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룩한 어두움에 대한 감사
어두움 가운데 거룩한 어두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두움을 싫어합니다. 그렇지만 어두움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어두움을 통해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어머니의 태는 어둡습니다. 우리는 어두운 어머니의 태에서 성장했고, 어두운 태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두움은 창조가 있기 전에 꼭 거쳐야 할 과정입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실 때, 성령께서 품으셨던 것은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빛을 창조하시기 전에 어둠이 심연을 덮었습니다. 성령께서 어둠을 품으시는 중에 빛이 창조되었습니다.
성경을 읽는 중에 한때 하느님께서 “내가 어둠 속에 있는 보화와 숨겨진 보물을 너에게 주리니”(이사 5,3)라는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어둠 속에 보화와 보물을 담아 두셨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 하느님의 창조의 역사 속에서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새 역사를 창조하기 전에 어두움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수 몽크 키드는 이 어둠을 ‘거룩한 어두움’이라고 불렀습니다. 수 몽크는 한때 칠흑같이 어두운 날들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날들을 통과하는 중에 문득 깨달음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기다림>이라는 책에서 그가 깨달은 것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계란은 부화를 통해 병아리가 된다. 부화한다는 것은 발육에 필요한 조건을 조성한다는 뜻이다. 그 조건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그때 퍼뜩 깨달았다. 어둠이었다. 모든 생물은 어둠 속에서 부화한다. 비로소 나는 내가 처한 어둠이 거룩한 어둠임을 알았다. 나는 뭔가 새로운 것을 부화하고 있었다. 새 생명이 자라 출현할 때마다, 그 과정에 어둠이 꼭 필요하다. 번데기 안의 애벌레든 땅 속의 씨앗이든, 태내의 아이든, 영혼 안의 참 자아든, 모두 어둠 속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있다.(수 몽크 키드, <기다림>, 복있는 사람, 207쪽)
어두움을 통해 새 생명이 자라고, 새 역사가 창조된다면, 어두움의 기간 동안에 기대를 가지고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림에는 양면이 있습니다. 수동적인 면과 능동적인 면입니다. 기다리는 동안 때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그냥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지만 기다리는 동안 놀라운 일들이 벌어집니다. 엄마의 태 안에 있는 아이는 기다리는 동안에 열정적으로 성장합니다. 애벌레 속에 있는 나비도 각양각색으로 자랍니다. 어미 닭이 품고 있는 계란 속에 있는 병아리도 아름답게 자랍니다. 모두 다 한결같이 어두움 속에서 기다리는 동안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서서히 이루어집니다. 특별히 생명에 관한 일은 더욱 그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두움을 통해 이전에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십니다. 밝은 미래를 보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눈을 잘 관찰해 보십시오. 우리가 물체를 보는 것은 흰자위를 통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검은자위 곧 눈동자를 통해 보는 것입니다. 왜 하느님께서 검은자위를 통해 사물을 바라보고 사물을 식별하도록 만드셨을까요? 탈무드는 이 인생의 신비, 검은 눈동자의 신비를 이렇게 풀어줍니다.
“너의 인생이 아무리 어둡다고 할지라도 너희 현실이 눈동자와 같이 캄캄하다고 할지라도 낙심하지 마라. 절망하지 마라. 오히려 그 어두움을 통해 밝은 미래를 볼 수 있느니라.”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두운 시절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요셉은 어두운 구덩이에 떨어졌습니다. 감옥에서 2년 동안 어두운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 어두운 기간 동안 하느님께서는 요셉을 위해 역사의 무대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요셉이 기다리는 동안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파라오에게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그 꿈은 엄밀한 의미에서 파라오를 위한 꿈이 아니라 요셉을 위한 꿈이었습니다. 다윗은 한때 아둘람 굴에 머물렀습니다. 굴은 어둡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어두운 날들을 통과했고, 그 어두운 날들 동안에 하느님께서는 다윗을 키우셨습니다. 어두운 굴에서 그를 성화시키셨고, 그를 지혜롭게 만드셨습니다. 아버지의 양을 치는 목자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는 임금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동안 하느님께서는 일하고 계십니다.
지금 이 시대는 속도에 중독된 시대입니다. 무엇이든지 빨리빨리입니다. 급하기 그지없고, 더 이상 인내가 미덕이 아닌 시대가 되었습니다. 속도중독증에 걸리고 만 것입니다. 기다릴 줄 모르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영혼은 느린 것을 좋아하고, 고요한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느림이 게으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혼의 느림은 하느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느림이요,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바라보는 느림입니다. 또한 삶의 맛을 음미하는 느림입니다.
간디는 “삶이란 그 속도를 높이는 것 이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어두움을 통과하게 하실 때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속도를 조절하시기 위해 거룩한 어두움을 허락하십니다. 거룩한 어두움 속에서 밝은 미래를 바라보며 감사하는 중에 기다리십시오. 하느님께서 일하실 수 있도록 충분히 시간을 드리십시오. 인내하며 기다리면 하느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미래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