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이란 무엇인가-입법과 사법에 대하여 그 정당성을 생각하며
과연 어떤 입법을 하는 것이 입법부의 귀한 역할을 맡은 국회의원들의 본분일까? 악법도 법이라고 했지만 과연 무한정 악법을 만들어도 정당하다고 할 것인가?
과연 어떤 판결을 하는 것이 사법부의 귀한 역할을 맡은 재판관들의 본분일까? 헌법과 법률이 보여준 명확한 법 정신을 떠나서 자기의 신념이나 심지어 이익을 따라 재판해도 그것을 용납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이 다른 사람들과 사회와 국가에 큰 해를 끼침에도 불구하고 그런 판결을 존중해야 할 것인가?
최근 몇 년 동안에 미국과 우리나라의 입법부와 사법부를 바라보면서 착잡한 마음과 불쾌한(?) 마음을 다스리기가 어렵다. 형식만 갖추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예수님을 재판할 때도, 스데반을 재판할 때도 마치 법을 따라서 하는 것처럼 했지만 더 크게 불법을 계속하면서 사람들과 자신을 속인 것이 아니던가?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탐냈을 때 그의 아내 이세벨이 어찌하였던가를 생각할 때가 많다.
그의 아내 이세벨이 그에게 이르되 왕이 지금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일어나 식사를 하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께 드리리이다 하고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들을 쓰고 그 인을 치고 봉하여 그의 성읍에서 나봇과 함께 사는 장로와 귀족들에게 보내니 그 편지 사연에 이르기를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에 높이 앉힌 후에 불량자 두 사람을 그의 앞에 마주 앉히고 그에게 대하여 증거하기를 네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게 하고 곧 그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이라 하였더라 그의 성읍 사람 곧 그의 성읍에 사는 장로와 귀족들이 이세벨의 지시 곧 그가 자기들에게 보낸 편지에 쓴 대로 하여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히매 때에 불량자 두 사람이 들어와 그의 앞에 앉고 백성 앞에서 나봇에게 대하여 증언을 하여 이르기를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매 무리가 그를 성읍 밖으로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이고 이세벨에게 통보하기를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나이다 하니 이세벨이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다 함을 듣고 이세벨이 아합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돈으로 바꾸어 주기를 싫어하던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소서 나봇이 살아 있지 아니하고 죽었나이다 아합은 나봇이 죽었다 함을 듣고 곧 일어나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그리로 내려갔더라(왕상 21:7-16)
요즘 세계 여러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모양만 다를 뿐 그 성격은 동일한 상황이다. 국가의 중요한 기관들-미국은 FBI나 CIA 그리고 경찰과 행정부나 사법부, 한국은 입법 행정 사법 3부와 검찰이나 경찰과 국정원 그리고 언론 등-이 실제 배후 세력이 되어 있고, 그들의 지시를 따라 행동하는 ‘그의 성읍에 사는 장로와 귀족들’과 증인의 수를 충족시키는 ‘불량자 두 사람’이 함께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무죄한 나봇을 죽이는 일들이 계속되고 있다. 겉으로 보면 분명히 합법적이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불법에 불법에 불법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 드러난다. 무엇을 위함인가? 자기는 왕이라서 이미 가진 것이 많지만, 나봇이 가진 포도원을 탐내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저질러지는 대부분의 범죄는 이미 많이 가진 자들이 저지르고 있다. 믿음이 좋았던 다윗조차도 이미 아내가 많았건만 밧세바를 불러 간음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죽이는 죄를 지었다. 하나님께서 꾸짖는 말씀-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은 다윗을 비롯한 모든 죄인들의 죄악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삼하 12:7-9)
법에 대해 생각하면서 최근에 읽은 글이 크게 울림을 준다. 좀 길지만 옮겨 적어 본다. “기존의 자연법과 ‘자기보다 위에 있는’ 도덕법을 반영하여 각 상황에 맞는 법을 제시할 뿐입니다.”라는 말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리고 이것이 다윗에게 주신 말씀의 핵심과 일치하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법이란 무엇인가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변론을 지켜보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법’에 대해 바른 인식을 견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명한 성경신학자이자 조직신학자인 웨인 그루뎀(Wayne Grudem) 교수의 <성경과 정치>를 보면 한 장 전체를 할애해 성경에 따른 사법부와 재판관의 마땅한 역할을 제시합니다. (5장 법원과 국가의 최종 권력) 그루뎀 교수는 고대 이스라엘 정부의 모든 관리는 자기 바깥에 있는, 자기들보다 위에 있는 법을 따라야 했음을 밝히면서,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자유문명 정부체제도 그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근본 원리와 원칙이 모두 성경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루뎀은 성경이 말하는 재판관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재판관의 본질적 역할은 자신 바깥에 있는 (상위)법에 따라 판결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재판관은 임의로 재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바깥에 있는 특정한 법에 따라 재판해야 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제사장의 재판관 역할을 말씀하실 때 이렇게 강조하셨다. “송사하는 일을 재판하되 내 규례대로 재판할 것이며(겔 44:24).”
하나님께서 주신 “규례”는 재판관이 분쟁을 판결하는 기준을 제공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법이나 규정을 만들어서는 안 되었고, 자신의 생각이나 뜻 밖에 있는 이미 확정되고 알려진 하나님의 율법에 비추어 피고인의 행위를 평가해야 했다.
신약에서도 바울이 산헤드린 앞에서 재판을 받았을 때, 이 유대인 공의회 의원 중 한 사람은 바울이 한 말 때문에 그의 입을 치라고 명령했다. 이에 바울은 이렇게 대답했다.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행 23:3)”
바울은 공의회 바깥(상위)의 기준, 즉 확립되고 공인된 법에 따라 재판받을 것을 호소했다. 재판관보다 위에 있는 법에 따라 재판하는 이 원칙은 이방 나라의 왕인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도 인정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는 에스라와 다른 사람들을 예루살렘으로 보낼 때 조서를 내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에스라여 너는 네 손에 있는 네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네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를 법관과 재판관을 삼아 강 건너편 모든 백성을 재판하게 하고 그중 알지 못하는 자는 너희가 가르치라 무릇 네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을 준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속히 그 죄를 정하여 혹 죽이거나 귀양 보내거나 가산을 몰수하거나 옥에 가둘지니라(스 7:25-26)”
여기서 백성을 올바르게 재판하기 위해서는 재판관이 하나님의 율법을 알아야 했다. 이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에스라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했다. 다시 말하자면, 재판관은 자신 바깥의 법, 즉 하나님께서 주신 법에 따라 재판해야 했다.
법은 사법부나 헌법재판소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입법부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입법부는 오직 기존의 자연법과 ‘자기보다 위에 있는’ 도덕법을 반영하여 각 상황에 맞는 법을 제시할 뿐입니다. 여기서 교회와 성도의 역할이 드러납니다. 재판관이 올바르게 재판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신 법을 교회와 성도를 통해 알아야 합니다. 이번 탄핵정국을 맞아 결국 책임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음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됩니다.
조평세, “대한민국의 기적은 계속될 것인가” 『월드뷰(2025 February) 제도와 경제발전』,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