의 죽음뿐인 것이다.
나자로가 걸렸던 병은 “육신을 죽일려는 병”인 것이다.
“육신을 살리려하면 죽고 도리어 죽일려하면 살아날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인 것이다.
입(mouth)으로 들어가 그 찌거기가 뒤로 나오는 그러한 양식이 아니다.
오관(五官)으로 들어 가 탐욕과 증오라는 쓰레기로 배출되는 인간의 먹을거리, 즉
양식(糧食)을 위에 나열 한 대략 6개가 모두 말하여 주는 것이다.
요한복음 11:44의 무덤에서 나온 나자로는 오관(五官)의 감각작용을 죽이고 다시 살아난 것이다.
주기도문(主祈禱文)에서 “일용할 양식” 역시 입(mouth)으로 들어가 뒤로 나오는 그런 양식이 아니다.
여기서 양식(糧食), 즉 먹을거리는 입(mouth)으로 들어가 뒤로 나오는 그런 양식이 아니라.
마음(心,mind)속으로 들어가는, 더 정확히 말하며는 뇌(腦,brain)속으로 들어가는 마음의 양식(心之糧食)을 말하는 것이다.
무교병(無酵餠,unleavened bread), 누룩이 안 들어간 빵은 이 뇌(腦,brain)속으로 들어가는 마음의 양식(心之糧食)에서 빵을 부플게 하는 누룩작용이 없는 5개의
감각기관(感覺器官,sensoryorgan)이 그 감각하는 대상물에서 누룩의 작용이 빠진 감각대상물인 것이다.
“보는 것은 모두 욕망이다”
누룩은 술독에서 산소와 결합하여 곡식을 부풀리고 부풀려서 알코올을 만드는 작용을 한다
이처럼 뇌(腦,brain)속으로 감각대상물이 들어가 부풀리고 부풀려서 욕망이 되어 나오고 거기에 취하게되고 집착을 일으키게 된다.
거리에서 딱 마음에 드는 어여쁜 처자를 보았다고 하자.
우리 인간들이 눈(眼,eve)으로부터 받아들이는 객관대상물의 정보들(주로 사물에서 반사된 빛의 색깔들과 모양형태들)에 의하여 마음(心,mind)들이 생겨나서 그 마음들로부터 이 인간세상에서 활동하고 삶을 영유하고 있는 것이 인간들의 욕망의 소산인 것이다.
그 어여쁜 처자가 순간 욕망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눈(眼,eve)으로 본 처자의 색깔들과 모양형태들에 의하여 뇌(腦,brain)속에 부풀어 올라
욕망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 어여쁜처자가 아니라 100세도 훨씬 넘은 등 굽고 살이 쪼글쪼글 해진 할머니를 보았다면 거기에서도 어떠한 욕망이 생겨 날 까?
이 누룩이 빵에 한정되어 말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성구가 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린도전서 5:7)
사도 바울은 인간들을 지칭하여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누룩이 안들어간 빵(무교병)이 아니라 ‘누룩을 내버린 자“라고 기술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가 보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요한복음 9:39)
눈(眼,eve)으로 보는 자는 소경(맹인)이 되게 한다.
그리고 보지 못하는 자들은(스스로 소경이 되는 자) 진리를 보게 할 것이다,
인간들의 눈(眼,eve)을 하나의 센서(sensor=감지기)로만 본다면 눈의 망막에 비추이는 객관대상물들은 가지가지 색깔이 들어있는 색깔들의 입자(粒子)로만 보여야만 옳은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의 눈은 “잘 생겼다(예쁘다)”와 “못 생겼다(밉다)”를 자동분석하여 판단하고
이를 뇌(腦,brain)속으로 저장(貯藏,save)하고 이를 마치 누룩처럼 부풀리고 알코올처럼 취하게 하여 탐욕속으로 끌고 들어 가는 것이다.
