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 없는 여행

[경수]

시작.



대책 없는 여행에서는 `먼저 부탁을 할 수 없는 규칙`이 있다. 그렇다면 거절도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고 출발했다.

걷기 시작했다. 너무 기대해서 그런지 머릿속에서 행복 회로가 돌아가면서 너무 신이 났다.

걷다 보니 코까지 덮으려고 하는 앞머리가 계속 앞을 가렸다. 마침 선생님이 앞은 보고 가라 하셔서 머리카락부터 자르기로 했다. 산양 대교가 보이기 직전 지나가던 차가 내 앞에 멈췄다. 설렜다. 차 쪽으로 걸어가자 운전자가 창문을 내리며 삼무곡 학생이냐고 물어보셨다. 맞다 하자 호산 쪽으로 가는 거면 태워 주신다고 하셨다. 거부하지 않고 감사 인사를 하며 차에 탔다. 차를 얻어타고 호산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고 감사 인사를 두 번을 하며 `아직 살만한 세상이야.`라고 생각했다. 항상 머리카락을 자르러 가던 오미자 미용실로 향했다. 매번 미자 컷이라고 욕하면서도 `여기만 한곳이 없지.` 하며 5년 동안 왔던 미용실이다.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 생각하자 아쉬웠다. 앞을 가리고 있던 머리카락을 자르며 이번에 졸업해서 마지막으로 와본다고 지금까지 감사했다고 했다. 오미자 아주머니는 지금까지 와주셔서 감사하다고 하셨다.
다시 기분 좋게 출발했다.

`근데 어디로 갈까요?`라고 묻으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부산까지 연결돼있는 자전거 길이 보였다. 그 길이 보인 순간

"가자"

그 길을 따라 걸었다. 가자는 말만 생각하면서 한 번도 쉬지 않고 가다 보니 부구에 도착했다. 날은 어두워져 있었고 배가 너무 고팠다. 여러 음식점이 눈에 들어왔지만 앞에 있는 의자로 가서 쉬라고 하셨다. 가방을 내려놓고 물을 마시자

"가자"

다시 가방을 메고 출발했다. 조금 걷다 보니 추워져서 여공이 주신 빨간색 패딩을 입었다. 불빛이 환하게 있는 부구를 등지고 어두운 도로를 따라 걸어갔다. 옆에서 차들이 빠르게 지나갈 때마다 바람이 강하게 불어 등골이 오싹해졌다. 정면에서 차가 올 때마다 라이트가 눈부셔서 잠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배도 고파오고 다리도 아파지면서 점차 지쳐가자 누가 차 좀 태워 줬으면 하고 생각하면서 `쌩~` 하고 지나가는 차의 뒷모습만 봤다. 걷다 보니 머리가 멍해지면서 `누가 태워줬으면 좋겠다.` 하는 바람도 없어졌을 때 차 한 대가 내 앞에 멈췄다. 또 설렜다. 차로 다가가자 창문을 내리고 한 아주머니가 어디 가냐고 물으셨다. 길을 쭉 걷고 있다고 하자 밤에는 밝은 옷을 입어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그냥 가셨다. 허무했다. 기대를 해버렸다. 말을 걸어 주신 것도 감사한 일인데 바라는 게 있는 날 허무하게 만들었다. 다시 체념하고 걸었다.

"먹어라."

앞을 보니 편의점이 있었다. 바로 편의점에 들어가 인사를 하고 도시락 하나를 사서 자리에 앉았다. 편의점 아주머니가 혼자 여행 중이냐고 물으셔서 그렇다고 말했다. 편의점 아주머니는 대단하다고 조심해서 다니라 하시면서 그 패딩 되게 유명한 거라고 하셨다. 패딩을 한번 쓰다듬고 밥을 먹었다. 배를 채우고 편의점에서 나와 다시 걸어갔다.

"잘 곳을 찾아봐라."

조금 더 가보니 국립 해양과학관이 있었다. 국립 해양과학관 앞에 있는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가로등이 눈부셔 마스크를 안대처럼 끼고 침낭에 들어가 누워 춥다는 생각이 들기 전에 잠들었다.



