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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천넷통 원문보기 글쓴이: 박경숙
사람이란 무엇인가?
송 기득 <신학비평 주간>
“사람이란 무엇인가?” 내게 맡겨진 강의주제이다. 이 주제는 엄밀히 말해서 올바른 물음이 될 수 없다. 사람은‘무엇인가?’고 물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차라리 “사람은 누구냐?”,“누가 사람이냐?”고 묻는 것이 훨씬 낫다. 그리고 우리말에‘사람’이란 말이 있다는 것은 경이롭다. 영어에는‘사람’이란 말이 없다. 흔히 ‘Man’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남성을 가리킨다. 여성해방론자들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human being’이라고 하는 모양인데,‘human’이란 말에도‘man'이란 말이 들어가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에게는 모든 사람을 아우를 수 있는 말이 있다. 그것이 곧 사람이다. 사람이란 말은 남녀의 차별도, 빈부의 귀천도, 계층의 차이도, 시골 사람과 도시사람의 구별도, 믿음살이의 유무도 모두 아우르는 보통명사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겨레는 근원적으로 휴머니즘의 전통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하기야 홍익인간(弘益人間)의 민족이념이 그렇고, 사인여사천(事人如事天)이 그렇다. 사람이란 말이 있다는 사실, 아주 대견하고 경이롭고 자랑스럽다. 하늘의 하이심(役事)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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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사람’이다. 지금 여기에 있는 현존(現存)의 자리에서‘사람이란 무엇인가’고 묻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사람을 보는 이른바 인간관에 따라, 그 대답은 여러 가지로 갈릴 것이다. 그 대답이 모두 사람의 정체를 어느 정도 드러낸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정답’일 수가 없다. 사람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정의를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물음은 처음부터 문제를 안고 있다. 그래서 굳이 사람에 관한 정의를 내리려면, “사람은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본디 형식논리학에서는 “동어반복은 정의가 아니다”는 규정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한다. 동어반복(同語反覆) 이상 훌륭한 정의가 띠로 있을까? 성철은 마침내“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는 오도송을 남겼다. 우리가“진리란 무엇인가?”고 물을 적에,“진리는 진리이다”고 대답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대답이다. 진리를 아무리 잘 말해봤자, 그것이 곧 ‘[진짜] 진리’라는 보장이 없다. 진리는 그 반대도 진리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사람이 무엇인가?”에 대한 확실한 정의는“사람은 사람이다.”는 명제로 나타낼 수 있을 뿐이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에도 “나는 나다.”라는 대답이 최상이다. 이때 우리는 “나는 나다.”라는 대답을 깊이 새겨보아야 한다. 우리가 “나는 나다.”고 생각할 때,“정말 나는 나인가?”의 반문이 따를 것이다.‘나’가 나를 성찰하는, 아니 성찰해야 할 화두로 길이 남을 만큼, 그 물음은 우리가 사는 동안 끊임없이 하나의 도전으로 다가 올 것이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람이란 무엇인가?”, “나란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묻는다. 사람은 자신을 물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에 사람다운 의의가 있다. 사람은 자기를 묻는 존재이다. 자신을 묻지 않는 사람,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를‘사람’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요즈음에는 사람을 묻지 않으려는 경향이 짙다. 특히 그렇지 않아야 할 젊은이들에서 꽤나 많이 보는 편이다. 불행한 일이다. 그들은 기백과 열정이 없는‘늙은 젊은이’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은 물음의 존재이다.‘묻는다는 것’은 사람을 결정하는 잣대이다. “나는 묻는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것이 내 인간관의 기본명제이다. 도대체 사람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는 사람, 사르트르는 그런 사람을 ‘속물’이라고 했다.
우리가 사람을 물을 적에, 그건 단순히‘머리’로만 묻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묻는 것은 머리와 가슴, 손과 발 할 것 없이‘온몸으로’묻는 전인적 행동이다.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물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알게 모르게, 자기를 묻고 있다. 그러나 사람이란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사람이란 쉽게 자신을 내주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이 무엇이냐”에 대한 물음은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사람이란 존재는 어째서 자신을 묻는 것인가?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말에‘생각’이란 말이 있다는 것은 다행이다. 이 점에서도 우리는, 우리 겨레에도 사상하는 전통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생각이란 말은 한자로 표기할 수 없다. 그래서‘生覺’이라고 쓰는 것은 잘못이다. 생각은 단순히 지성의 기능만이 아니다. 의식의 기능이 그 핵심이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은 단순히 지능에 있지 않고 자의식에 있다. 원숭이나 돌고래 따위에도 지능은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자의식이 없다. 돼지는 섹스피어의 햄릿처럼, “살아야 할 것인가?, 죽어야 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이다.”고 고백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자의식이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사람을 호모사피엔스(이성인)라고 했을 때 그 핵심은 단순히‘이성’에 있지 않고‘자의식’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자의식이 없는 사람을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다. 사람의 존재성은 자의식이 담보한다.
