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막 9:9)
기독교인이 신앙생활의 과정에서 얻은 특별한 종교적 체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간증이라고 한다.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간섭 아래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는 삶이 아닌 것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런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것은 사실 간증으로서의 의미가 없다. 타인에게는 없는 나만의 특별한 체험에 가치를 두기 때문이다.
사업이 부도날 위기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기도에 힘쓰며 더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했더니 부도의 위기를 넘어서 크게 성공하는 복을 주시더라는 극적인 체험이 간증의 가치가 있다. 몸에 병이 있어서 힘들었는데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믿음의 길로 갔더니 병을 낫게 하시더라는 이야기가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간증 거리가 있다는 것은 남들에게 없는 특별한 신앙 체험이 있는 것으로 인정되면서 믿음 또한 칭찬받게 된다. 이런 이유로 기독교인은 간증 거리가 되는 극적인 체험까지는 아니더라도 믿음의 증거가 될만한 체험을 원한다. 이것이 일반적인 신앙 형태다.
이런 우리가 베드로처럼 광채 나는 하얀 옷을 입은 예수님과 함께 엘리야, 모세의 모습을 목격한 체험을 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 경험이 평생의 신앙 내용으로 굳어진 상태에서 간증 거리로 작용할 것이 뻔하다. 믿음이 이러한 형태로 유지되는 가운데서는 죄를 깨닫고 ‘날마다 죽노라’라는 고백으로 이어지는 십자가 체험은 관심을 끌지 못한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체험에 가치를 두는 우리에게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은 의문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천국을 부정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변화산 이야기는 천국의 실재를 증거할 좋은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개인적으로도 자신의 믿음을 과시할 좋은 기회다. 열두 제자들 가운데 자신들만 데리고 산으로 가셔서 특별한 체험을 하게 하신 것으로 예수님과의 관계를 과시할 수 있다. 다른 제자들에 비해 우월한 제자로 존재감을 격상시킬 만한 놀랍고 특별한 체험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라는 함구령을 내리심으로 차단해 버린다.
예수님은 무슨 이유로 함구령을 내리신 것인가? 혹여 이들이 자기가 본 것을 자랑함으로 인해 다른 제자들과 다툼이 일어나고, ‘왜 이들만 데리고 산으로 가셨습니까?’라는 항의받을 것을 염려하셨기 때문인가? 아니면 보고 체험한 것을 간증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인가? 그럴 바에야 세 제자에게 왜 그런 체험을 하게 하시는지 예수님의 의도를 알기가 쉽지 않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세 제자처럼 신기한 일을 보고 체험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변화산에 갔던 제자나 산 아래 있던 제자는 차이가 없다. 이것은 예수님의 영광된 모습을 본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일에서 확실히 드러난다.
따라서 자기만의 특별한 체험을 하고 간증 거리가 쌓인다 해도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여전히 죄로 인해 저주받을 자일 뿐이다. 그런데 믿음이 있고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체험을 주신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제자들과 다르지 않은 우리의 착각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르지 말라는 말씀에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라는 조건을 두신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는 변화산 체험을 이야기해도 좋다는 뜻인가? 의문이 되는 것은 왜 십자가 부활 전에는 안되고 부활 후여야 하느냐는 것이다.
벧후 1장에서 베드로가 변화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예수님의 영광된 모습과 그때의 장면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들은 소리를 말하는 것이 전부다(벧후 1:17). 놀라운 광경을 보고 체험한 자신이 아니라 하늘의 소리를 전하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산에서 내려오는 제자들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라는 말의 의미를 몰랐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십자가 사건을 알지 못한 제자였다. 이처럼 십자가를 모른 상태에서 자신들이 보고 체험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한다면 분명 ‘나는 영광된 예수님의 모습과 엘리야 모세를 봤다’라며 자신을 특별한 제자로 간주하고 이야기하게 된다. 이것이 자기중심의 인간이다.
그래서 교회에서 하는 간증은 자기중심에 있는 인간이 자기를 높이고 우상화하는 작태로 행해지는 자기 이야기일 뿐이다. 그렇게 교회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훼방하고 가리는 마귀의 놀이터로 전락 된다.
자신은 결코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했음에도 주를 부인한 베드로는 주를 따르겠다는 자기 포부가 허망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또한 변화산에서의 체험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도 실감했을 것이다. 이것은 벧후 1:1절에서 성도를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자로 말하는 것에서 드러난다. 성도는 인간의 뜻과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뜻으로 된다는 것이다.
벧후 1:10절에서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라는 말도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존재함을 강조한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를 믿는 자신이 아니라 나 같은 자를 부르시고 택하셔서 행하시는 주의 일이 중심이 된다. 이것이 십자가를 알기 전과 후의 인간이다. 믿음을 자기중심으로 알던 상태에서 자신의 헛됨과 무능을 깨닫고 십자가에서 이루신 주의 일만 전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모든 이야기의 중점을 인간, 자기 자신에게 두는 것으로 드러난다. 예수, 십자가라는 단어가 빠짐없이 등장한다 해도 그 또한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활용하는 도구일 뿐이다.
베드로가 십자가를 알기 전에는 ‘내가 하늘의 소리를 들었다’라고 말하겠지만 십자가를 안 후에는 ‘이것이 하늘의 소리다’라고 말한다. 자신이 하늘의 소리를 들었다 해도 여전히 주를 부인할 자임을 안 것이다. 십자가 중심은 나 자신에게 그 어떤 의미와 가치를 두지 않는 것이다.
-신윤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