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과 구름의 도상학(김지하론) / 김수림 물과 구름의 도상학(圖像學)
― 金芝河의 서정시와 反映的인 물의 이미지
김수림
金芝河는 한국 현대시의 전통 속에서 쉽사리 찾아보기 힘든 물질적 상상력의 시인이다. 상승하는 불의 이미지는 거센 도전과 항쟁의 비장함이 주를 이룬 초기 서정시에서 특히 인상적인데, 이야말로 김지하가 지닌 물질적 상상력의 본류를 후기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표현하는 핵심 圖像(icon)이다. 이러한 `불 이미지'의 지배적 성격은, 남진우가 생명의 불 영원의 빛 이라는 글에서 이미 통시적으로 섬세하게 분석한 바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김지하는, 불의 司祭인 것 못지 않게, 물의 詩人이다. 물 이미지는 김지하 시 전반을 볼 때 불 이미지만큼 폭넓은 분포를 보이지는 않는다. 출현하는 빈도 역시 적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물 이미지'가 지닌 의미 비중은 그 분포의 지엽성을 넘어서는 무게를 가진다. 김지하의 서정시에서 `물 이미지'는 지배적인 `불 이미지'를 때로는 견제하고 때로는 보완하는 구실을 한다. 때문에, 불 이미지를 중심으로 한 김지하의 투쟁적인 남성성을 이해하고, 아울러 그의 시적 변모를 측정하기 위해서도 물 이미지는 가늠자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
강조할 필요도 없이, 물과 불은 서로에 대해 가장 적대적인 물질이다. 물과 기름은 섞여들지 않고 서로의 표면을 회유할 뿐이지만, 불과 물은 서로를 殺害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서로를 살해하는 두 물질이 한 시인의 세계를 역동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이렇게 물과 불이 펼치는 혼돈스러운 모순과 相生의 변증법이야말로 김지하의 문학이 지닌 `역동성'의 상징적인 근원이 아닐까? 그러나 `물과 불의 변증법'을 통해 김지하의 서정시편들을 조명하는 작업은 지금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다. 이 글은, 실제 분석을 통해 `물의 이미지'가 김지하의 시 전반에 미치는 의미의 비중과 영향력을 밝히는 데 주력하고자 한다.
김지하의 시에서 불의 이미지가 압도적으로 우세하다고 해서 물의 이미지가 사라지는 경우는 없다. 물의 이미지는 중기로 분류되는 애린 1부 이후부터 보다 활발히 드러나기 시작하지만, 첫 시집 黃土 에서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위적인 분류가 되겠지만, 김지하의 물 이미지는 대체로 사물을 비추는 자연의 거울로서 나타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나눌 수 있다. 후자의 경우에 물은, 불 이미지와 대립·모순되는 물질로서 제시된다. 그러나 좀더 지배적인 유형은, 물이 자연의 거울로서 드러나는 경우―더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사물을 자기 안에 되비추고 반영하는 작용 자체로서 드러나는 전자의 유형이다. 이 경우 `물'이라는 어휘나 이미지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반영의 이면에 감춰진 `물'이라는 물질을 충분히 도출, 또는 복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물 이미지는 단순히 병행하는 이미지群을 형성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소통적인 場 안에서,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통일된 의미 맥락으로 연결된다. 이 글의 제한적인 성격상 논의의 주안점은 반영적인 물의 이미지에 집중될 것이다. 반영적인 물의 이미지는 많은 경우 지극히 암시적인 형태로만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김지하에게 반영적인 물은 `숨어있는 물'이다.
내 오른팔을 호랑가시나무라고 불러라
내 왼팔을 사자봉 벼락바위라고 불러라
있다면
내게 힘이 있다면
한 팔로 너희들의 죽음을 막고
한 팔로 너희들의 삶을 껴안아주고 싶구나
무심한 구름이 용추다리 건너가는 내 발 밑에 와서
나의 힘없음을 비웃는구나. ― 용추다리 , 全文2
김지하의 용추다리 는 그의 시에 나타난 반영적인 물의 이미지를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결코 빼놓을 수 없으리만큼 중요한 작품이다. 요점적으로 말해, 용추다리 는 반영적인 물의 이미지가 시인에게 심리학적으로 얼마나 내밀한 深部에 자리잡고 있는가를 웅변해 주고 있다.
사실 용추다리의 外觀이나 그것이 말하고 있는 내용은 일견 단순한 것이다. 시적 자아 또는 話者인 `나'는, "너희들의 죽음을 막고" "삶을 껴안아주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럴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나의 욕망은 실현될 수 없는 욕망이며, 그런 의미에서 헛된 욕망에 불과하다, 라는 것이 이 시의 일차적인 내용이다. 그 행간을 확신과 비탄이 교차하는 정서가 채우고 있다.
하지만 시에 있어서만큼은, 표면적인 전언의 이해가 모든 의미화 과정의 深化와 그에 참여하는 독자의 정서적·심미적 체험을 보증하지 못한다. 심지어, 표면적인 전언과 의미화 과정은 서로가 서로를 배반하기도 한다. 좋은 시, 중층적인 의미화 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시가 지닌 덕목은,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거듭거듭 질문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어째서 화자는 구름이 자신의 힘없음을 비웃는다고 생각한 것일까?
