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의 성사는
영적으로 성장하고
싶은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부활제3주일2024.4,14)
사도 3:13-15, 17-19; 1 요한 2:1-5; 루카24:35-48
죄의 용서에 대한 문제는 오늘의
모든 독서와 복음 말씀 전체를
통하여 흐르고 있습니다.
베드로 성인께서는 제1독서 말씀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라고
말씀하십니다.
제2독서 말씀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복음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런 내용의 말씀들은 부활의
기쁨은 오직 죄악으로부터 돌아선
다음에라야만 그 의미를 표출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시는 말씀들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절과 부활에도
불구하고 죄는 언제나 우리 삶에
현실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씀이지요,
죄의 용서는 수 세기 동안
화해의 성사와 연관되어 왔습니다.
그렇지만 지난30여년 동안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화해의 성사는
최저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이제 잠시 동안 화해의
성사가 그리스도교 교인들의 삶에서
차지했던 역할에 대하여 다 함께
생각을 좀 해보는 것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 유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초기7세기 동안 이 회개의 성사는
공개적으로 집행되었으며, 그 규율은
지나칠 정도로 매우 엄격했습니다.
대죄를 범한 사람들은 매주일 마다
성당에서 공개적으로 참회예식을
행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자루 옷을 걸쳐 입고
이마에 재를 바른 채 미사 시작 부분인
말씀의 전례 동안 성당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었습니다. 영성체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강론이
끝나면 밖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어떤 때는 그렇게 행해지는 공개
참회예식이 몇 년 동안 계속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참회자가 마침내
그리스도교 교인의 삶으로 되돌아갈
준비가 되었다고 여겨졌을 때
그 사람들은 성 목요일 성찬의 전례로
되돌아오라는 환영을 받았습니다.
이런 회개의 과정을 밟고 성체성사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는 사람들에게
단 한 번만 주어졌으며 – 그 후로는
오직 하느님의 자비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이런 절차는 분명 매우
엄중한 훈육이었습니다. 화해의 성사가
이렇게 공적으로 집행되었던 이유는
그 당시의 그리스도교 교인들이 하나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매우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었고, 죄악이 공동체 내에서
믿음으로 가득 찬 사랑의 유대를
훼손시켰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죄의 용서는 죄로 인해
훼손된 공동체와 공적인 화해의 형태를
띠게 되었던 것입니다. 죄의 용서는
결코 단순히 그 한 사람의 죄인과
하느님 사이의 사적인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참회 예식을
경축하는 방식에 처음으로 변화를
일으킨 곳은 아일랜드에서였습니다.
아일랜드의 관습은 사람들이 수도원에
가서 수도사들에게 사적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방식이었는데,
그 수도사들은 대개 사제가 아닌
평 수사들이었습니다.
이렇듯 아일랜드 사람들은 결코 공적인
참회의 제도를 채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다만 14세기 중세기 동안
공적인 회개 절차를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사제에 의한
사죄, 혹은 용서가 회개의 일부로
필요하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변화는 또 하나의 다른 변화로
향하게 해 주었습니다. 교회는 완전한
죄의 고백을 주장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모든 고백이 각각의 심각한 죄의
종류와 그 죄가 저질러진 횟수를 자세히
설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러한 전개는 다소 불행한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사려 깊은 사람들은
자신이 정말로 모든 죄를 다 잘
고백했는지 아닌 지에 대해 스스로를
고문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
지난 세기 동안, 아이들을
어린 나이에 첫 고해성사에 보내고,
그 이후에도 자주 고해성서를 볼 것을
권장하는 관습이 생겨났습니다.