예수의 말씀처럼 “대상물을 보는 자들은 소경(맹인)이 되게 한다”와 같이 실제로 대상물을
보지 않았으면 위의 처자에 대한 욕망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눈(眼,eve)의 이면(裏面->눈의 뒷면, 보이지 않지면 종이 뒷면 처럼 분명히 존재하는 것)에는 그 감각대상물에 대한 감정과 가치판단이 그 겉모양과 함께 붙어서 뇌(腦,brain)속으로 끌고 들어가 이를 부풀게하고 취하게 하여 욕망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누룩(leaven)을 다른말로 하면 효소(酵素)라 한다
빵에 넣는 이스트(yeast)처럼 알코올 효소작용을 뇌(腦,brain)속에서 일으키게 된다.
어어쁜 처자를 보았을 때 뇌(腦,brain)속에서 그 겉모양과 함께 그 처자에 대한 감정과
가치판단이 바로 효소(酵素)가 되어 이를 부풀게하고 취하게 하여 그 처자에 대한 욕망, 즉 애욕을 불러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가치판단(價値判斷, a value judgment)과 감정(感情,emotion)이 바로 누룩의 정체인 것이다. 바로 이 가치판단과 감정이 효소작용을 하는 것이다.
누룩이 안 들어간 무교병(無酵餠,unleavened bread)이란 바로 객관대상물을 어떠한 선입견,
어떠한 편견, 어떠한 판단도 없이 바로 그대로 인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알코올처럼 취(醉)하게 하는 뇌(腦,brain)속의 물질은 무엇인가?
바로 신경전달물질(神經傳達物質,neurotransmitter)이 뇌(腦,brain)속에서 분출되어 여기에
취하게 하여 인간들의 탐욕작용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도파민, 아드레날린(에피네프린)같은 신경전달물질은 마치 마약(痲藥)과도 같은
작용을 하여 그 욕망에 빠지게 하고 그 욕망으로 가게 만드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추행(性醜行),성폭력(性暴力)때 바로 뇌(腦,brain)속에서 신경전달물질이 분출되어 거기에 부풀려 취하게 되어 마약을 먹은 것처럼 자기제어력을 상실하게 되어 범죄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지하철성추행사건을 예로 들면 뇌(腦,brain)속에 신경전달물질이 분출되어 거기에 취하게되어 성범죄를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성서(bible)에서 이 신경전달물질(神經傳達物質,neurotransmitter)은 바로 물(水, Water)에
비유되어 기재되어 있다.
사마리아여인과 우물가에서 예수와 대화(요한복음)편에서 그 사마리아여인이 길어먹던 우물물은 바로 먹어도 먹어도 계속 목마른 신경전달물질(神經傳達物質)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니까 입(口,mouth)으로 들어가는 물이 아니라, 뇌(腦,brain)속에 분출되는 물인 신경전달물질을 물에 비유한 것이다.
바로 예수가 주는 생수(生水)를 마시게 되면 모든 탐욕(애욕)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목마르다는 표현은 욕망은 아무리 해도 만족이 없이 계속 욕망에 집착됨을 말한 것이다.
신경전달물질(神經傳達物質)을 끊임없이 배출하게 되므로 인간들의 욕망은 그 한정이 없게
작용이 되며,그러므로 “욕망이 있는 가축(畜生)”에 불과 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갈애(渴愛)라 표현하고 있다.
사랑(Love)은 한문으로는 애(愛)자로 표기한다. 갈(渴)자는 목마르다는 뜻이다.
이 사랑(Love)이 변질되어 탐욕(욕망)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들의 마음(心,mind)을 탐욕(욕망)에 물들게 그 음식에 대하여 알아보자.
그 해답은 아주 쉽게 예수께서 오천명을 먹이신 오병이어(五餠二魚. five loaves of bread and two fishes)의 기적(奇蹟)사건 안에 숨어 있다.
(마태14:13-21; 마가6:30-44; 누가9:10-17; 요한6:1-14)
우리들은 일반인 오천명들을 먹이신 기적(奇蹟)에 눈이 어두워 그 핵심을 놓치고 마는 것이다
알지 못하는 그 핵심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자.
위 4대복음에서 오병이어(五餠二魚)사건 어디의 기사에서도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를 먹은 것을 발견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그것들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먹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병이어(五餠二魚)사건의 팩트(fact=입증 할 수 있는 사실)인 것을 알아야만 한다.