처음 두 행의 명령어법이 주는 효과와 마찬가지로, 타인들을 위해서 그들의 삶과 죽음마저 관장하고 싶다는 화자의 욕망은 실로 거대한 것이다. 그 욕망은 인간으로서는 감히 꿈꾸기조차 불가능한 것임에 분명하다. 그런 욕망은, 초월적인 절대자나 적어도 신화적 영웅의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욕망이다. 김현이 일컬었던 김지하의 `영웅주의적 경향'이란, 이렇게 거대한 욕망을 품고 있는 시인에 대해 지식인으로서 그가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경계심을 다소 우회적으로 표현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과연 어떠한 체험이 그렇듯 거대한 욕망을, 그렇듯 손쉽게 꺾어 놓을 수 있었을까?
질문은 마지막 두 행에 집중된다. 화자는 구름이 자신을 비웃는다고 말하면서도 그렇게 생각한 이유에 대해서는 밝히고 있지 않다. 그 구절의 의미를 올바로 되새기려면 시의 전반부와의 대비가 불가피하다. "내 오른팔을 호랑가시나무라고 불러라 / 내 왼팔을 사자봉 벼락바위라고 불러라"라고 말하면서 화자는 거대한 자연물과 스스로를 동일시 하고 있다. 그의 명령어법은 거부하기 힘든 위엄을 느끼게 한다. 그는 이러한 명령어법에 의해서 초월적 존재를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웅변적으로 명령하는 화자의 상상적인 모습 역시 양팔을 치켜든 聖像을 연상케 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호랑가시나무와 사자봉 벼락바위라는 사물이 관찰자로 하여금 대상을 우러러 보게 만들고, 시각적인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보다 심화된 분석은, 1·2 행의 이미지가 작은 것(오른 팔/왼 팔)에서 큰 것, 수직적인 높이를 지닌 것(호랑가시나무/벼락바위)으로 변화하는 은유적 움직임을 보여주며 그 과정에서 `팔'의 위치가 아래로 늘어뜨린 것이 아니라 위를 향해 치켜드는 역동적인 자세로 표현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이어지는 3∼6행의 "죽음을 막고" "삶을 껴안"는다는 행위는, 앞서 나타난 `수직적인 상승'의 표상 작용에서 다시 수평적으로 확장되는 표상작용을 보여준다. 수직적인 높이와 수평적인 넓이를 함께 갖춘 나무·바위의 이미지는 이에 대한 아주 적절한 상징이라 할 수 있다.
1행에서 6행에 이르는 부분은 삶과 죽음을 주관하고 싶다는 화자의 욕망에 걸맞게 거대한 주체의 이미지를 표상한다. 그 거대함의 외적이며 동시에 내적인 크기는 간단히 `상승과 확산'이라는 이미지의 운동으로 규정된다. 여기에는 인간의 도덕적·정신적·육체적 한계들을 넘어서려는 높이에 대한 열망(상승)이라는 개인심리학이, 주변의 타인들을 보살피고 싶다는 바램과 만나고 있다. 또한, 외적인 세계에 맞서 싸우면서 위엄 어린 모습으로 현현하는 父性(男性性)이, 또 한 편으로는 타인의 삶을 자신의 품에 껴안는 母性(女性性)이 하나의 육체 속에 포개어진다.
이렇게 상승과 확산으로 규정되는 거대한 초월자의 이미지와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 7·8 행의 `구름'이다. 무엇에 얽매임 없이 세계를 부유하는 `구름'의 이미지는 동양적인 소요와 낭만주의적인 정신의 대표적인 상징의 하나로 남아있다. 우선 가능한 독법은 `구름'의 이미지를 낭만주의적인 상징으로서 이해하고, 그것을 다시 다리를 건너고 있는 화자와 대조시켜보는 것이다. 용추다리 의 후반부 두 행은 `화자가 다리를 건너가고 있는 중'이라는 핵심적인 정보를 제공해준다. 지상의 삶으로부터 초연한 채 자유롭게 天空을 부유하는 구름의 존재에 비추어 볼 때, 화자는 그가 가진 다리(脚)를 통해 地上에 묶여있고 무언가를 건너가기 위해 다리(橋)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그는 그가 욕망했고, 욕망의 이미지를 통해서 만들어냈던 인신이나 영웅이 아니다. 이러한 독법은 나름대로 유력한 의미들을 생산해내기는 하지만 비객관적인 지표에 기대어 있고, 지나치게 추론적이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화자의 `자기 인식'에 대한 해설이 결여되어 있다. 자신은 人神이 아니며 하나의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자기 인식의 체험을 고려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용추다리의 구름이 왜 천상에서 소요하지 않고 하필 화자의 발 밑에서 나타나는지를 답할 수 없다.
이 글이 줄곧 암시해온 바와 같이, 화자의 자기 인식의 근원에는 보이지 않는 `물'이 은밀하게 숨어 있다. `구름'이라는 단어가 독자에게 일차적으로 제공하는 心象은 하늘에 있는 구름, 즉 낭만주의자의 구름이다. 그러나 용추다리 에서 구름은 화자의 발 밑에 있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 화자의 발 밑에 와 있다는 말은, `물'의 이미지를 배제하고는 불가능한 진술이다. 시인은 어느 한 구석에서도 `물'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용추다리 를 이해하는 데에 가장 궁극적인 지표는 다름 아닌 `물'이다. 그 `물'은 명시적인 언표로서 존재하지 않지만, 의미의 행간에 숨어있다. "무심한 구름이 용추다리 건너가는 내 발 밑에 와"있다고 화자가 말할 때, 그는 하늘 위에 상승해 있는 구름이 아니라 물에 반영된, 즉 하강해 있는 구름을 보는 것이다. 그가 다리를 건너가는 도중이라는 상황은 이 시의 은밀한 심층에 `물'이 놓여있다는 사실을 보다 객관적으로 지지해준다. 자연의 거울인 `물'을 보는 체험은 언제나 내려다보는 체험이다. 따라서 그 하향적 시선은 호랑가시나무, 사자봉 벼락바위와 연관된 상향적 시선·욕망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거대한 욕망과 그만큼 거대한 초월자와 영웅의 이미지를 갈망하던 한 사람이, 어째서 그가 애초에 품고 있던 `높이에 대한 열망'(상승)과는 반대되는 하향적 시선(하강)을 취하는 것일까? 이러한 시선의 뚜렷한 엇갈림과 그에 따른 상반된 태도는 이 시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가 된다.
