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춘향
성춘향의 그네터 남원 광한루
춘삼월 꽃피고 새우는 계절
향기로운 춘향 몽룡의 입맞춤
'향'
*영화 춘향전의 뒷 이야기
신상옥 감독의 최은희 주연의 영화. 당시 36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큰 성공을 했다. 이 기록은 현대로 치면 1000만을 훌쩍 넘는 기록이라고 한다.
당시 김지미 주연, 홍성기 신상옥-최은희처럼 두 사람도 당시에 부부였다연출의 춘향전과 경쟁했는데 호사가들은 20대 초반의 김지미의 춘향전이 이길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이 대결은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고 최은희의 압승으로 끝났다. 사실 최은희가 미인이기는 했지만 성춘향 촬영 당시 당시 이미 한국나이로 35살이었기 때문에 한창 20대 초반이었던 김지미가 완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처럼 신상옥의 성춘향은 김지미의 춘향전보다 여러 모로 불리한 조건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신상옥 감독은 한국영화사 최초로 컬러 시네마스코프를 도입한 기록을 남길 정도로 영상미에 정성을 다했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 고가의 코닥필름을 쓰면서 현상까지 일본에서 따로 진행했고, 색이 잘 안붙는다는 이유로 오후 3시 이후에는 촬영을 하지 않는 등 본인의 영화 제작 능력과 춘향 이외에도 상대적으로 명망있는 조연들(허장강, 도금봉, 김희갑, 구봉서 등등)의 힘을 받으면서 악조건을 뛰어넘고 영화를 흥행시켰다.
반면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은 뒤늦게 제작에 들어가서 먼저 개봉하는 바람에 춘향 이외의 캐스팅도 부실했고, 평면적인 연출과 칙칙한 화질, 부실한 세트까지 까이면서 신상옥 감독의 춘향전과 여러모로 비교되는 오점을 남겼다.후에 최은희 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남편이 출연료 아끼자고 나이먹은 마누라를 부려먹는다는 이야기가 들렸다고 한다
출처: 나무위키
춘향전」(2)
한자중문분야유형지역시대
정의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정착한 조선족들에게 전해지고 있는 열녀 설화.
채록/수집 상황
춘향전은 조선족의 불후의 고전적 대표작으로 창극·연극·영화 등 다양한 예술 형태로 동서양 여러 나라에 널리 알려진 세계 명작의 하나이다. 현재 전해지는 「춘향전」[「열녀 춘향 수절가」]은 18세기 중엽 무명씨의 광대판 소리 작가들에 의하여 창작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춘향전의 기원 설화는 10여 종에 달한다. 그중에서 춘향전의 원본 「열녀 춘향 수절가」의 슈제트 구성에 가장 접근한 것은 「춘향 설화」·「춘양 설화」 등 신원 설화와 열녀 설화인 「김우항 전설」·「박문수 전설」 등 어사 설화이다.
춘향전은 시초에 설화와 노래의 형태로 대중들 사이에서 창작되고 전해지면서 창극화되었고 훨씬 후에야 소설화되었다. 주제로 볼 때 연애 소설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춘향전은 신분적 차이가 큰 두 청춘 남녀의 진지한 사랑 이야기를 통하여 신분적 장벽을 넘어선 순결한 사랑에 대한 추구와 그러한 추구를 제압하는 신분적 불평등에 대한 반항 의식과 함께 인성 해방의 갈망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까지 춘향전의 판본으로는 고전 필사본 30여 종과 목판본 4-5종 외에 활판본 60여 종이 있다. 연변인민출판사는 1956년에 북한에서 편찬한 『춘향전』 원문을 그대로 출판하였으며, 1980년에는 현대 조선문판 『춘향전』을 출판하였다. 그리고 흑룡강성 연수현의 김봉임 할머니는 민요 형식으로 「춘향전」을 불렀고, 요령성 심양시 소가툰의 민간 예인 신옥화도 판소리 음악으로 「춘향전」을 불렀다.
민간 문예 연구자 장동운은 음악 형식의 「춘향전」을 채록하여 4.4조 운문으로 민간 서사시 「민요 춘향전」을 펴내 『민간 서사시 배뱅이굿』[료녕 인민출판사, 1982]에 수록하였다. 민간 이야기와 황구연의 구술로 된 「춘향전」은 『황구연 전집』[김재권 정리, 연변인민출판사, 2007]에 수록되었다.
내용
춘향전은 조선족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로 여러 형식으로 많이 전해져 내려왔다. 아래에 이야기 대왕 황구연의 구술로 된 완판본의 줄거리를 적는다.
옛날 숙종 대왕 때는 태평시절이었다. 당시 전라도 남원에 춘향이라는 절세가인이 있었다. 춘향의 아버지는 성참판이고 어머니는 당시 남원부에 기생으로 있은 삼남의 명기로 이름난 월매였다. 나이 사십이 넘어서야 명산대천에 빌고 잉태하여 순산했는데 춘향이를 낳을 때 방안에 향기가 가득한 속에 구슬 같은 딸을 낳자 그 아기의 이름을 춘향이라 불렀다.