여기서 5000명이나 되는 무리는 주로 구경꾼이나 예수를 따라 온 인간들이다.
많은 이들이 굶주린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긍휼한 마음과 사랑으로 생명의 양식을 베푸셨다는 기적사건에만 그 초점을 맞추어 보기 때문에 정작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 한쪽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정작 주연배우들은 보지 못하고 엑스트라만 보고 있다는 것이다
신약성서의 주연배우들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인 것이다.
five loaves of bread=5개의 빵
two fishes=2마리의 물고기
위에 열거한 음식들을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전혀 먹지 않았다.
이 음식들 역시 입(mouth)으로 들어가 뒤로 나오는 그런 양식이 아닌 것이다.
5개의 감각기관(感覺器官,sensoryorgan)을 통하여 마음(心,mind)속으로 들어가 탐욕(貪欲-욕망)이 되어 나오는 빵(음식)에 대하여 알아보자.
눈(眼)은 시각(視覺), 귀는 청각(聽覺), 코는 후각(嗅覺), 입은 미각(味覺). 몸은 체감각(體感覺)의 5개의 감각들이 바로 인간들의 욕망(慾望)을 일으키는 주최자들인 것이다.
다섯 개의 감각기관(感覺器官)은 전부 신경망(神經網,neuropil)으로써 뇌(腦,brain)속과 감각기관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얼마전 까지만 하여도 마음은 심장(心臟, heart)에서 이루어진다 하였지만 이제는 마음은
뇌(腦,brain)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정설로 받아 들여 져 있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먹지 않은 5개의 빵은 위의 5개의 감각기관에서 보고 듣고 감각한
감각정보들을 말하는 것이다.
감각기관이 본 그 감각정보를 들여다 보자
눈--대상물, 즉 사물의 모양과 형태와 색깔(빛깔)들--시각신경
귀--소리--청각신경
코--냄새--후각신경
입--맛--미각신경
피부(살)--감촉--통각,체감각신경<성(sex)적 접촉포함>
여기 나열된 5개의 감각기관이 본 5개의 감각정보들을 “5개의 빵”이라 표기하고 있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먹지 않은 2마리의 물고기(생선)에 대하여 알아 보자.
여기서 2란 것은
1>.가치판단(價値判斷, a value judgment)과
2>.감정(感情,emotion)을 나타낸다.
이 가치판단(價値判斷, a value judgment)과 감정(感情,emotion)이 뇌(腦,brain)속에 들어가서 저장(貯藏,save)되어 진다.
이 가치판단(價値判斷)과 감정(感情)은 따로 떨어져서 뇌(腦,brain)속으로 수용(受容)되는 것이 아니라 앞의 다섯 개의 감각기관(感覺器官)으로부터 얻는 정보에 덛붙여져서 뇌(腦,brain)속으로 들어 와서 수용되어 버린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다섯 개의 빵에 2개인 가치판단(價値判斷)과 감정(感情)이 붙어서 뇌(腦,brain)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감각기관들은 신경망(神經網,neuropil)에 붙어 있어서 감각기관이 객관대상물을 감각하면 그대로 그 감각대상물(感覺對象物)에 대한 이면(裏面)정보도 달라 붙어서 같이 뇌(腦,brain)속으로 들어 온다는 것이다.
인간이 미쳐 감지 못 하는 그 이면(裏面)정보가 “2개의 물고기(생선)”이라 표기하고 있다.
감지 못 하는 이유는 아주 미세하고 또 신경망속에서 감지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 2가지는 감각기관이 감각하는 대상물에 붙여서 뇌(腦,brain)속으로 수용하는데, 이 2가지가 변연계(邊緣系,limbic system)에서 시작되어 올라오고 또 그것들은
신경계(神經系,nervoussystem)에서 뇌(腦,brain)로 상호 연결되는 신경망(神經網,neuropil)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붙어 있어서 단순히 인간의 의지또는 각오로는 전혀 손 쓸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분리하여 수용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 객관(客觀) 감각대상물(感覺對象物)은 그 겉모양을 그대로 목으로 삼키듯이 뇌(腦,brain)로 들어오기 때문에 거칠지만, 여기에 붙어 들어오는 가치판단(價値判斷)과 감정(感情)은 아주 미세(微細)하기 때문에 인간으로써는 그 감도(感度)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그것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예를 들자면 어떤 종이 계약서 이면에 붙어 있는 이면계약 같이 그 대상물을 따라 계속 붙어다닌다는 것이다.