그가 건너가고 있는 `용추다리'를 추체험하는 독자에게 그 다리의 구체적인 실상이 과연 어떠한가에 대한 세세한 정보는 허락되어있지 않다. 그러나 토속적인 명칭과 산속에 있는 다리라는 사실이, 튼튼하게 만들어진 현대식 다리가 아니라 낡고 위태로운 다리라는 인상을 준다. 굳이 이러한 유추가 없더라도 다리는 그 높이 때문에 불안정하게 느껴지고 막연한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는 사물이다. 화자는 어쩌면, 다리의 높이와 그 불안정함에서 비롯하는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혀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의 시선은 어째서 굳이 발 밑의 심연을 향하는 것일까? 융의 심리학은 인격의 균형을 회복하려는 꿈과 무의식의 기능을 강조한다. 그의 이론은, 도덕적·정신적인 높이에의 극단적인 추구가, 언제나 추락에 대한 매혹과 두려움에 의해 보완·수정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3 용추다리 의 화자가 느꼈을지 모를, 다리 건너기의 불안은 공간적인 동시에 심리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불안 심리에 의한 정신적 균형 회복이라는 융 심리학의 해석적 전제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는 아니지만, 우리는 화자가 내려다보는 행위를 그 자체로 상향적 욕망의 반성으로 생각할 수 있다. 사람은 욕망하는 바를 이루려는 맹목적 일념 속에서 욕망 자체를 반성하기도 어렵고 성취하기도 어렵다. 어떤 의미에서 반성을 통한 욕망의 제동과 수정은, 당위적 상태에 대한 욕망과 현실적 제약 사이의 균형을 회복하려는 노력일 수 있다. 生死의 반복으로부터 타인들을 보살피기 위해서 인간적 제약을 넘어선 힘과 높이를 바란다는 영웅주의적 욕망은 너무 크고, 너무 압도적이다. 그 욕망의 거대함이 그리는 심상에 비해 모든 인간 존재는 힘없고 초라하다.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는 행동은, 이 욕망의 위압과 맹목성으로부터 한 발 물러나 현실적 제약―"나의 힘없음"―을 돌아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자신의 욕망을 수정하려는고통스런 자기 확인의 행위가 아닐까.
이 하향적 시선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나의 힘없음"에 대한 성찰의 계기이다. `발 밑의 구름'이라는 언표의 이면에 숨어있는 물의 존재는 이 점에서 중요하다. 이 시의 화자가 과연 물에 비친 구름과 함께 초인의 이미지에 걸맞지 않는 힘없는 자신의 영상을 내려다 보았는지는 단정짓기 어렵다. 그러나 반영적인 물 이미지는, 발 아래 물에 비친 구름의 영상을 보는 일이, 시적 자아에게는 자신의 범상함을 돌아보는 `자기 확인'의 중요한 계기였으리라는 가능성을 시사해준다. `발 밑의 구름'이라는 언표의 이면에 숨어있는 물의 존재는, 자연의 거울을 통한 화자의 `자기 확인' 체험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짐작을 가능하게 한다.
이런 맥락에서, 반영적 물 이미지와 연관된 김지하의 시적 자아가 흔히 괴로운 자기 확인의 체험에 마주치고, 거기에서 자신의 제약과 한계를 통찰하는 성찰적 자아로서 나타난다는 점은 주의를 요한다. 가령 다음과 같은 초기작에서 물의 영상은 자신의 결함과 누추함에 대한 모멸감이 섞인 內省을 보여준다.
주무르고 벗기고 악을 쓰고 빨고 핧고
나는 고름 담긴
술 한 잔의 고름
시궁창 속 얼굴이
달과 내 오줌에 깨어질 때 ― 뒷골목의 시궁창 까마귀 벌판 일부, (1: 122)
흔히 복수심·증오·恨 등의 비장하고 도전적인 정서를 수반하는 불의 상승 이미지가 중심인 작품에서와는 달리, 자연의 거울을 대하는 김지하의 시적 자아는 내성적인 면모를 강하게 보인다. 만약 그를 나르시스적 인간 유형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때의 나르시스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도취한 탐미주의적 나르시스가 아니라, 당위(sollen)와 존재(sein)의 간극―이상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 사이의 극복될 수 없는 간극을 통찰하고 괴로워하는 비극적인 나르시스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깨달음이 인공의 거울이 아닌 자연의 거울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그와 연관하여 나타나는 것이 예의 고개 숙이는 행위―`하향적 시선'이라는 점이다. 초기 김지하가 치솟는 불의 미학을 통해 보여주었고 용추다리 에서도 나타나는 영웅주의적
태도는, 당위와 존재의 이런 괴리를 살피는 매개물인 `반영적 물'에 의해 견제된다. 그러나 물을 내려다 보며 얻은 깨달음은 너무 고통스러운 체험이다. 위의 인용에서도 보이 듯이, 물과 연관된 자기 확인의 체험은 흔히 비탄·자기 환멸 등의 정서를 낳는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는 "도대체 자의식이 발달한 인간이 어찌 자기를 존경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외친다. 용추다리의 화자는 아직 깨달음의 고통으로부터 회복하지 못한 단계에 있다. 그는 여전히 욕망하는 바와 존재하는 바가 양분된 상태에서 괴로워한다. 시인이 자신의 고통을 점차 다스려가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물-구름의 이미지를 다시 만나게 된다. 삼라만상·1 에서 그것은 놀라운 물질적 상상력을 통해 제시된다.