즐기자.



발걸음 소리에 잠에서 깼다. 마스크를 벗어보니 아침 조깅을 하는 한 남자분이 있으셨다.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펴보니 세상이 환했다. 침낭을 정리하고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가자 해가 바다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잠시 해를 보다가 다시 자전거 길을 따라 걸었다.

가다 보니 죽변항 이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항상 마을에 들어오면 자전거 길이라고 표시돼있는 바닥에 파란 줄이 끊어진다. 마을 안에는 자전거길 표지판도 없어서 직진만 하고 있을 때 삼거리가 나왔다. 멈추고 물었다. 어디로 갈까요?

"네가 선택해라"

나는 바로 오른쪽 길로 갔다. 내가 선택한 쪽으로 가고 있으면서도 걱정이 됐다. `혹시나 이쪽이 아니면 어쩌지? 다시 돌아가면 되긴 하지만 흠...` 주위를 둘러보면서 가고 있었다.

"내 선택을 의심하지 말라"

`맞아. 내 선택을 내가 못 믿으면 누가 믿어.` 앞만 보고 걸어갔다. 조금 가다 보니 바닥에 파란 줄이 보였다. 기쁘지도 않았다. 당연하게 이 길이라 믿었다. 내 선택에 의심하지 않고 걸으니 이 길이 틀릴 수가 없었다. 걸으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를 잘하라고 하셔서 마주치는 사람이 있으면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어르신들한테 인사를 하면 웃으시면서 인사받아주셨다. 할머니 세 분이 이야기하고 계셨다. 지나가면서 인사를 하자 할머니 세 분 중 한 분이 `봐 요즘 젊은이들은 인사한다니까` 하시고 다른 한 분이 어디 가냐고 물어보셔서 여행 중이라고 했다. 밥은 먹었냐고 물어보셔서 아직 안 먹었다고 하자 `아이고 내가 차려주고 싶지만 그럴 수가 읎네` 라고 하시고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집중하고 들었지만, 할머니의 사투리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웃으면서 `감사합니다.` 만 하다 할머니의 말이 끝나신 것 같아서 인사를 하고 가던 길을 다시 갔다. 또다시 길이 나누어지는 곳에 왔다. 한쪽은 7번 국도 자전거 길이 있는 길, 다른 길은 36번 국도. 가방을 내려놓고 물어봤다. 대답은

"처음 가자고 한 곳으로 가자"

처음 가자고 한 곳? 사실 여행을 시작하기 전부터 집까지 가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집 쪽으로 가는 길은 36번 국도였다. 살짝 겁이 났다. 7번 국도를 따라가면 자전거 길이 있어서 가다 보면 마을도 많아 안전한 길이었고, 집 쪽으로 가는 36번 국도는 1차선으로 되어있는 자동차 전용 도로였다. 가방을 메고 일어나서 36번 국도로 갔다. 마음속으로 `처음 선택한 곳으로 가야지. 이런 길로 가면 사람들이 차도 잘 태워 주실 거야.` 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면서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걸어도 태워주는 차는 없었다. 처음에는 걸을만했다. 다리를 만나기 전까지는.

다리를 건너기 전에 작은 표지판 하나가 있었는데 다리 길이가 500m 정도 된다고 알려줬다. 뒤로 돌아갈 생각은 1도 없어서 일단 앞만 보고 가기 시작했다. 살짝 다리 아래쪽을 봤는데 공사 현장에 굴착기 한 대가 보였다. 다리가 너무 높아서 굴착기가 속눈썹보다 작게 보였다. 무섭지만 궁금해서 침을 뱉어봤다. 바닥까지 떨어지는 건 볼 수가 없었다. 바로 옆에서 자동차가 지나가면 바람이 강하게 불면서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땅만 보며 걸어가는데 벽 쪽으로 붙으면 아래가 보여서 무섭고 반대쪽은 빠르게 달리는 자동차가 있어서 겁이 났다. 장시간 걸으니 다리가 떨렸지만, 고통은 없었다. 무서우면 아픈 곳도 잘 안 느껴져서 빠른 걸음으로 다리를 건너갔다. 다 건너자 큰 것 하나를 해낸 것처럼 기분이 좋아지면서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겼다. 걷다가 다리와 또 마주쳤다. 아까 생겼던 용기가 사라져 버렸다. 이번에는 아까 다리보다 짧긴 했지만 높은 건 그대로였다. 멈추지 않고 걷고 있는데 다리 아래쪽에서 자꾸 끌어당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옆에 차가 지나갈 때마다 부는 바람에 날아가서 떨어질 것 같았다. 그냥 떨어지면 다 편해지지 않을까, 여기서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하는 겁먹은 생각을 하면서 가다 보니 다리를 다 건너왔다. 한숨 돌리고 다시 걷다 보니 다리가 너무 아프고 배도 고 파왔다. 모든 게 힘들다고 느껴졌을 때