한 예를 들어 보자.
요즈음 한국 사회에서는 연예인이 되는 것이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꿈이 되어 버린지 이미 오래된 일이다. 바로 연예인 오디션을 보는 시험장에서 뚱뚱하다거나 그 외모가 좀 떨어진다 하면 그것 때문에 자동적으로 뒤로 밀려나게 되는 것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외냐하면 바로 그 겉모양 생김새에다 가치판단(價値判斷)과 감정(感情)을 붙여서 그대로 보고 적용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기에 한국 사회는 성형(成形) 최대강국으로 군림하여 성형외과가 부자가 되는 나라가 된 것이다.
변연계(邊緣系,limbic system)를 통하여 올라오는 가치판단(價値判斷)과 감정(感情)이 인간의 눈(眼,eve)에 붙어서 그대로 적용되어 모든 사물이 차별상(差別相)을 갖게 되는 것이 바로 인간(人間)의 마음을 쓰레기로 만들어 썩어 부패하게 만드는 원인인 것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예레미야 17:9)
모든 객관대상물을 바로 이 2마리의 물고기(생선)가 탐욕(욕망)의 산물로 끌고가는 것이다.
성서에서 갈릴리(Galilee)지방은 바로 뇌(腦,brain)속의 변연계(limbic system)를 가리키고 있다.
베드로와 안드레를 비롯한 여러명의 제자들이 바로 갈릴리(Galilee)지방출신이고 그 들이 잡는 물고기들은 바로 이 가치판단(價値判斷)과 감정(感情)인 것이다.
이 가치판단(價値判斷)과 감정(感情)이란 물고기들을 다 잡아 버려야 바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현재의 인간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漁夫)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마태복음 4:19)
이 가치판단(價値判斷)과 감정(感情)이란 물고기들을 다 잡아 버리면 바로 탐욕(애욕의 욕방)이 없는 사람이 바로 되는 것이다.
갈릴리(Galilee)로 가라! 이 말은 변연계(邊緣系)쪽으로 가 보란 말인것입니다
이 변연계(邊緣系)는 원시 뇌구조로 모든 축생(畜生)들도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원시 뇌구조에서 올라오는 가치판단(價値判斷, a value judgment)과 감정(感情,emotion)은 그대로 동물(動物)이거나 축생(畜生=가축)들도 다 가지고 태어나는 원시적 뇌구조인것입니다. 바다(海)에서 거친 파도가 일고 거친 풍랑이 몰아 칠 때를 인간의 감정(感情)의 일어남에 비유하여 이 변연계(邊緣系)를 바다에 비유하였고 또 아직 사람(人,man)이 아니라 동물(動物)이거나 축생(畜生=가축)들로 즉 짐승들로 예수(Jesus)와 붓다(佛陀,buddha)는 보았던 것입니다.
인간(人間)들은 가치판단(a value judgment)과 감정(emotion)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쾌락(快樂)과 탐욕(貪欲)과 그리고 분노(忿怒)와 성냄(瞋)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 장소는 시상(視床,thalamus)이다.
이탈리아 화가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1452∼1519)의 작품으로도 유명한 최후의 만찬(最後─晩餐.The Last Supper)의 음식에 대하여 알아보자.
누룩 든 빵을 먹지 않는 무교절(無酵節)첫날, 곧 유월절(파스카,페사흐)양을 잡는 날 저녁, 예수는 12제자들과 어떤 이층 다락방에 모여서 유월절 음식을 나누는 만찬을 베푼다.
식사도중에 예수는 자신에게 닥쳐 올 죽음을 예언하시고 또 자신을 배신할 유다를 지목하고
빵과 포도주를 제자들과 니누어주는 식사를 가진다.