썩은 물도 물은 물
흐르는구나
하늘을 비추는구나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구나
아니
구름 한 점 어린 것 보니
돌아오겠다
깨끗이 되어
또 오고
또 돌아오겠다. ― 삼라만상·1 全文, (2: 243)
黃土 에 실린 비녀산 이라는 작품에서 시인은, "삶은 탁한 강물 속에 빛나는 / 푸른 하늘처럼 괴롭고 견디기 어려운 것"(1: 52)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때의 구름이 속한 하늘과 지상의 물은 푸른 광채와 탁함이라는 양극의 이미지로 분열된 것이었다. 그 분열은, 그러나 양쪽으로 찢겨진 별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만은 아니다. 좌절된 꿈 때문에 우리가 고개 떨굴 때, 누추한 현실을 증거하는 바로 그 탁한 물이, 지상의 반대편에 위치한 푸른 하늘과 구름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준다. 반영적인 물은, 우리가 그 앞에서 성취될 수 없는 욕망을 끊임없이 돌아보고 기억해야 하는 聖所와도 같다. 시인이 "괴롭고 견디기 어려운 것"은 이 땅의 삶이 누추하고 더럽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더러운 강물/현실 속에 망각할 수 없는 기억과 꿈으로서 푸른 하늘이 빛나고 있음을 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좁혀질 수 없는 듯이 보이는 하늘과 지상의 거리를 거듭 확인하고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 그것이 괴로운 것이다.
비녀산에서 푸른 하늘을 비추고 있는 강물의 이미지는, 지상과 천상의 행복한 합치가 아니라 대립과 분열의 심화이고, 그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으로서 존재하는 것이었다. 삼라만상·1 에 이르러서 물과 하늘/구름의 이미지는 근본적으로 변화된 양상을 보여준다. 분열과, 그것에 대한 기억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던 더러운 물의 이미지는 이제, 순환과 생성의 그것으로 변모한다.
"썩은 물도 물은 물"이다. 그 물은 흐르고, 하늘을 비추고, 낮은 곳을 찾아 흘러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물질이다. 그것이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물의 속성이다. 그런데 시인은 곧이어 그 물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던지고 있다. 이 부분의 내용을 단순화시켜 보면 다음과 같다.
a) 썩은 물은 흘러간다
b) 썩은 물은 하늘을 비춘다
c) 썩은 물은 돌아오지 않는다
d) 썩은 물에 구름이 어린다
e) 썩은 물은 (깨끗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우리는, 물이 구름이 되고 그것이 대기의 순환을 거쳐 다시 비가 되어 내린다는 상식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또, 그러한 자연과학적 상식이 삼라만상·1 의 화자가 진술하고 있는 내용을 한층 수월하게 이해하도록 도움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시가 초등 교육의 수혜자라면 누구나 소유하고 있는 상식을 시적인 형태로 변형시켜 놓은 작품에 불과하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썩은 물에 구름이 비친 모습을 본다는 것과, 그 썩은 물이 돌아오겠다는 진술 사이에는 아무런 논리적 연관도 존재할 수 없다. 독자가 자신의 과학적인 상식을 동원하지 않는다면, 그 간격은 메워질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텍스트의 간극을 메우기 위한 일차적인 독해에 있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대기와 물의 순환에 관한 과학적 상식이다. 시인의 직관은 그러한 첨언이 없이, 물에 어린 구름을 보는 행위와, 그 물의 회귀와 순환이라는 두 개의 문장을 인과관계를 나타내는 어미 `-니'로써 연결짓는다. 물이 구름이 되고, 구름이 다시 물로 變轉하는 과정에 대한 일체의 설명을 생략함으로써 시인은 결국 하나의 사실을 강조한다. 썩은 물과 승화된 구름은 궁극적으로 하나이다.
더러움과 부패 그리고 어두움과 무거움 등을 속성으로 하는 썩은 물의 이미지와, 깨끗함·맑음·가벼움·밝음 등을 속성으로 거느린 구름의 이미지는 우리의 감각적인 인식에서 대립·모순된다. 사물의 外觀에 바탕을 둔 인식은 결코 그 상반된 이미지들을 한 데 통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간단한 과학 상식은 썩은 물과 순백의 정화된 구름이 특정한 변화의 단계에 속해 있을 뿐이며 근원적으로 동일한 물질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면서도, 그것들이 서로 다른 밀도를 지닌 별개의 사물이라고 구별을 가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물의 순환 과정에 대한 언급을 모두 생략하고 다만 그 물이 "돌아오겠다"는 말이 되풀이될 때, 그것은 시인의 직관이 물과 구름의 동일성을 강조하는 언술의 조직 방법이다. 돌아온다는 動詞는 흘러간 것과, 지금 썩은 물 위에 어리는 것과, 또 미래에 이 땅에 내릴 것이 동일한 물질이라는 전제 없이는 불가능한 표현이다. 계속적으로 형태를 뒤바꾸는 물에 있어서 가고 돌아옴, 즉 `순환'은 결국 물이라는 물질의 내재적인 속성으로 표현된다. 지상의 썩은 물도, 하늘에 浮遊하는 구름도, 돌고 도는 순환의 궤도 안에 있는 하나의 자리이며, 동적인 순환성을 함께 나누어 갖고 있다. 그것을 직관적으로 깨닫는 물질적 상상력의 소유자에게 있어 구름은 곧 `가벼운 물'이다.