"즐겨라."

배가 고프면 배고파서 힘들고 다리가 아프면 다리가 아파서 힘들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서 `이럴 때아니면 언제 이런 걸 느껴봐. 다리가 아파보지 않고는 아프지 않은 걸 알 수 없고 배가 고파봐야지 배가 부르다는 걸 알 수 있는데.` 배고프고 다리가 아파서 힘들다고 생각하면 나만 손해였다. 고통은 힘들어라고 생각하면 아팠고 그냥 즐기면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다시 다리를 만났다. 이번엔 높은 곳이 무섭지 않고 다리 아래에서 끌어당기는 느낌도 안 들었다. 허리를 쭉 펴고 당당하게 걸어갔다. 하지만 바로 옆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차는 아직 무서웠다. 더 가다 보니 긴 터널도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차를 타고 긴 터널을 지나가면 창밖을 보며 걸어서 가보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는데 진짜로 해본다니 기대하면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시원한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처음에는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걷다가 시원한 곳으로 들어오니 도로 위의 오아시스 같았다. 큰 차들이 터널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나갈 때까지 귀가 터질듯한 굉음을 내면서 바로 옆에 지나갈 때는 강한 바람에 눈을 뜰 수도 없었다. 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해보고 싶은 것을 해보니 쾌변을 한 듯 기분이 좋았다. 걷다가 도로 표지판에 봉화가 적혀있었고 그 옆에 몇 킬로가 남았는지도 적혀있었다. 한참을 걸었다고 생각하고 다시 위에 표지판을 찾아보면 남은 거리는 줄어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언젠간 가겠지.` 하는 마음으로 쉬어 갈 때도 앉지 않고 아주 천천히 걷던가 옆에 기대어 쉬면서 갔다. 마음속으로 `가자!` 소리를 내면서 가던 중 멀리서 여자아이가 놀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가보니 도로 옆에 천막이 있고 빨간 자동차와 여자아이의 아버지로 보이는 분이 쉬고 계셨다. 인사를 하자 어디를 가냐고 물으셔서 봉화에 가고 있다고 했다. 그분은 봉화까지 가려면 한참 가야 하고 지금이 송이 철이라 가방 메고 돌아다니면 송이를 채취하는 사람인 줄 알고 아무도 안 태워 줄 거라고 하셨다. 절망스러웠다. 10분 정도 가다 보면 먹을 것을 파는 곳이 나온다고 거기서 뭐라도 먹고 가라고 하셔서 희망을 품고 다시 걸었다. 10분 가고 또 20분을 가도 먹을 것을 파는 곳은 보이지 않았다. 앞에는 1,000m 미터가 넘는 터널이 있다는 표지판만 보였다. 그래도 시원하게라도 가겠다 하면서 터널에 들어가기 직전 옆에 빨간 차 한 대가 멈춰 있었다. 아까 봤던 여자아이가 창문을 열고 여기로 오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다리가 균형을 못 잡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차를 향해 달려갈 수 있었다. 차에 타라고 하셔서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하며 차에 탔다. 와~ 천국이었다. 앞자리에는 아까 보지 못했던 남자아이도 함께 있었다. 여자아이는 쑥스러운지 창문에 달라붙어서 얼굴을 안 보여주고 있었다. 차를 타고 가니 걸을 때는 한참을 가야지 보이는 표지판이 금방 보였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나왔다. 소천이라는 곳에 내려주시면서 여기서 밥을 먹고 가라고 우리는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하니 여기까지라고 말씀하시고 내려주셨다. 내리면서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해줬다. 나도 손을 흔들면서 인사를 해주고 내려서 고개 숙여 한 번 더 감사 인사를 했다. 무엇을 먹을까요 하고 물었다.