성춘향은 소녀티가 나기 전부터 효행이 비길 데가 없어 아름다운 애라고 남원읍에 소문이 자자했다. 광한루 수양버들가지의 꾀꼬리가 벗을 부르는 5월이었다. 나이 열여섯 살이 된 이도령이 방안에 불 밝혀 공부하다가 바깥의 풍경에 매혹되어 방자를 불러 경치 구경을 하자고 하였다.
방자에게 고삐를 잡히고 나귀를 타고 광한루로 갔다. 광한루에 이른 이도령은 그 경치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그 날은 바로 단오날이라 춘향이도 그네를 뛰려고 향단이를 앞세우고 광한루로 나왔다. 이로부터 이도령과 성춘향은 인연이 되어 사랑을 맺게 된다. 이도령과 춘향이 후일에 만날 것을 기약하고 이별한다.
성춘향이 밤낮으로 이도령을 만나지 못해 탄식하고 있을 때 신관사또 변학도가 기생 점고를 하며 춘향이를 불러들여 수청을 들라고 한다. 춘향이가 사또의 수청을 거절한 죄로 수십 대의 곤장을 맞고 감옥에 갇혔다.
서울로 간 이도령은 춘향이를 만나기 위하여 밤낮으로 공부하여 과거 급제하게 되었다. 이몽룡은 전라도 암행어사로 제수 받고 임금님이 하사한 어주를 마시고 부모님께 하직한 후 전라도로 향하였다. 춘향의 사정을 낱낱이 알게 된 이몽룡은 신관사또를 파직시키고 춘향을 구해낸다.
어사또 이몽룡은 전라도의 민정을 살핀 후, 상경하여 어전에 아뢰었고 이조 참의에 대사성을 책봉 받고 춘향을 정열부인으로 봉하였다. 그 후 이몽룡은 이조 판서·호조 판서를 거쳐 우의정·좌의정을 지내며 정열부인 춘향과 더불어 백년해로 하여 3남 2녀를 낳아 잘 살았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춘향전은 소재에서 민족적·향토적 특성이 농후하다. 춘향전은 민간 전래의 설화로 주로 전라도 남원 지방에 전해 내려온 열녀 설화이나 신원(伸冤) 설화와 같은 전설을 기본적인 소재에 몇 가지 유형의 어사(御使) 설화가 결부된 작품이다.
예를 들면 남원 지방에 늙은 퇴기의 외딸로 춘향이라는 처녀가 있었는데, 얼굴이 몹시 추하나 부사의 아들과 서로 사랑하였다. 그런데 부사 일가는 서울에 올라간 후 패가(敗家)하였다. 처녀는 부사의 아들이 영달하여 오기만 기다렸으나 감감 무소식이었고 근심이 병이 되어 그만 죽고 말았다.
그 후 남원 지방에서는 3년간 흉년이 들었다. 이때 고을의 한 이방이 글을 지어 무당의 살풀이굿에 올려 처녀의 원혼을 위안하였더니 그 후로는 무사하였다. 이것이 바로 춘향전의 원작이다.
춘향은 사랑에 대한 순결하고도 지조를 지닌 봉건적 신분 차별 제도와 양반 관료들의 전횡에 항거하여 나선 한낱 피압박 평민 부녀의 전형적인 형상이다. 그리고 정렬(貞烈)이라는 말로 상징화된 그의 사랑에 대한 깨끗한 도덕적 정조,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의리를 소중히 여기고 권세의 폭압에 굴하지 않는 강의한 민족적인 기질과 외유내강(外柔内剛)·강유겸전(剛柔兼全)의 민족적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춘향전은 조선 봉건 사회 말기 사회 여러 계층 인간들의 생활 처지와 동향, 인정 세태와 풍속 습관 등을 한 폭의 참신한 사실주의적 화폭으로 재현하였다. 춘향 일가의 생활 처지는 비록 최하층 근로 인민과는 달랐지만 신분적으로 가장 멸시를 받던 한 개 피압박 천민 계층의 불행한 사회적 처지와 운명을 전형화한 것이다.
그리고 관노 신분인 방자는 조선 봉건 말기 사회 계급 관계의 새로운 측면을 보여주는 형상이다. 여기서 또한 변학도와 같은 가증스러운 형상을 통하여 조선 양반 사회 생활을 생동감 있게 그려내어 조선 왕조 후기 봉건 통치 체제의 공허성·붕괴상·부패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춘향전은 우선 슈제트 구성에 있어서 극적 집중화의 수법을 능수능란하게 이용하였으며 조선 후기에 흔히 볼 수 있는 일인 일대기적(一人一代記的)인 전기 소설적 구성법을 보이고 있으며, 조선 고유의 판소리계 소설의 특성을 살려 주인공들의 성격 발전을 따라가면서 중심적 갈등을 둘러싸고 사건을 집중적으로 잘 전개해 나갔다. 춘향전의 언어는 서정적 표현이 강하고 시적 정서가 풍부하다.
완판 『춘향전』은 소설로 읽히기도 하지만 가창과 결부된 판소리 대본으로 되었던 관계로 일종 독특한 운문적 문체를 이룬 특색을 보인다. 즉 종래의 3.4조나 4.4조를 기본 운율로 한 민간 가요와 가사들 그리고 고전 한시구들도 많이 사용되었다.
출처: 세계한민족문화대전 웹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