참고:유월절(Passover)의 Passover는 건너 뛰다 의 뜻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대탈출(Exodus)을 기념하는 명절로 히브리어 페사흐, 라틴어 파스카이다
예수는 베드로와 요한을 시켜 유월절을 준비하라고 지시한다.
여짜오되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보라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의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그리하면 저가 자리를 베푼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예비(준비)하라 하신대
(누가복음 22:7~13)
다락방(upper room)은 주로 2층에 있다.
최후의 만찬이 열린 장소는
1).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의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2).자리를 베푼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예비(준비)하라.
에서 힌트를 가지고 찿아야 한다.
결과,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이 열린 장소는 뇌(腦,brain)속의 시상(視床,thalamus)이다.
시상(視床,thalamus)은 시상과 그 아래 시상하부(視床下部,hypothalamus)로 나뉘어 있다.
[위쪽이 시상이고 그 아래쪽이 시상하부이다]
시상(視床)은 코-즉 후각(嗅覺)을 제외하고 모든 감각기관에서 얻어진 감각정보가 모여드는 곳으로 눈(eye),귀,혀.몸에서 감각되어진 정보들을 모아서(한문 視床의 床은 밥상 상 소반의 뜻) 대뇌피질로 번연계로 전두엽으로 각장소로 전도시켜주는 곳이다.
감각기관에서 감각된 감각임펄스(impulse)를 뇌(腦,brain)속으로 중계하는 중계핵으로써
기능이 있다.
참고:감각임펄스(impulse)는 감각기관으로 부터로 얻은 자극의 전기적신호를 의미한다.
쉽게 말하면 눈(eye)에서 보고 느낀 대상물의 정보로 객관(Object)으로 불리워지는 사물에 대한 형태나 모양과 색깔을 말하는데 이에 대한 전기적신호를 말한다.
이러한 객관대상물의 전기적신호가 마치 밥상을 차린듯이 모여서 대뇌의 각 부분으로 전달시키는(대뇌피질, 대뇌기저핵, 변연계, 전두엽등으로) 역할을 한다.
아래 일층인 시상하부(視床下部,hypothalamus)는 주로 자율신경계와 관련된 기능을 하는데
주로 여러 가지 호르몬(hormone)의 분비를 조절한다.
직접 호르몬(hormone)을 분비하는 뇌하수체(腦下垂體,pituitary gland)가 바로 시상하부 바로 옆쪽에 자리잡고 있고, 또 시상하부 가까이에 식욕중추(食慾中樞)와 성욕중추(性慾中樞)가 자리잡고 있는 곳으로 욕망(慾望)과 관계가 깊을 것이다.
뇌하수체(腦下垂體)에서 분비하는 호르몬(hormone)들을 만들기 위하여서는 이 시상하부쪽으로 그 재료(성서에서는 물(水)로 표기됨)가 운반되어 질것이다.
----->물 한 동이(호르몬을 만들 재료)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이층 다락방으로 표기된 시상(視床,thalamus)은 감각기관의 각종정보가 모아져 차려놓은 밥상으로 각종정보를 뇌의 각 부분으로 전달하는 기능이 있다.
참고:
호르몬(hormone)과 신경전달물질(神經傳達物質,neurotransmitter)은 이름만 달리 부르지 거의 같은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들이 혈관(血管)속에서 피(blood)와 같이 운반될 때에는 호르몬(hormone)이라 부르고 감각세포인 뉴런(neuron)과 작용될 때에는 신경전달물질(neurotransmitter)-주로 대뇌피질에서-이라 부른다.
예수(Jesus)와 12제자들이 함께한 그 식사의 내용은 무엇인가?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빵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린도전서 11:24~26)
예수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만들어진 그 식사의 내용이 최후의 만찬사건의 중요 포인트인 것이다
바로 이것을 알아내서 모든이 에게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내용인것이다.
현재 인간들이 하는 뇌(腦,brain)속으로 들어가는 식사는 욕망을 일으키는 식사인 것이다.
그러니까 입으로 먹는 식사와 뇌(腦,brain)가 먹는 식사는 그 본질이 다른 것이다.
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라 하였다.
여기서 예수가 비유한 하늘과 땅은 육신이 죽어서 가는 저 하늘나라(천국)가 아니고 시체가 묻히는 땅속이 아닌 것이다.