"오늘 가장 먹고 싶은 음식 딱 하나만 먹어라."

짜장면 집을 찾아가고 있는데 철물점 아저씨가 보여 인사를 하자 나를 빤히 보면서 `왜`라고 하셨다. 나는 그냥 인사했다고 하자 한번 쳐다보고 가셨다. 거의 무너져가는 짜장면 집을 찾았다. 그 집이 끌렸다. 들어가서 짜장면 곱빼기 한 그릇을 시키고 손을 씻고 왔다. 짜장면이 나오고 잘 비벼 한입을 먹는 순간 환상 그 이상을 보았다. 짜장면을 즐기고 있을 때 어떤 부부가 들어왔는데 짜장면 집 사장님이랑 친분이 있는 것 같았다. 들어오자마자 추석 잘 지냈냐는 인사를 하는데 방금 들어온 아저씨의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아까 터널 안에 있던 덤프트럭이 온 줄 알았다. 주문할 때도 자신 것을 고르고선 아내분 것을 자신이 이거 먹어라. 아니면 이거 하면서 말이 매우 많았다. 다행히 주문을 마치고 앉으니 그나마 조용해졌다. 음식이 나오자 기도를 하는데 예수님이 가게가 잘 되게 해주시고 대박 나게 해주시고 해달라는 게 어찌나 많은지 어디 적어 온 것처럼 연설을 하고 있었다. 듣다가 혼자 웃었다. 가게 사장님도 기도하는 곳 옆에 손을 모으고선 기도를 들으면서 자꾸 끝난 줄 알고 아멘 아…. 암…. 하면서 있었다. 그리고 목소리 큰 분이 `아멘!` 하고 기도를 끝냈지만, 사장님은 마지막까지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고 뒤늦게 아멘을 외치셨다. 짜장면을 다 먹고 나와서 빈 물병에 물을 담고 출발을 하려 할 때

"이제 걷기만 하지 말고 버스도 타라"

바로 버스 정류장을 찾아봤다. 촌이라 그런지 버스 시간이 운 좋은 사람만 타라는 수준이었다. 마을을 둘러보다가 한 택시 기사님을 만나서 인사를 했다. 기사님이 어디 가냐고 물어보셔서 버스 타고 봉화에 가려고 한다고 하자 봉화 가는 버스는 방금 지나가서 오늘은 없을 거라고 택시 타라고 하셨다. 택시를 타고 봉화 쪽으로 가는데 택시 기사님이 버스 정류장에 전화를 걸어서 봉화 들어가는 버스 몇 시에 있냐고 물어보셨다. 봉화에 들어가는 버스는 4시에 출발한다고 했고 지금 시각은 3시 56분이었다. 그러자 택시 기사님은 봉화까지 태워 줄 수 있는데 그러면 돈이 더 많이 든다고 버스 태워 주시겠다고 하시곤 속도의 한계를 보여주셨다. 내가 걷는 속도와는 차원이 다른 놀이기구를 탄 거 같은 이질감이 드는 속도로 늦지 않고 버스 정류장까지 태워주셨다. 택시비를 내고 인사를 하고는 버스에 탔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일어나 보니 종착역인 봉화에 와있었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어서 잘 곳을 찾으러 갔다. 그러다 봉화군청 앞에 어제 잤던 벤치보다 훨씬 큰 벤치가 눈에 들어왔다. 내 눈에는 5성급 호텔로 보였다. 벤치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있으라고 하셔서 날이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선생님 화장실에 가고 싶습니다.

아무 말도 안 들렸다. 한참을 더 가만히 있다가

"화장실에 가도 좋다"

봉화군청에 들어가서 화장실만 쓰고 나왔다. 처음 왔을 때는 차들이 빼곡하게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자 차들이 다 없어졌다. 어제도 그랬지만 `밖에서 침낭을 덮고 자는 사람이 보이면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 조금은 신경이 쓰인 채로 잠이 들었다.