더러운 물과 대비되는 구름은, 심리학적으로 말한다면 `더러운 물'이 높은 차원으로 高揚되고 승화(Sublimation)된 形象, 아니 말 그대로 `昇華' 자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더럽지 않은 물이 과연 어디에 있을 것인가. 고양된 순수성의 상징인 구름은, 非육체적이고 지상의 욕망에 대해서 초월적이라는 점에서 낭만주의자들의 구름과 속성을 같이하지만,
`가벼운 물'의 진정한 이미지가 비로소 확연히 드러나는 지점은 무거운 물·더러운 물이 변화한 모습이 바로 구름이라는 점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구름은 자기 고양과 단련을 거쳐 淨化된 썩은 물 외에 그 무엇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벼운 물'로서의 구름은 낭만주의자의 구름과는 상당한 거리에 놓여 있다. 부패하고, 더럽고, 무거운 육체를 지닌 썩은 물이 하나의 잠재적인 `질료'라면, 그것의 미래적 `형상'이 저 정화된 구름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흘러가는 썩은 물이 "깨끗이 되어 / 또 오고 / 또 돌아오겠다"고 말하는 화자의 어조는 분명히 관조적이고 아직 짐작의 형태에 머물러있음에도 낙관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승화의 과정은 거의 언제나 욕망의 전환과 지연, 혹은 쾌락의 억제와 같이 고통스럽고 부정적인 억압을 수반하지만, 삼라만상·1 에서 淨化 작용으로서의 승화는 그런 억압의 부정적인 내용과는 상당한 거리에 있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승화의 과정을 거친 썩은 물은 대기 속에 머물러만 있지 않고 지상으로 되돌아온다. 그것이 되돌아옴으로써 천상과 지상은 하나의 圓環 속에 놓이게 된다. 구름과 물이 다르다면 지상과 천상은 어떤 연계점도 없이 분열만을 영원히 계속할 뿐이다. 그 둘은 그저 단절된 세계에 불과하다. 일단 천상의 가벼운 물과 지상의 썩은 물이 동일시됨으로써만, 물이라는 물질의 속성에 하늘과 땅을 가로지르는 `순환'이라는 새로운 속성이 추가된다. 그 `순환'이야말로 썩은 물의 淨化를 가능하게 하는 운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물의 순환성을 깨닫는 일은, 현재에는 아직 잠재적인 모습으로만 머물러 있는 운동들을 미래와 과거로 확장된 시간의 지평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 순간 속에서 영원을 보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의 전후에 포개어져 있는 시간을 볼 수 있는 시인만이 물의 순환성을 깨닫고, 정화의 가능성을 예감한다. 삼라만상·1의 화자는 썩은 물 속에 "구름 한 점 어린 것"을 일별함으로써 현재 속에 충일한 시간과, 거듭되는 `삼라만상'의 우주적 순환을 감득하고 있다. 물가에 자리한 시인은 썩은 물이라는 잠재적인 질료 속에서 정화된 구름이라는 미래태를, 그러나 동시에 발견하는 것이다. 그에게 언젠가 도래할 미래태(구름)는 잠재태로서의 질료(썩은 물) 안에 내재되어 있다. 그는 현재와 미래를, 현실과 꿈을 한꺼번에 생각하며, 그 안에서 존재하는 것(sein)과 당위적인 것(sollen)은 극적으로 동일성을 획득한다. 그러한 同時性과 共存의 가장 함축적이고 탁월한 상징은 `구름을 반영하는 썩은 물의 이미지'에 의해 표현된다. 그 반영적인 이미지는 `물과 구름'이 아니라 `물-구름'이다. 물과 구름을 별개로 여기지 않고 물-구름으로 인식하는 시인은 이제 "맑은 나도 더러운 나도 / 앞서거니뒤서거니 함께 / 내 안에서 걷고 있다"( 속살·1 )고 담담하게 말할 수 있게 된다. 더러움과 맑음이 순환하는 물의 궤적 속에 있는 등가적인 부분임이 밝혀진 후에야 그는 비로소 더러움 또한 분명히 자신의 일부이라는 것을 용인할 수 있다. 삼라만상·1 의 관조적이고 여유로운 어조는 이러한 관용의 자세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물-구름의 이미지가 없이, 또 그 이미지를 바라보는 행위가 없이, 과연 이 모든 깨달음과 예감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물-구름을 바라보는 행위가 얼마나 본질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지는, 가령 서로 짝을 이루고 있는 `b) 썩은 물은 하늘을 비춘다―c) 썩은 물은 돌아오지 않는다'와 같은 내용소의 짝이 `d) 썩은 물에 구름이 어린다―e)썩은 물은 돌아올 것이다' 와 같은 내용소의 짝과 얼마나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가 하는 점을 한 번 눈여겨보면 명확해진다. 하늘만을 비출 때, 물은 돌아오지 않는다. 구름을 비출 때만이 그 반영적인 물은 다시 돌아올 물이 된다. 즉, 순환하는 물이 된다. 이것은 분명히 넌센스다! 하지만 그러한 넌센스와 몽상이 없이, 어떻게 우리는 썩은 물과 구름이 같고, 그것들이 자리를 바꾸며 순환하고, 마침내 "또 오고 / 또 돌아"올 것을 떠올릴 수 있겠는가. 구름을 반영하는 물의 이미지가 없이 천상과 지상,당위와 존재는 하나의 圓環 속에 자리할 수 없다. 구름을 비추는 순간 반영적인 물의 이미지는 물-구름이 된다.
