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까닭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때 몇 가지 관계를 가집니다.
첫째, 본능적이고 자연적인 관계를 가집니다. 동물은 본능적으로 새끼를 보호하고 젖을 먹이면서 사랑을 합니다. 젊은 남녀는 만남을 통해 자연적으로 서로 끌리게 되고 사랑의 불길을 당기기 시작합니다. 그런 사랑은 누가 시켜서 되는 게 아니라 본능적이고 동시에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둘째, 의무적이고 쌍방적인 관계를 가집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도 나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배신하기 때문에 나도 너를 배신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식 사랑입니다. 어찌 보면 매우 그럴 듯하고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두 사람이 견원지간인데,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죄성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손뼉도 마주 쳐야 소리가 나듯이, 사랑은 서로 주고받을 때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는 만큼 받고, 받는 만큼 주는 게 우리가 경험하는 사랑인 것 같습니다.
1) 의지를 갖고 택한 사랑
셋째, 일방적이고 의지적인 관계를 가집니다. 상대방의 반응, 조건, 환경에 상관없이 마냥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처럼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그냥 사랑한다고 대답합니다. 무엇이 그리 좋아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무조건 좋아 사랑한다고 대답합니다. 모든 사람은 그런 사랑을 받기 원합니다. 일본에서 유행한 한국 드라마 <겨울 연가>가 그런 사랑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남녀 주인공이 의지를 갖고 서로 사랑하기로 결정했는가 봅니다. 우리는 인간의 의지적 결정을 가리켜 ‘선택(選擇)’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본능과 의무를 넘어서 의지가 필요합니다. 청춘 남녀가 만나 서로 사랑하다가 결혼하는 것이 일반입니다. 그것은 두 남녀가 인생을 해로하면서 성공하든 실패하든, 얼굴에 화상이라도 입어 평생 핸디캡을 안고 살게 되더라도 서로 사랑하기로 선택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15,16)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과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대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추측해서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16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지극히 선택적이고 의지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과 전혀 다른 네 가지 형태의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
2) 네 가지 형태의 예수님 사랑
첫째,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택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그분이 다가오면 멀리 도망을 간 적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강력한 구애에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과오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사랑에 대해 본능적이고 의지적인 차원에서 좀 더 발전하며 자신이 그 사랑의 주체라고 착각합니다. 본인은 상대방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줄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 실패하는 원인은 본인이 스스로 상대방을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다 나이가 들고 실패를 경험하면서 인간의 본질에 대해 이해하고 자신이 사랑의 주체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또 자신을 불쌍하게 여긴 누군가가 도움을 준다는 것도 가식의 일종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둘째,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뽑으신 것은 사랑입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만한 능력이나 조건이 없었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뽑으시고 사랑해 주신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핏줄이라는 조건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무 조건도 없이 우리를 뽑으셔서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항거하지 못하고 무릎 꿇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분의 선택적 사랑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님의 감동이 있고 은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알기 전에는 하느님께 원성을 많이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크신 은총을 경험하면서 그 많던 할 말을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주님, 병든 자들과 가난한 자들 속으로 들어가 제 인생의 작은 부분이라도 주님께 드리고 싶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셋째, 예수님의 사랑은 풍성한 열매를 주십니다. 사랑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사랑은 아닙니다. 인간은 세기적인 사랑이라며 떠들어대지만, 그 사랑의 마지막은 서로 죽고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을 일삼아 파멸시키고 서로 비참해지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이란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축복을 만들고 축복은 행복을 만듭니다. 사랑은 파괴가 아니고 복수도 아닙니다. 절망, 좌절, 포기는 더욱 아닙니다. 사랑은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리고 기대하는 희망입니다. 사랑은 죽어서도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하게 맺도록 합니다. 사랑을 모르고 있는 사람에게 사랑을 가르쳐 줘서 폐쇄적이고 부정적이며 비판적이고 파괴적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사랑의 능력입니다.
그런 사랑의 힘은 20여 명 노인과 여인을 무참하게 살해한 유영철도 얼마든지 녹일 수 있습니다. 그는 법정에서 100명을 죽이고 싶었다면서 20여 명을 죽인 것은 그 시작에 불과하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는 자라온 과정에서 사랑을 받지 못해 깊은 상처를 입고 인격이 파괴된 사람입니다. 하지만 짐승보다 못한 그런 사람마저 녹일 수 있는 것도 사랑입니다.
넷째, 사랑은 기적을 만듭니다. 우리 서로 사랑해 봅시다! 자신한테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미움, 분노, 증오의 벽을 넘어서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정치 세계에도 정적이 있고 사업에도 경쟁자가 있듯이, 우리가 살면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원수를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원수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 기적입니다.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은총이요, 응답받을 때 더욱 큰 은총이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가 그분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청하면 모두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것을 빼앗아 가지 않습니다. 사랑은 어찌 보면 착취인지도 모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의 시간, 열정, 돈을 빼앗고 노예로 만들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모든 것을 주면서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15,17)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아무 조건 없이 일방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적을 베푸시고 많은 열매를 맺게 하는 복을 주신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받아봐야 남에게 사랑을 줄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남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용서받지 못한 사람은 결코 남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
"사랑은 기적을 만듭니다. "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15,17)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