아빠.



눈이 떠져서 눈을 가리고 있던 마스크를 들춰봤다. 아직 어두운데 가로등도 꺼져있었다. 그렇게 몇 번을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눈을 떠보니 이번에는 환했다. 밤에 상당히 추울 줄 알았는데 여공이 주신 패딩과 연우가 준 커다란 침낭 덕분에 추위가 느껴진 적은 없었다. 침낭을 정리하고 물어봤다.

어디로 갈까요?

"네가 선택해라"

그러면 버스를 타고 대전 갑니다.

"하고 싶은 걸 다 해라"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바로 대전으로 가는 버스는 없었다. 표를 파시는 아저씨는 알아서 알아보고 오라고 하셨다.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휴대전화로 확인할 수도 없었다. 휴대전화는 현곡에게 출발할 때 출발한다고 알리는 것과 자기 전에 오늘 하루를 적어서 보내는 것 외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시간에 있는 안동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안동으로 갔다. 안동으로 가자 운이 좋게 1시간만 기다리면 대전으로 가는 버스가 있었다. 표를 사고 앉아서 코로나 이야기만 하는 뉴스를 보다가 대전으로 가는 버스에 탔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인류의 진화가 뼈저리게 느껴졌다. 대전에 도착해서 집 쪽으로 가는 버스에 탔다.

"아는 길이 나오면 걸어서 가라"

대전 현충원 정류장에서 내렸다. 어렸을 때부터 많이 다녔던 곳이라 익숙한 길이었다. 하지만 그 길을 걸어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10년이 넘게 다녔던 그 길을 차를 타고 가거나 자전거를 타고 와 본 적은 있지만 걸어서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완전히 딴 길 같아서 열심히 구경하면서 갔다. 이번이 아니면 걸어서 와볼 기회가 없을 거니까 걸어서 오지 않을 거니까. 걸어서 대전에서 공주로 넘어가 동학사 쪽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아빠 집으로 향했다. 걸어가는 동안 집 앞까지 가는 버스들이 많이 지나쳐갔다. 아빠 집에 도착하자 아빠가 타고 다니는 오토바이가 없었다. 아직 퇴근할 시간이 되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하는 것 같았다. 하염없이 아빠를 기다리다 해가 저물고 오토바이 한 대가 와서 내 앞에 멈추고는 헬멧을 벗으면서 `너 머시어`라고 했다. `나는 지나가는 나그네요.`라고 하자 웃으면서 네가 왜 여기 있냐고 놀라면서 오토바이를 정리했다. 여행 중이라는 걸 설명하자 `진짜 대책이 없구나`라고 하시고 밥은 먹었냐고 물어봤다. 밥도 안 먹고 씻지도 못했다고 하자 일단 씻고 밥을 먹자고 하셨다. 씻고 나오자 통 큰 아버지가 소고기를 사주셨다. 밥을 먹으면서 아빠가 부탁 하나를 했다. 이번 추석에 할아버지 혼자 사시는 집에 아빠만 가고 아무도 안 와서 할아버지가 손자들 이야기 많이 하시고 쓸쓸해 하셨다고 했다. 여행 마지막에 할아버지께 전화 한 번만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내가 휴대전화를 바꾸면서 할아버지 전화번호가 없어져서 전화를 못 했다고 하자 아빠가 이따가 알려준다고 했다. 그날은 아빠 집에서 잠을 잤다.



여유.



일어나 보니 아빠는 일찍 출근하고 없었다. 아빠가 하루 더 있고 싶으면 있으라고 했는데 나는 가겠다고 했다.