고백하는 사람들의 어두운 면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때때로 고해
신부가 참을성 없이 고해성사 보는
아이들을 심하게 나무랐기 때문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많은 아이들이
고해성사 보러 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되어서, 평생은 아니더라도
수년 동안, 혹은 평생 동안, 그러한
두려움을 아이들의 마음 속에 남겨
두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이유들이 오늘날 화해의
성사가 쇠퇴된 이유가 된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아마도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흔히 가톨릭 교회의 화해의 성사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기 쉽고,
사람들이 하느님의 용서를 얻기
위해, 물론 진실이기는 하지만,
한낱 인간에 불과한 고해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데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화해의 성사와
관련하여 오늘날 우리는 어떤 상태에
놓여 있을까요?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래로
화해의 성사를 개혁을 하고
– Reconciliation 화해 라는- 하나의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더 전통적이며 같은 의미를
지닌 옛날의 이름인 고해성사도
병행해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화해”라는
단어는 잃어버린 이 화해의 성사의
초기 교회의 공동체적인 측면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나타냅니다.
즉, 사실적으로, 죄악이 하나의
공동체에서 자선과 사랑의 유대를
악화시킨다는 것이지요. 죄악이라는
것은 단순히 한 사람의 개인과 하느님
사이의 사적인 문제로만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고해성사 받을 준비를 다 함께 같이
할 때 화해의 성사에 대한 공동체
축하 행사들도 이런 측면을 강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변화는 사람들이
사제와 직접 대면하여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실행되는 화해의 성사는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고백의 질을
크게 향상시켜 주게 되었지요.
사람들이 스크린 뒤에 무릎을 꿇을 때,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어렸을 때
배운 것처럼 마치 빨래 목록을 툭툭
치려고 하는 듯한 경향이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그렇게 다른
한 사람의 성인(成人)과 대면하여
대화를 가질 때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이제 어른처럼
정상적으로 말하기 시작하고, 자기네들의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또는
자기네들의 행동의 기초가 되는
가치관이 어떤 것인지, 또는 자기네들이
어떤 태도를 바꿀 필요가 있는 지
등과 같은 내용에 대하여 더 깊은
질문을 기꺼이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발전은 분명히 화해의
성사가 온전한 성사로 자리를
잡아가는데 기여하게 되었습니다.
– 즉, 이런 변화는 바로 그리스도교의
성장으로 가는 길에 하나의 디딤돌이
되는 변화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변화의 내용은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추가적인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 즉 용서에
대한 하나의 경험과 확신, 주님과
가지게 되는 하나의 만남이라는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무지를 드러내
보여주시고, 믿음과 신뢰 속에서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도와주시며,
죄악으로 상처입은 우리를
치유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렇듯
화해의 성사는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삶에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신부님♡
제가 은혜를 많이 받아서
만나는 교우들한테 소개하게되네요.
건강하시고 행복한날
되셔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꽃 들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신부님도 항상 꽃처럼 피어나시기를요 . .^^*
아멘.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주님께서는 우리의 무지를 드러내
보여주시고, 믿음과 신뢰 속에서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도와주시며,
죄악으로 상처입은 우리를
치유해주시는 분이십니다
마음에 담아 갑니다.
예 좋습니다 기쁨니다
찬미예수님!!
노력하겠습니다
건행하세요 ~~
찬미예수님!
아멘. 🙏
꽃구경을 오시면 좋을텐데요.ㅎㅎ
아멘!
주님 은총으로 화해 성사의 삶을 충실히 살고 성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믿고 희망하고 감사드리며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님.
신부님늘감사합니다 항상건강하시고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복음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말씀과 묵상과 기도 [4월14일]
📖말씀: 1요한 2,5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 묵상
관심은 사랑의 표시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우리가 예수님 제자임을 알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끼리는 서로 형제요, 자매라 부르며 가까이 지내고 있지만 외롭고 불우한 사람들에게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공동체 의식을 보면 우리 테두리 안에서만, 형성되고 타인은 배척되기 일쑤입니다.
우리 본당, 우리 단체, 우리 모임등 이런, '잘못된 우리 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기도
주님, 저와 함께 걷고 계시는 당신을 알아 보지 못하고 예루살렘을 떠나 그릇된 길로 가지 않게 하소서.
💒실천해보기
•불우한 이웃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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