이제 땅에도 구름은 있고, 하늘에도 물은 있다. 前과학적인 정신에게 있어서 물과 대기의 순환에 관한 과학적 상식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썩은 물 속에 구름이 비치고 그 구름을 보면서 명상에 잠기는 일이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썩은 물이 더러우면 더러울수록 그 물은 사물을 더 훌륭하게 비추어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반영적인 물이 지닌 `부패와반영의 정비례 법칙'에 의해서, "썩은 물도 / 물은 물"일 뿐만 아니라, 썩었으면 썩었을수록 그 물은 더 좋은 물이 된다. 물의 내부에서 진행되는 부패와 혼돈이 증가하면 증가할수록, 그 물은 `구름'이라는 승화의 꿈을 더욱 뚜렷하게 반영하고, 시인은 그 앞에서 더욱더 자주 명상에 잠길 것이기 때문이다. 수면에 비친 구름으로부터 물의 순환성을 깨닫는 정신에게 있어, 승화의 가능성은 이미 순환하는 물의 내재적인 속성일 뿐만 아니라 썩은 물(반영적인 물)의 그것이기도 한 것이다. 시인의 사유 속에서 무화과 의 꽃이 열매의 내부에서 만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열매 속에서 속꽃 피는 게 / 그게 무화과 아닌가 / 어떤가 (2: 191)), 백색의 구름은 썩은 물의 진창 속에서 피어오른다. 김지하의 물 이미지는, 고양·정화·조화된 形象(구름/속꽃)을 저 혼돈스럽고 더럽기 짝이 없는 질료(물/과육) 속에 이미 잠재해 있는 가능성으로 파악하는 역동적인 사유의 한 유형을 열어 보여준다. 그것은 정태적인 현재를 가능성이 들끓고 있는 곳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역동적이며, 그 가능성을 썩음/더러움/혼돈/모순 등이 뒤얽혀 있는 `運動'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또한 역동적이다. 그러니 `혼돈과 더러움을, 부인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라'. 누구보다도 혼돈과 더러움에 찌든 이 땅의 자아로 인해 괴로워해온 시인이, 당위와 존재 사이의 불화로 고통받아온 시인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당위-존재 간의 분열로 괴로워하던 비극적 나르시스는 이제 썩은 물(존재/질료)과 구름(당위/형상)의 화엄적 얽힘을 통찰함으로써 거대한 긍정에 도달한다. 나로서는 그러한 긍정의 강도와 수량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 긍정은 경이롭고, 섬찟하다. 이렇게 역동적인 긍정성은 마침내 逆旅 와 같은 절창 속에서 연꽃이라는 불교적 상징을 이용하여 불의 형상(붉은 연꽃)을 물이라는 질료(진흙창) 속으로부터 개화시키고, 양자 간의 친화와 잠재적인 하나됨을 이끌어내기에 이른다.
내 이마는 기억의 집
회한과 원한 가득한 진흙창
연꽃 한 송이 일찍 피어
이마를 가르며 붉게 벌어진다 ― 逆旅 일부, (2: 302)
이로써, 반영적인 물의 이미지는 김지하의 역동적인 시적 旅程을 이해하는 중요한 圖像으로 자리한다. 김지하는 단일한 명제로 정의되기를 끊임없이 거부하는 현재 진행형의 시인이다. 초기에 도전적인 불의 상승 미학으로 세상과 격렬하게 맞부딪쳐온 청년 시인은, 반영적인 물의 이미지에 기대어 역동적인 갱신을 이루어낸다. 시인은 물을 굽어보는 자세로 초기의 영웅주의적 자의식을 수정하고, 지상적인 존재에 대한 긍정을 통해 당위와 존재의 분열을 감싸안기에 이른 것이다. 그 과정을 동행하는 물-구름이라는 도상은 끝내 逆旅 라는 상징적인 제명의 후기시에 와서, `불'-`물' 두 원소의 근원적인 대립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둘 모두를 감싸안는다. 모밀을 태우는 태양과 더운 피와 횃불이 지배하는 저 황토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또 애린 이후의 변모가 보여주는 단절과 연속을 다각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구름과 반영적인 물의 도상은 김지하 시의 동력원의 하나로 주목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 반영적인 물의 상상력은 시적 원동력의 하나일 뿐이지 김지하가 도달한 궁극적인 해결점은 아니다. 그래서 그는 때때로 다음과 같이 사뭇 절박한 어조로 "내 마음을 쳐라 / 불타는 노을이여 / (…) / 맑은 샘물에다 구원 청하는 /산란한 내 마음 / 더욱더 산란하게 쳐라"( 쳐라 , 2: 283) 외치면서 물에 의지하는 자신을 불의 힘으로 부정한다
1) 물과 불의 二元的 대립은 주체의 분열이라는 주제와 연관될 때 보다 記述的적인 힘을 증명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김지하가 다루고 있는 중심적인 주제 가운데 하나는 바로 `분열된 주체'의 문제이며 여기에는 남성성-여성성, 세계-주체의 대립과 융합이라는 가볍지 않은 주제들이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개요만을 말하자면, 김지하에게 있어서 불은 남성성의 표상으로서 물은 여성성의 원리로서 기능한다고 여겨진다. 물과 불이라는 존재의 動力이 어떤 역학 관계 속에 서로의 힘을 조정하고 변화시키는가 하는 문제와 남성성과 여성성의 문제, 분열된 주체의 문제는 相同 관계에 있다.