천안으로 가고 싶다고 하자

"가고 싶은 곳 다 가라"

짐을 챙겨 나와 버스를 타고 연락 없이 천안으로 갔다. 도착해서 집에 들어가 보니 아무도 없었다. 가방을 내려두고 누워서 뒹굴 거리고 있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할머니였다. 인사를 하자 할머니는 별로 안 놀라신 것 같았다. `오 경수 어쩐 일이야.`라고 하셔서 여행 중이라고 하자 밥 안 먹었으면 앉으라고 하시고 바로 밥을 차려주셨다. 밥을 먹고 있는데 사촌 형이 왔다. 같이 밥을 먹으면서 뭔 여행하냐고 물어봐서 지금까지 있던 일들을 얘기했다. 이야기를 듣고 사촌 형이 너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고 대단하다고 했다. 옆에 있던 할머니는 학교가 뭐 그러냐고 하셨고 재미는 있다고 하자, 그럼 됐다고 했다. 밥을 거의 다 먹었을 때 엄마가 왔다. 엄마와도 여행 이야기를 했다. 사촌 형은 내 가방을 메고 체중계에 올라가서 무게를 재고 가방을 내려두고 다시 무게를 재보고는 가방이 8킬로 정도 된다고 했다. 그날은 천안에서 하루를 보냈다.



약속.



아침에 일어나니 할머니가 밥은 먹고 가라고 하셨다. 씻고 밥을 먹은 다음 출발하려 하는데 아빠가 부탁한 것이 생각났다. 할아버지께 전화를 해보려고 했는데 아빠에게 전화번호를 받는 것을 까먹고 와서 할아버지께 전화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할아버지 번호를 얻으러 할아버지 집에 가기로 했다. 할아버지 집에 간다고 하자 할머니가 할아버지 좋아하는 거라도 사서 가라고 돈을 주셨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면서 천안의 명물 호두과자를 사서 할아버지가 계신 서천으로 갔다. 서천에 가는 버스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한참을 돌아가는 버스를 타야만 했다. 4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서천에 도착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할아버지 집까지 걸어가는 길만 알았다. 그래서 한 손에는 할아버지를 위한 호두과자를 들고 걸어서 찾아갔다. 날이 어두워지기 직전에 도착해서 초록색 녹슨 대문을 두드렸다. 귀가 안 좋으신 할아버지는 듣지 못하신 것 같았다. 전화할 수도 없어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는데 마침 길가에 작은할아버지가 지나가고 계시다가 나를 발견하셨다. 처음에는 멀리서 누구냐고 하셔서 경수라고 하니 `엥 얼라` 하시며 달려오셨다. 작은할아버지가 할아버지께 전화해 주셨다. 할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 오셔서 문을 열어주셨다. 인사를 하고 들어가 호두과자를 드리자 밥 먹어야지 하시면서 혼자서 왔냐고 물어보셨다. 혼자 왔다고 하자 어쩐 일로 왔냐고 물어보셔서 할아버지 보러 왔다고 하자 웃으셨다. 차갑게 식고 반쯤 남은 생선과 낙지 젓갈을 꺼내 주시고 싱크대에서 설거지 안 한 그릇 사이에서 수저만 꺼내어 씻어서 주셨다. 그때 탁자 아래 검은 봉투 속에 있는 신라면이 눈에 들어왔다. 할아버지는 불편하신 몸을 이끌며 자꾸 챙겨 주시려고 하셨다. 들어가서 쉬시라고 알아서 먹겠다고 하자 그러라고 하시고는 방으로 들어가셨다. 나는 머리에 닿을 정도로 가라앉아있는 천장을 한 번 보고 라면 두 개를 꺼내서 끓여 먹었다. 정리를 다 하고 할아버지 옆에 앉아 호두과자를 할아버지 하나 드리고 나는 세 개를 먹고 잘 준비를 했다. 이불이 있는 장롱을 열자 곰팡내와 엄청난 먼지가 나와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래도 가장 위에 있는 멀쩡한 이불 하나를 고르고 베개를 찾으려고 하는데 곰팡이가 없는 베개를 찾을 수가 없어서 이불만 가지고 돌아와서 잠을 잤다.



집.



