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마태복음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예수님께서는 4번째 복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말해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는 하나님의 의로 채워주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라는 헬라어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라는 말은 형용사 '의로운'이라는 헬라어 '디카이오스(δίκαιος)'에서 나온 여성명사이며 '디카이오스'는 '정죄', '심판' 등을 뜻하는 여성명사 '디케(δίκη)'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영적으로 목이 말라있기 때문에 무언가로 채워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행복해지려고 하고 만족을 얻으려고 하지만, 하나님과 단절된 그들에게는 영혼이 병들었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던 그 무엇을 성취하고 모든 것을 가지게 되더라도 결코 만족함이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른 어떠한 것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죄가 치유되면 비로소 만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려면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의(righteousness)'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법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의'에는 두 가지 '의'가 있습니다.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법을 지키는 것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며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 법을 지키는 것은 양심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는 로마서 2장14-15절에서 "양심이 율법"이 된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12-15)
마태복음 5장17-20절까지를 보면, 예수님은 율법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절대로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라며 성경은 율법을 반드시 지킬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성경은 우리에게 모든 율법을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의' 즉 우리가 율법을 행하는 것이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보다 더 잘 지키지 못하면 절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지극히 큰 고민거리가 생겼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이라면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하여 자기들이 더 많은 율법을 만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보다 더 의롭게 살아야 한다고 하시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해답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겉만 행하고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들보다 훨씬 나은 의의 생활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때에 진정으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있다면 우리는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훨씬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역시 한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3장 19-20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가 우리의 입을 막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라고 칭찬을 받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데, 그 이유는 율법을 주신 이유가 우리에게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죄인임을 깨달았을 때 가난한 마음으로 자신의 가슴을 치며 애통하며 주께 나아갔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의 마음을 예수님처럼 온유한 마음밭으로 만들어주셔서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도록 "의인"으로 칭의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음과 동시에 우리의 죄를 사하셔서 죄인에서 의인으로 우리의 신분을 바꾸어주시는 사랑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을 알게 되고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죄인에서 의인으로 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회개할지라도 피흘림이 없이는 죄를 대속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누군가가 피를 흘려 죽어야만 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정결한 동물들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였으나 그것은 해마다 치르어야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수많은 동물들이 우리를 위해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속죄양이 되심으로 해마다 속죄제를 드려야했던 그 제사를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치르시고 제사제도를 폐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불완전했던 속죄를 완전하게 하셔서 구원을 완성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53장2-6절에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법을 지킨 "예수님의 의"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의'를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이사야 64장5-6절을 보면 '우리의 의'는 모두 '더러운 옷'과 같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기쁘게 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랬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
로마서 5장12절에는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처럼 우리는 죄에 나 자신이 오염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고 죄에 대해 혐오감을 느낄 때, 하나님의 의가 우리 속에 전가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하나님께 가까이 가길 원하는 동시에 육체의 열매(갈 5:19-21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술수, 원수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함)인 죄악을 자꾸 끊어버리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 대해 말씀합니다. 악을 끊어버리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코 그것을 끊어버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우리는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21절에서는 "주린 자"라고 간단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마태복음 5장에서는 "의에 주린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만들어진 피조물이므로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을 갈망하도록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42편을 보면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메이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상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모스 8장11-13절까지 보면 인간의 목마름은 돈이 없어서도 아니며 먹을 양식이 없어서도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오는 목마름이라고 말씀합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주리다"라는 헬라어 '파이나오 πεινάω'는 현재 너무 배가 고파서 배고픔이 지속되는 상태를 말하며 또한 무언가를 열렬히 갈망하다(to crave ardently, to seek with eager desire)라는 뜻을 갖고 있는 동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목이 마르고 배가 너무 고파서 어떻게 해서든 배고픔을 채우고 싶은 그러한 주림과 목마름을 통하여 우리는 영적으로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하나님을 갈망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을 보면 니고데모가 의에 주리고 목마름으로 인하여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거듭남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3, 5)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므로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거하지 않으시면 영원히 목마를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합니다. 그래야 의에 대한 목마름을 채울 수 있습니다. 성령이 아닌 다른 어떠한 것으로도 우리의 영혼의 목마름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무언가를 찾으며 여러분을 만족시켜줄 그것을 잡기 위하여 향방없이 헤메이고 있다면 속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욕심을 부리기 시작하면 아무리 주어도 만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고 다고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것 서넛이 있나니 곧 음부와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이니라"(잠 30:15-16)
그러므로 우리에게 만족을 줄 수 없는 음부를 향하는 길로 달려가지 말고, 우리의 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향해 오늘도 힘차게 달려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며 살 소망을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며 그분의 기쁨이 되도록 노력하는 가운데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사랑의 주님을 체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10)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약 1:19-20)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
오늘 받은 은혜와 감사의 제목은?
김 수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