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연극반 얘기: 교육-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평등
2009-06-09 장용창
영어연극반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얘기 좀 더 쓰려고 합니다. 하면 할수록 재미 있습니다.
1. 수업시간에 조용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 고통을 주다
어제 처음으로 저는 “학생은 수업시간에 조용히 해야 해”라는 저의 생각이 저를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어제는 정말 정말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었습니다. 제가 한 페이지 영어를 다 암기하면 아이스크림 사주고 집에 보내준다고 해놓고 암기를 시켰는데, 이 놈들이 암기하기는커녕 고함을 지르기도 하고, 쇼파에서 레슬링까지 하는 놈들도 있었습니다. 여자아이들은 암기에 집중하려고 하는데 남자아이들이 시끄러워서 못하겠다고 불평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레슬링하는 놈들 틈에 끼어 저도 장난치듯 등짝을 때리면서 “조용히 좀 하자”라고 달랬지만, 아무 소용이 없고 오히려 저한테 레슬링 기술을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재미 있게도 그렇게 쇼파에서 레슬링하는 두 놈이 오히려 우리 연극반에서 영어를 가장 잘 하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저는 생각해봤습니다. 왜 이 놈들이 떠들까 하고요. 답은, 과제가 너무 쉽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친구는 영어를 아주 잘 해서 제가 암기하라고 한 부분은 10분이면 다 외워버리는 아이들이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30분 동안 집중해도 될까 말까한 분량입니다. 그러니 이 아이들로서는 그렇게 떠들고 놀아도 자신이 있다는 것이죠. 더욱이 자기만 잘한다고 얼른 암기를 끝내버리고 집에 가면 엄마가 왜 빨리 왔냐고 이상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또한 제가 남녀 짝을 지어놓고 같이 외워야 통과된다고 했고, 이 친구들에게 저는 제일 힘들어하는 두 아이를 짝으로 지어놓았으니, 이 친구들로서는 오히려 자기 짝에게 암기할 시간을 주는 게 더 나은 전략인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떠들던 놈들도 시간이 지나가자 틈틈이 알아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네 팀이 비슷한 시점에 통과를 하였습니다. 즉, 그렇게 떠들면서도 할 건 다 했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수업시간이, 제가 학교 다닐 때처럼, 꼭 조용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죠. 게다가 그렇게 떠들게 된 이유는 아이들이 “못된 놈”이어서가 아니라, 수업의 과제와 방식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라는 점을 말이죠. 오히려 제가 학교 다닐 때, 조금이라도 교사의 눈에 거슬리면 “몹쓸 놈”이라는 둥, “커서 뭐가 될래”라는 둥 자존감과 꿈을 완전히 뭉개버리고 좌절감과 소외감만 안겨주는 폭력적인 발언에 우리의 친구들이 얼마나 많이 시달렸는지요. “조용한 교실”의 대가는 너무나 컸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시끄러운 교실이 나을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2. 중요한 것은 개인별 수준에 맞는 적절한 과제
전에 텔레비전에서 몰입이라는 것에 관한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자기 현재 능력에 비추어 어렵지도 쉽지도 않은 적당한 수준의 과제를 주고, 그에 대한 적당한 보상을 약속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그 과제를 풀기 위해 몰입하고, 그 때 희열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이론이 참 맘에 들었습니다. 연극반에서 오히려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이 떠드는 이유는 제가 내준 과제가 자기들 능력에 비해 너무 쉬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의 학습을 위해서는 능력에 맞는 적당한 과제를 주어놓고, 그에 대한 적정한 보상을 해주는 것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제가 아이스크림 사주는 것처럼 말이죠.
3. 교육의 평등-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평등
전에 어느 선생님이 이걸 가르쳐줬습니다. 교육의 평등에는 기회의 평등도 있지만, 결과의 평등도 있다고요.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부러워하는 핀란드 증 북유럽 나라들은 기회의 평등이 아닌 결과의 평등을 지향하고 있다고요. 저는 아주 놀랐습니다. 그때까지 기회의 평등만 있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결과의 평등은, 즉, 아이들이 학습한 결과가 비슷하게 나오도록 교육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아마 요즘 사람들은 “그럼 획일화 교육을 시키자는 거냐? 영재를 둔재로 만들자는 거냐?”하면서 난리법석을 떨 것입니다. 하지만, 교육결과의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 영재를 둔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경쟁력을 높인다는 사실은 북유럽 선진국들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 연극반에서 교육 결과의 평등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별 게 아닌 것 같아도, 아이들 모두가 한 페이지를 완전히 암기해야만 그 수업이 끝납니다. 잘 못하는 아이들은, 제가 잘 하는 아이들과 짝을 지어놓았기 때문에, 암기할 수 있도록 잘 하는 아이들이 도와주게 됩니다. 잘 하는 아이들은 그 과정에서 스스로 더 배우게 됩니다. 아주 잘 못하는 아이가 한 명 있는데, 이 친구는 제가 따로 가르칩니다.
생각해보면 제가 어릴 때 했던 “나머지 학습”이라는 것도 이런 교육결과의 평등 정책에서 나온 좋은 정책인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했다면, 최소한 읽고 쓰기는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목표로 두고, 읽고 쓰기가 안되는 아이들은 교사가 따로 남아서 지도하면서 될 때까지 가르치는 것이지요. 당시에는 아이들이 불만이 많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소중한 일인 것 같습니다. 요새는 이걸 안 하기 때문에, 비싼 유치원을 다니지 못한 아이들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어도 읽기를 제대로 못한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제 옆집에 사는 초등학교 2학년 아이도 읽기 쓰기를 제대로 못합니다. 교육결과의 평등을 추구하는 “나머지 학습”을 학교가 포기했기 때문 아닐까요?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사람 사는 세상을 원한다면 교육결과의 평등을 교육의 가치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4. 수준에 맞는 학습과 교육결과의 평등은 모순이 아닌가?
겉으로 보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순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학생 개인의 수준에 맞는 학습이나, 교육결과의 평등은 결국 모두, 학생 개개인의 능력과 적성을 살피고, 학생 개개인의 학습 결과를 검토함으로써 달성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정 학년에서 추구하는 수준의 학습은 모든 학생이 통과하도록 만들도록 도와주고, 그 중에 특정 방면에 능력이 뛰어난 학생들은 따로 그 수준에 맞는 과제를 주어 배우는 기쁨을 누리도록 한다면 수준에 맞는 학습과 교육결과의 평등을 모두 추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댓글 제가 노는 드림실험교회 카페에 올라온 글인데, 마음에 와 닿아서 옮겨왔습니다.
쉽지 않은 교육의 평등화~ 나머지 학습, 결과의 평등, 공감이 가는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