할아버지께서 워낙 일찍 일어나셔서 나도 일찍 잠에서 깼다. 할아버지께서 밥을 드시려고 준비하시면서 나에게도 밥 먹으라고 하시며 차가운 생선과 낙지 젓갈을 꺼내셨다. 나는 호두과자를 먹겠다고 하고 할아버지 밥 드시는 곳 옆에 앉아서 호두과자 두 개를 먹었다. 할아버지가 밥을 다 드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정리를 하고 다시 출발할 준비를 했다. 한 번 안아 드리고 인사를 했다. 출발하려 하는데 뭐 타고 가냐고 물어보셨다.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서 간다고 하자 택시를 불러주겠다고 하시며 오천 원을 손에 쥐여 주셨다. 잠시 후, 택시가 도착했다. 택시에 타서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택시비가 육천 원이 나와서 천 원을 스승님 보따리에서 더 꺼내어 돈을 내고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이제 하고 싶은 건 다 했다고 하자, 돌아가자고 하셔서 강원도 쪽으로 가는 버스가 있는지 봤는데 없었다. 가장 빨리 탈 수 있는 버스가 천안으로 가는 버스였다. 그 버스를 타서 천안으로 갔고 천안에서 강릉으로 버스를 타고 갔다. 강릉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삼척으로 왔다. 그리고 바다가 보고 싶어서 바닷길을 따라 걸어갔다. 해변으로 가자,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었다. 날은 어두워져 있었고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자고 싶었다. 둘러보다가 작은 무대를 발견해서 침낭을 꺼내 잘 준비를 했다.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시끄럽고 폭죽 소리도 들렸지만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무대 위가 그냥 내 집 같고 편했다. 지나가면서 깜짝 놀라는 사람도 있고 `어! 저기 사람 있어.` 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런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그래요. 나 사람인데요. 어쩌라고요.` 하면서 그냥 잤다.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지 않고 내가 눕는 곳이 어디든 내 집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내가 걸었던 길도 그냥 내 집 앞마당을 걸어온 것 같고 이제는 불편한 게 없었다.



가족.



눈이 떠져 마스크 같은 안대를 들어보자 해가 뜨고 있었다. 바다에서 자고 싶은 것 중 하나가 아침에 뜨는 동해의 일출을 보고 싶어서였다. 벌떡 일어나서 바다 쪽을 봤다. 구름이 가득 있어서 해가 뜨는 건 보이지 않았다. 얼른 짐을 정리하고 바다가 잘 보이는 곳을 찾아서 앉았다. 그리곤 눈을 감고 해가 뜨는 걸 보고 호산으로 향해 걸었다.

