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잠에서 깨다 / 곽명옥 2023년 제14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작입니다.
박물관에 들어서는 순간 그 신비감은 내 눈 속으로 빨려 든다.
나의 눈길은 오직 한 곳, 복식과 장신구에 머무른다. 40여 년을 한복 원단과 디자인을 연구하고 제작하며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 나의 직업이니 어쩌랴. 두 사람의 초상화에서 비단옷과 화려한 철제 장신구로 보아 그 당시에 교통수단이 느리고 험했지만 국제 교역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가야의 백성이 된 느낌이다. 차분히 둘러보니 토기와 철기의 다양한 도구와 장신구들이 시대순으로 진열되어 있다. 벽 가운데에는 건국신화 속 가야의 산신 정견모주와 하늘신 아비가지 초상이 그려져 있다. 2015년에 완성된 영정은 표준영정 제96호로 공식 지정되었다고 한다. 넓고 긴 소매의 두루마기에 몸판과 다른 색으로 끝단을 이은 묵직한 두루마기는 왕과 왕비의 위용과 권위를 보여주는 듯하다.
고령은 나의 고향 달성과는 그리 멀지 않은 가까운 이웃이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고 이제야 가 보게 되었다. 이번에 제대로 볼 수 있는 기회라 여기며 들뜬 마음으로 버스에 올랐다. 산야는 온통 초록 옷을 입고 아기 웃음 같은 햇살과 상쾌한 바람은 기분을 한껏 돋워 준다.
고령에 들어서니 왕릉이 한눈에 들어온다. 5~6세기의 무덤들이 웅장하면서도 질서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대가야박물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가야국 의상을 재현하여 입은 해설사가 눈에 띈다. 어디를 가나 직업은 못 속이나 보다. 그가 입은 의상의 원단은 편리하게 입을 수 있는 화섬양단이다. 5월의 날씨에는 더워 보이지만 묵직한 느낌은 오히려 가야의 느낌을 더욱 짙게 재현하려는 듯 품격을 더하게 한다. 두껍게 단을 댄 윗옷과 치마의 끝단까지 단을 넣은 의상은 지금도 생활 한복에서 활용하고 있다.
몇 년 전에 보았던 창작오페라 ‘허황후’를 떠올린다. 뛰어난 철제 세공 기술은 해상문화와 실크로드 교류의 기반이 되었고 가야를 건국한 김수로왕과 인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국경을 초월한 사랑과 결혼은 오늘날의 국제결혼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왕족의 이상을 담아 건국신화와 설화로 꾸며진 오페라이다. 왕과 황후의 화려한 비단 의상과 왕관, 귀걸이 등 금세공 장신구, 그리고 관리와 백성들의 차등된 의상도 돋보였다는 호평을 받은 작품이었다. 그때로 돌아가 나는 무한한 상상에 빠진다.
태어나면서부터 몸을 가려주고 보호하는 것이 옷이다. 자연에서 얻은 마와 삼베로 추운 겨울을 어떻게 견뎠을까?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남자들은 사냥한 짐승들의 가죽과 털로 몸을 보온하며 살았을 것이다. 고려 공민왕 때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의 따스함을 접하고 우리나라에 보급하고자 붓뚜껑에 목화씨 몇 알을 몰래 숨겨왔으니, 그 이로운 밀수는 참으로 애민애족의 마음이었다. 무명옷과 침구가 만들어지고 양잠으로 얻은 비단은 왕족과 평민의 의상으로 만들어졌다. 한 시대를 대변하듯 오늘날의 의상 또한 많은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복잡한 사회 구조에 걸맞은 편리한 소재와 디자인의 양복과 양장이 주류를 이룬다. 전통이 무너지고 있는 안타까움도 있지만 우리의 전통 복식인 한복은 한류의 바람을 타고 지구촌 어디에서나 각광을 받고 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대가야왕릉전시관의 지산동 44호 고분 속으로 들어가 순장의 모습을 본 것이다. 누군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그것은 그 당시의 장례문화였다. 왕이 죽으면 살아생전의 삶 그대로 필요한 사람과 애장품을 함께 묻는 껴묻거리 현장에서 애잔하고 먹먹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말똥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하였건만 순장으로 선택된 누군가의 억울하고 순박했을 삶을 생각하며 애도의 마음을 전해본다. 금방이라도 그들이 벌떡 일어나 내게 묻는 것 같다. 순응이 무엇이냐고. 당신이라면 어떻게 선택하겠느냐고.
사람이 죽으면 어떤 형태이든 몸을 감싸는 수의를 입힌다. 요즘 문화로 보아 매장에서 화장이 보편화되어 가듯 사람도 생을 마감하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이치일 것이다. 수의 또한 자연으로 잘 돌아가는 천연섬유인 무명 또는 명주와 삼베를 소재로 지은 옷을 입혀 입관한다. 당시 순장된 사람들의 의복을 보면 살아생전의 옷을 그대로 입고 있다. 무덤의 지붕 아래에서 이승과 저승이 하나라고 믿었던 그들에게 영혼은 살아 움직이는 작은 우주였으리라.
깊은 잠 속에 빠진 고분이 눈을 뜨는 순간 그 시대의 의식주가 드러난다. 아비가지와 정견모주의 초상을 완성한 손연철 화백은 복식 역시 고구려 벽화에서 나오는 금관 장식과 복식을 토대로 하여 그렸다고 한다. 미비한 기록으로 잊혀 가던 대가야 문화 유적을 고령군에서는 하나의 고분을 발굴했다. 그 시대의 문화와 복식 등을 복원하여 역사와 문화를 알리고, 대가야축제 등을 통해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앞둘 만큼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고령 대가야 고분 유적지 탐방은 시간의 흐름 속을 걷는 느낌으로 새로운 감흥으로 다가온다. 과거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속에서 새로운 문화로 진화하고 있음을 깨닫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조상 대대로 입고 살아온 한복을 지금 내가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끼면서….
첫댓글 수필대전 입상을 축하 드립니다.
고령 대가야 유적탐방으로 한복에 대한 애정이 더 깊어졌으리라 여겨집니다.
고령 대가야 유적지를 돌아보며 이승과 저승, 그리고 전통의 진화를 아우르는 시선이 참 인상적입니다. 문익점의 목화씨 이야기부터 현 대가야 박물관의 복식 재현까지, 작가님의 직업적 깊이가 글의 풍성함을 한층 더해주는 것 같습니다.
달빛 선생님이 곽명옥 작가님의 모습을 너무 멋지게 표현해 주셨네요. 작가님 이미지와 너무 잘 어울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