2) 김지하 시전집 2권: 모란 위의 四更 , 솔, 1993, 53쪽 (앞으로 김지하의 작품인용은 권수·면수만을 표기)
3) 칼 구스타프 융 編著, 정영목 옮김, 사람과 상징 , 까치, 1995, 68∼69쪽 참조
4) 도스토예프스키, 李東鉉 譯, 지하생활자의 手記 , 문예출판사, 1972, 24쪽.
==================================================================================== 327. 그물 / 홍해리 그물
홍 해 리 어떤 자는 던지고, 어떤 이는 걸리고, 어떤 놈은 빠져나가는, 세상이라는 허방. 홍해리 시집 <비밀> 중에서 洪海里 詩集 《비밀》 <시인의 말> 명창정궤明窓淨几의 시를 위하여 시는 무엇이고, 시인은 누구인가? 이제까지 시와 함께 살아오면서 느끼고 생각한 것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시 쓰는 일은 육체가 행하는 것처럼 영혼이 숨쉬고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행위이다 어떤 곡해나 구속도 용납되지 않는다 어떤 이념이나 주의도 필요없다 시 쓰기는 영혼의 자유 선언이다 시란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다 늘 설레면서 한편으로는 한 편 한 편으로 완성되는 이별이기 때문이다 시에서는 잘 익은 과일의 향기가 난다 그래서 한 권의 시집은 잘 갖춰진 과일전과 같다 시는 호미나 괭이 또는 삽으로 파낸 것도 있고 굴삭기를 동원한 것도 있다. 목재소를 지날 때면 나무 살 냄새가 향긋하다 나무의 피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나온다 목이 잘리고 팔이 다 잘려나가고 내장까지 분해되어도 도끼나 톱을 원망하지 않는 나무는 죽어서도 성자다 한자리에 서서 필요한 만큼만 얻으며 한평생을 보낸 성자의 피가 죽어서도 향그러운 것은 나일 먹어도 어린이같은 나무의 마음 탓이다 사람도 어린이는 향기로우나 나일 먹으면 내가 난다 목재소를 지날 때면 나도 한 그루 나무이고 싶다 한 그루 나무 같은 시를 쓰고 싶다. 양파는 얇고 투명한 껍질을 벗기고 나서 살진 맑은 껍질을 까고 또 까도 아무것도 없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시인은 양파를 까는 사람이다 양파의 바닥을 찾아야 한다 양파의 바닥에까지 천착하며 끽고喫苦해야 한다 철저히 벗겨 양파의 시작/씨앗/정수/처음을 찾아야 한다 늘 처음처럼 시작始作/試作/詩作해야 한다. 매화나무가 폐경기가 되었지만 해마다 봄이면 이팔청춘이다 삼복에 맺은 인연의 끈을 잡고 삼동을 나고 나서 봄이 오면 여봐란 듯이 몸을 열어 보인다 겨우내 폐가처럼 서 있더니 어디에 저 많은 꽃을 숨기고 있었을까 수많은 청매실을 달고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몇 분 안 되는 정정한 시인을 뵙는 기분이다 오늘은 귀로 향기를 맡고 싶다 노매 같은 시인을 만나 고졸한 시 한 편 듣고 싶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죽은 것이라고 먹이 찾아 가기 전이나 잠자리 찾아 들기 전 날아다니는 수묵화로 가창오리 떼가 하늘을 가득 메우는 것은 혼신으로 먹을 갈아 일필휘지로 호수를 품에 띠어 가고 싶기 때문이라고 가창오리 떼는 움직이는 시로 말하고 있다. 시인은 죽으면 신이 된다 시를 버리면 사람만 남고 사람을 버리면 시만 남도록 시와 사람이 하나가 되어 신으로 탄생한다 사람의 영혼을 실어 나르는 신이 되기도 하고 영혼을 노래하는 신神이 되기도 한다. 바다가 내 속으로 들어왔다 신선한 푸른 수평선이 눈썹에 걸렸다 해가 빨갛게 지고 있다 수평선의 두 끝을 잡고 해를 걷어올려라 너의 넋을 잡고 매달려라 시가 걸릴 것이다. 모든 예술이 놀이이듯 시 쓰는 일도 영혼의 놀이이다 시는 내 영혼의 장난감 나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어린이 나의 시는 울퉁불퉁하다 그래서 자박자박 소리가 난다. 그리움이란 소리없이 불어왔다 사라지는 바람 같은 것 언젠가는 떠나보내야 할 것이라며 바람은 멀어지면서 보이지 않는 몸짓으로 말해 주고 있다 맨발로 뛰어가는 발자국 소리 그것이 시였다. 한평생의 그리움을 파도에 실어 보낸 천길 바다를 물질하는 잠녀들은 네가 그리움을 아느냐고 묻는다 바다에 묻은 푸르고 깊은 그리움 숨비소리로 뱉어내던 쉰 목소리 그것이 한 편의 시였다 해녀는 천길 바다의 시를 다시 바다에 묻는다. 풍경소리 시끄럽다고 바람 부는 날에는 떼어 놓으라는 입이 큰 옆집 여자 하늘붕어는 바람 부는 날에나 제 목숨꽃을 피우는데 바람호수가 없으면 붕어는 어디서 사나 죽은 붕어는 시가 아니다. 