이번에도 자동차 전용 도로로 가다 과적 단속을 하는 곳 앞에서 잠시 물을 마시고 있는데 직원으로 보이는 분이 나오시면서 물 좀 더 떠가라고 하셨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한 분이 더 계셨다. 물을 뜨고 있는데 좀 쉬다 가라고 커피도 좀 마시고 있으라고 하셔서 맥심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물어보는 것에 답을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출발하려 하는데 지금까지 어디로 걸어왔냐고 물어보셨다. 자동차 전용 도로로 가다 사고 나면 큰일 난다고 마을 길로 가라고 하셨다. 바로 옆에 마을로 빠지는 길이 있어 그쪽으로 갔다. 마을 길은 자전거 도로가 있는 길이였다. 주말이라 그런지 자전거 여행을 하는 분들이 많아서 지나갈 때 가끔 파이팅을 외치고 가는 분도 있었다. 그러면 기분이 좋고 힘도 났다. 반대쪽에서 단체로 도보여행하는 어른들도 있었는데 엄청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셔서 나도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계속 걷는데 배가 너무 고팠다. 마을 길에는 호산까지 들어가는 24번 버스도 많이 지나다녔다. 악마의 유혹 같은 24번 버스였다. 처음에 호산까지 걸어서 가겠다고 선택했는데 자꾸 24번 버스가 눈에 들어오니 저걸 타면 금방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내가 선택한 걸 해내고 싶어서 `무조건 걸어서 간다.` 다짐하고 가는데 앞에 파란 트럭을 청소하고 계시는 아저씨 한 분이 있었다. 인사를 하자 국토대장정 하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여행 중이라고 하자 대단한 일 하는 거라고 먹을 것을 챙겨주셨다. 바삭한 빵 7개와 허쉬 키세스 초콜릿을 많이 챙겨주셨다. 감사하다고 꾸벅 인사를 하고 힘차게 걸었다. 잠시 후, 옆에 파란 트럭이 지나가면서 `파이팅!`을 외치고 갔다. 가다가 벤치를 발견하고 그곳에서 아까 받은 빵 3개를 먹었다. 숨이 안 쉬어질 정도로 퍽퍽했지만, 그것마저 좋았다. 물을 마시고 다시 출발했다. 가다 보니 아는 곳이 많이 나왔다. 지난번에 학교에서 다 같이 도보여행했던 여러 번 와본 곳에 왔다. 분명 차를 타고 가면 다음 마을까지 얼마 안 걸렸는데 걸어서 가보니 상상 이상으로 멀었다. 마을 하나를 지날 때마다 `호산에 가까이 온 거야.` 하면서도 `아직 이 마을이구나.` 하면서 갔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번갈아 있는 마을 길이었다. 다리가 너무 아파서 이빨과 잇몸이 시릴 정도였다. 그럴 때면 24번 버스가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흔들리긴 했지만 무조건 걸어서 호산에 가 볼 거라고 다시 한번 마음을 굳혔다. 일정하게 호흡하면서 걸으니 훨씬 안 힘들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호산 바로 전에 있는 임원에 도착했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고 조금 빗방울도 떨어졌다. 쉬지 않고 걸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마을 길엔 차도 잘 안 다녀서 조금 오싹해졌다. 바로 옆 풀숲에서 바스락 소리만 나면 놀라고 바람이 불어서 나무들이 흔들리면 겁이 났다. 그런데 무서워지는 게 좋았다. 무서워서 겁을 먹으면 다리에 고통이 잘 안 느껴져서 빨리 걸어갈 수 있었다. 빨리 걸어지면서 다리가 안 아프자 무서운 게 없어지려 하고 무서운 게 없어지면 다리가 아파졌다. 감정 조절을 하면서 일정하게 걷다 보니 드디어 호산에 도착했다. 이렇게 호산이 반가울 수가 없었다. 조용한 촌 동네지만 항상 반가운 친근한 동네였다.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고 너무 힘들었지만 참을만했다. 삼무곡 가족들이 정말 보고 싶었다. 힘든 거랑 아픈 것들은 다 참을만했는데 가족들이 보고 싶은 건 못 참겠다. 터덜터덜 호산에 거리를 걷고 있는데 치킨집 사장님이 보시고는 왜 그리 힘이 없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삼척부터 걸어서 오고 쉴 곳도 아직 못 찾았다고 하자, 택시 곧 끊어진다고 택시를 타서 들어가라고 하셨다. 아주 좋았다. 얼른 택시를 타고 학교로 왔는데 너무 좋아서 그냥 웃음만 나왔다. 삼무곡에 처음 와봤을 때 느꼈던 이상한 짜릿함이 느껴졌다. 동생들과 만나자 다시 행복한 웃음만 나왔다.

[수수깡]

무서워서 겁을 먹으면 다리에 고통이 잘 안 느껴져 빨리 걸어갈 수 있었다...그 마음이 걸어가는 경수의 뒷모습과 함께 보이는구나. 어두운 밤길을 통과했으니 축하해.

[sunshine]

감동!!
그리고 멋져요~~

[경수맘]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듯하다.
그 순간에 함께 있는 듯.
눈물이 난다.

망상.
그런줄도 모르고
여행을 떠난 날부터 밤기온이 훅 떨어져.
어디서 한기에 떨고 있는건 아닌지.
혹 무슨 나쁜 일이라도 생긴건 아닌지.
아들 엄마는 그렇게 밤잠을 설치고 있더라.ㅠㅠ.
망상을 껴안은 혹독한 체험.

천안에서 건강한 아들을 만나서.
내 망상이 부질없는 것임을 체험.

덕분에 경수맘도 공부 많이 했네.

대책없이.
스승과 함께 하는 너의 여행.
뭐든 하고 싶은거 다 해보라는 말씀.
든든하고 자유롭네.
다 해본 아들이.
부럽네.

[하늬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