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월암
조선 초 무학대사가 창건하였으며, 만공대사가 중건하였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
이곳에서 수행하던 무학이 어리굴젓을 태조에게 진상하였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1530년(중종 25) 찬술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간월도만 언급되어 있고 간월암은 언급되어 있지 않아 조선 후기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말엽에 폐사되었는데 1914년 승려 만공(滿空)이 다시 창건하였다
밀물이 들어오면 물위에 떠 있는 연꽃과 같다 하여 연화대(蓮花臺)라고도 불렀다.
고려 말에 무학 대사가 이곳에서 수행 중에 달을 보고 홀연히 도를 깨우쳤다 하여
암자 이름을 간월암(看月庵) 이라 하고 섬 이름도 간월도라고 하게 되었다,
간월암은 원래 피안사(彼岸寺)였다.
백제시대부터 그리 불렸다고 한다.
피안사는 사바세계의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열반의 땅일 수도 있고,
저 언덕에 이르기 위해 고해(苦海)를 건너는 배[舟]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낮에는 간월도에 붙어있는 새끼 섬이지만,
밤이면 선승들의 깨달음을 싣고 피안을 향해 떠나가는 어미 섬이 되기도 할 것이다.
간월암은 또 물 위에 떠 있는 연꽃과 비슷하다 해서 연화대(蓮花臺)로 불렸다.
간월암 일대가 아미타불의 서방정토인 연화장(蓮華藏)세계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둥실 떠있는 간월암을 보면 바다는 아미타불이 계시는 구품연지(九品蓮池)에 다름 아니었다.
그렇다면 간월암은 이 연지에 곱게 피어난 한 송이 연꽃일 것이다.
만공은 간월암을 자주 찾았다.
한번은 상좌 혜암과 사미승을 데리고 배에 올랐다.
배가 움직이자 멀리 보이는 산도 움직였다. 만공이 사미승에게 물었다.
“산이 가느냐, 아님 배가 가느냐?”
“산도 가지 않고 배도 가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이 가느냐?”
사미승은 말이 없었다. 이때 제자 혜암이 나섰다.
“제가 답해도 되겠습니까?”
만공이 이번에는 혜암에게 똑같이 물었다.
“그래, 산이 가느냐, 아님 배가 가느냐?”
스승이 묻자 혜암이 말없이 손수건을 들어 보였다.
만공이 보름달처럼 환한 표정으로 제자를 봤다.
“자네 살림이 언제부터 그러했는가?”
“이리 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움직이는 것은 바람도 아니고, 깃발도 아니다. 그것은 보는 사람 마음이 움직이고 있음이다.”
만공은 바람과 깃발[風幡] 대신 산과 배[山舟]로 제자의 경계를 탐색하고자 했다.
한데 혜암은 손수건을 들어 그간의 공부를 보여주었다.
‘손수건을 들고 있음’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혜암은 때가 벗겨진, 그래서 맑아진 자신의 마음을 내보였을 것이다.
그것을 만공만이 알아챘을 것이다.
서산 간월암 목조보살좌상
2007년 9월 20일 충청남도 유형 문화재 제184호로 지정된 서산 간월암 목조보살좌상은
나무와 종이로 틀을 제작한 뒤 금칠을 입힌 불상으로 관음전에 안치되어 있다.
양식적으로 볼 때 1600년 전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갸름한 타원형의 얼굴에 높이 솟은 보계, 부
드러운 옷 주름 등에서 형식화하기 시작하는 임진왜란 이후의 보살상과 차별성이 있다.
간월암이 유명해진 것은 1942년 8월부터 1945년 8월까지 만공스님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천일기도를 했고 천일기도 회향 사흘 후 조국이 독립을 맞이했다는 사실이다.
。
만공스님이 중창 불사를 한 후 간월암은 벽초, 서해, 진암스님의 발길이 닿았었고
경봉, 춘성, 효봉, 금오, 성철스님등 기라성 같은 도인들이 간월암에 수행의 족적(足跡)을 남겼다.
불조불우객(佛祖不友客) 부처와 조사를 더불어 벗하지 않는 객이
하사벽파친(何事壁波親) 무슨 일로 푸른 물결과는 친했는고
아본반도인(我本半島人) 내 본래 반도 사람이라
자연여시지(自然如是止) 자연에 이와 같이 멈추노라.
- 만공 -
만공의 뱃길을 따라서 성철은 1942년 봄 간월암에 들었다.
그것은 자신을 크게 가두는 일이었다.
작은 암자를 세상으로 알고 1년 동안 정진했다.
경허가 천장암에 숨어든 것처럼 외딴 섬에 자신을 부렸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외딴 사람이 되고자 했다.
따지고 보면 가장 낮고 낮은 곳이 바다였다.
자신을 낮추고 낮춰 종래는 낮춘다는 생각 자체도 들지 않을 때 비로소 바다가 되는 것이었다.
。
‘공부인은 세상에서 아무 쓸 곳이 없는 대낙오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오직 영원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희생해버리고, 세상을 아주 등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에게나 버림받은 사람, 어느 곳에서나 멸시당하는 사람,
살아나가는 길이란 공부 길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훗날 후학들에게 이른 것처럼 성철은 자신을 낮추고 스스로를 낙오자로 만들었다.
달이 지면 해가 뜨고, 해가 지면 달이 떴으니 그 빛에 아만을 사르고 살랐다.
바다를 보다가 바다가 되고, 달빛을 보다가 달빛이 되고,
성철은 마침내 손가락 너머의 달을 보았을 것이다.
간월암 낙조
작가 최인호는 간월암의 달빛 풍경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해는 이미 바다 밑으로 떨어진 지 오래이고,
하늘 위에 붉게 각혈하여 물들인 핏빛 노을도
어둠의 반점으로 점점 먹혀 들어가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어둠이 짙어져 갈수록 달빛이 상대적으로 위세를 떨치기 시작하였으며
밤하늘은 맑아 구름 한 점 없는 별밭이었다.
거의 보름달에 가까운 달은 밤이 깊어갈수록 힘껏 눌러 찍었으나
한쪽 부분이 힘이 고르게 가해지지 않아
불완전하게 찍힌 목도장 자국처럼 밤하늘 위에 새겨져 있었다.
만월 때가 되면 자연 밀물의 기세도 절정에 이르는 것일까.
한껏 차올랐던 파도는 입맛 다시는 소리를 내면서 조금씩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었다.’
‘길 없는 길’에서
。
간월암에서 바라보는 낙조는 바다 위 갈매기가 어우러져 한폭의 그림이 된다.
보는 이로 하여금 수채화의 주인공이 되는 동시에
숙연함과 설레임을 함께 느끼게 하니 이런 곳이 또 있을까 싶다.
[자료제공. 간월암 홈페이지, 성철 큰스님 평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