새벽 세 시 발가벗은 영혼이 나를 만나 말을 타고 천리를 달리면 금빛 현란한 언어의 사원에 닿을까 풀어진 마음을 매어 하늘과 땅을 잇는 시간 풍경소리 푸르게 울리는 곳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에 사금을 녹여 관을 만든다 법당 안 가장 낮은 자리에 놓고 석달 열흘 목탁소리로 다듬으면 가는 현의 찬란한 울림의 시 한 편이 관 속에 놓일까 바람 가는 길을 따라 무작정 가고 있다. 눈을 잔뜩 뒤집어쓴 오후 산이 저물 대로 저물어서 어스름 속으로 절름절름 지고 있다 어디선가 눈 속에서 새 한 마리 울고 있다 시 한 마리 따라 울고 있다. 죽은 나무에는 죽어도 새가 깃들지 않는다 둥지를 틀 마음도 없다 보금자리 치는 사랑도 없다 집이란 그늘이 깃들지 않는 곳 그늘이 짙으면 풀이 나지 않는다 시도 싹을 틔우지 않는다. 시 한 편을 가지고 시집에 넣기 전 마지막으로 손을 본다 손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파여 있는 굽은 길이 보인다 손금이다 마지막 퇴고의 길에서도 부끄러워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망설인다 시집에 넣고 나서 또 고칠 것이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서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서 잘 죽기 위해서 시를 쓰는 일이란 다짐을 다시 한 번 다져 본다. 하늘 한복판을 조금 지난 곳 달이 보름보름 부풀고 있다 꽃반지 낀 사내가 마른 풀밭에 누워 있다 침묵이다 왜 침묵이 금인가 말 없음 속에 말이 뛰어 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을 잡아타고 천리를 달려라 온몸이 이슬에 젖을 때까지. 인수봉이 저기 있다 저 잘난 사내 밤낮없이 백운 만경을 거느리고 당당하기 그지없는 아무리 유혹해도 다가서지 않는 안타까운 계집처럼, 저 사내 품안에 넣고도 속수무책, 대책이 없다 요지부동이다 아무리 진달래가 꽃불을 놓아도 아무리 소리쳐도 들은 척 만 척 눈이 내려야 가끔 흰 모자를 쓰는 의연한 기상으로 하루살이 떼 같은 군상을 내려다본다 허상이다 나의 시가 늘 그렇다. 너를 한 번도 잊은 적 없다 해가 지고 밤이 와 어두워지면 칠흑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 속에서도 너를 잊은 적 없다 너도 내가 보고 싶은 때가 있느냐 내 마음을 다 모아 불을 밝혀도 그리움은 그리움대로 두고 어딘가로 스친 듯 하루가 진다 쓰지 못한 시가 노을 따라 지고 있다. 꽃 속의 궁전은 황홀하나 허망하게 무너진다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궁전을 짓는 부산한 역사 도끼질 톱질 대패질 망치질소리 향기에 취하는 것은 찰나 깨고 나면 허무의 푸른 지옥 피어날 때야 영원할 것 같지만 며칠이나 붉겠느냐 이내 꽃이 진 자리 찬바람 불다 가고 자궁 속에서 아기가 놀듯 나무 속에서 봄이 노는 소리 들린다 다시 붓을 들어라. 먹어야 산다고 아무것이나 먹기만 해서야 쓰겠는가 화려한 재료에 인공 조미료 듬뿍 쏟아붓고 지지고 볶고 튀기고 굽고 끓이고 삶아 익힌 것이 아니라 날 냄새나는 날것을 요리하라 천연 조미료로 맛을 낸 날것으로 시탁詩卓을 꾸며라 신선한 안주 옆에 맑은 술도 한 주전자 놓여 있기를! 그래야 자연을 만날 수 있다 자연 속으로 들어가라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가 되라 우주의 자궁은 늘 열려 있다 냉수로 눈을 씻고 마음을 헹구고 손을 모아라 새벽 세 시 우주와 독대하라. 시인은 감투도 명예도 아니다 상을 타기 위해, 시비를 세우기 위해, 동분하고 서주할 일인가 그 시간과 수고를 시 쓰는 일에 투자하라 그것이 시인에겐 소득이요, 독자에겐 기쁨이다 오로지 올곧은 선비의 양심과 정신이 필요할 따름이다 변두리 시인이면 어떻고 아웃사이더면 어떤가 목숨이 내 것이듯 시도 갈 때는 다 놓고 갈 것이니 누굴 위해 쓰는 것은 아니다 시詩는 시적是的인 것임을 시인詩人으로서 시인是認한다 생전에 상을 받을 일도, 살아서 시비를 세울 일도 없다 상賞으로 상傷을 당할 일도 아니고 시비詩碑로 시비是非에 휘말리고 싶지도 않다 시인은 새벽 한 대접의 냉수로 충분한 대접을 받는다 시는 시로서, 시인은 시인으로서 존재하면 된다 그것이 시인이 받을 보상이다. 여시아문如是我聞!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