예수는 자신과 하느님(GOD)을 가리켜 “빛(Light)”이라 칭하였다.
바로 예수의 몸이란 이 “빛(Light)”으로 만들어진 식사를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세한 것들은 “하늘과 땅의 비유”를 알아보고 나서 하도록 하자
“빛(Light)”으로 만들어진 빵“은 일체법(一切法)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포도주는 포도원을 보라
개신교의 참고서가 조직신학(組織神學,systematic theology)이다.
신학대학에 입학하면 이 조직신학(組織神學)을 배운다.
그리고 전도사를 거쳐 목사가 된다.
조직신학은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등으로 나뉘어져 있다.
과연 이 조직신학이 성서에 관하여 바른 참고서가 되어 있는가?
아닌 것이다.
또한 로만 가톨릭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이 바른 참고서인가?
이도 아닌 것이다.
성서에 관한 바른 참고서는 바로 불교에 대하여 바른 깨달음을 연자가 본 불교가 그 참고서인 것이다.
마음(心,mind)이란 말로 성서를 말하면 불교적이단으로 몰고 가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정작 성서에서는 이 마음(心,mind)이 어떠하게 표기되어 있는지 살펴보자.
에베소서 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마음에 그리스도가 계시게(=마음에 그리스도가 있게하여)하다는 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마음은 예수가 계시는 곳이다”라고 할 수 있다.
또 “너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라는 말 역시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게 하라”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마음 안에 예수가 있게 하다”라는 말은 어떻게 해석하여야 할까?
과연 성서를 읽어서, 설교를 들어서 마음 안에 예수가 계시게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안 것은 단지 지식일뿐인 것이다.
반대로 말히면 “우리 인간들의 마음속에는 예수가 없는 것이다”
대신 욕망이 마음속에는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욕망이 자리잡고 있는 인간들의 마음은 썩고 부패한 것이다.
탐욕(貪欲=욕망)과 소유(所有)가 없는 마음을 지녀야 그 것이 바로 “마음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게 할 수 있는 근본요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쾌락과 탐욕(貪欲=욕망)과 소유(所有)가 없는 마음을 지닌 자는 바로 이 세상으로부터 쓰레기 취급을 받는다.
일찍이 창세기(創世記,Genesis)부터 선악과(善惡果)가 등장하게 된다.
이 선악(善惡)을 알게 하는 나무도 선악(善惡)을 알게하는 인식론(認識論)에서 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인식(認識)은 바로 마음을 만들어 내는 요소중의 하나인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심령(心靈)이 가난한 자(者)는 복(福)이 있나니 천국(天國)이 그들의 것임이요(마태복음 5:3)
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뜻한다.
산상수훈(山上垂訓)의 첫째로 말씀하신 팔복(八福)중의 하나인데 “마음이 가난한 자”로
시작이 된다.
이렇게 성서에서는 사실상 모두 마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프뉴마(pneuma, 영어로 spirit)’이다.
가난의 헬라어는 프토코스(ptochos)이다.
이 마음이 가난한 자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바로 가치판단(價値判斷)과 감정(感情)이 빠진 마음이 가난한 마음인 것이다.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에서 5000명을 먹일 때 사용한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중에서 물고기 2마리가 가치판단(價値判斷)과 감정(感情)을 나타내고 이것들이 빠진 마음을 가난한 마음이라 할 수 있다.
보충
새크라멘트(sacrament), 즉 성찬이론에서 가톨릭은 화체설(化體設,transformation)을 주장하는데 이는 성찬에서 떡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화한다는 주장인 것이다.
개신교에서는
1).성찬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임재하시는 것은 아니고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기념이며 상징이라는 상징설(象徵設, 쯔빙글리의 견해)
2).성찬에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임재하신다는 영적 임재설(靈的臨在設, 칼빈의 견해)
3).성찬 이론은 성찬에서 떡과 포도주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적으로 임재하신다는 공재설(共在設, 루터의 견해)가 나왔는데 주로 상징설(象徵設)을 인정합니다.
<주로 장로교,성결교,감리교등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