나는 지지난 주 『인간극장』이란 프로그램에서 보았다. 쉰이 넘은 아들이 여든이 넘은 어머니에게 걷기운동을 시키느라고 비탈길을 이끌고 올라갔다. 어머니는 몸 한편이 망가진 치매환우였다. 세 발자국쯤 걷다가 할머니는 주저앉았다. 그러기를 반복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짜증을 냈다.“나도 사람이다.”고 하면서 아들을 몰아세웠다. 어째서 사람을 학대하느냐는 것이리라. 아들이 물었다.“나는 누구예요?” 할머니가 대답했다.“너도 사람이지.”평소에 부른 대로‘아들’이라고 하지 않고‘사람’이라고 말한 것이다. 나는 감동한 나머지 코끝이 찡했다. 할머니는 비록 치매에 걸렸지만, 아직도 ‘사람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사람이라는 의식을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이 허다한데, ‘사람의식’에는 치매와 정상의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사람의식을 잃어버린 정상인이 진짜 치매환우가 아닐까 생각해본다.‘사람의식’, ‘자의식’을 잃어버린 상태, 그게 진짜 인간치매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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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사람 자신을 묻는 주체의 존재라고 했는데, 정말 사람은 물을 수 있는 대상일까? 사람은 대상화할 수 없는 존재이다. 사람을 대상화하면, 그땐 이미 사람이 아니고 ‘그것’(사물)이 된다. 사람은 물화(物化)할 수 없다. 최근에 나는 놀라운 사실을 보았다. 모든 물건을 삼인칭으로 부르지 않고 이인칭으로 부른 것이다. 물건을 가리켜‘이것저것’이라 부르지 않고,‘이애 저애’라고 불렀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이젠 사물을 인격화하고 있구나 생각했다. 이것은 고무적이다.‘그것’을‘너’로 격상시키는 데서 나는 사람과 자연은 하나라는 생명관계를 엿볼 수 있었다.‘인간의 자연화’이고,‘자연의 인간화’이다. 모든 존재는‘관계의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이어서 사람의 존재와 다르다. 물체는 거의 일정한 존재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사람은 확고부동한 존재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사람은 일정한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고, 언제나 열려진 가능성으로 실존한다. 사람은 고정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자유로운 선택에 따른 새로운 자기창조의 존재이다. 그것을 ‘실존’이라고 한다. 사람은 다 되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되면서 사는 존재이다. 이런 뜻에서 사람이란 존재는 엄밀하게 말하면, 단순히‘사람’이 아니고‘사람됨’의 존재, 곧 사람이 되어가는 존재이다. 그래서 사람은 된 만큼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고대철학의 말을 빌리면, 사람은‘있음’(存在)이 아니고 ‘되어감’(生成과 變化)이다.
사람은 처음부터 확정지을 수 없는 존재이다. 니체는 말했다.“사람은 아직도 확정되지 못한 존재이다.”그렇다면 사람은 언제인가는 확정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아직도’가 아니라‘언제까지나’사람은 미완성으로 끝날 것이다. 어째서일까? “사람은 측정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그리고“열려 있는 문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철학자 플레스너(Plessner)의 말이다.
그래서 사람은 대상화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사람을 대상화하면 이미‘살아 있는’사람이 아니고,‘죽은’사람이 된다. 그때 사람은 해부학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기에 사람은 주관과 객관의 일치라는 주객인식이원론의 구조로써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사람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적에, 사람을 대상화해놓고 물어서는 안 된다. 굳이 사람을 대상화한다면,‘사람은 물음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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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사람을 어떻게 물어야 할까? 사람의 정체를 다루는 학문을‘인간학’또는‘인간론’또는‘인간관’따위로 부른다. 사람은 학(學)이나 론(論)의 대상은 아니므로, 나는 차라리 인간관(人間觀)이라고 부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사람이란 깊이 꿰뚫어 보았을 적에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보는 것만으로는 넉넉지 않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묻는다.’는 말을 쓴다. 굳이 대상이라면, 사람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고 물음의 대상이다.
철학적 인간관에서는 사람을 묻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사람 밖에서 사람을 묻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 안에서 사람을 묻는 길이다. 사람 밖에서 묻는 길에는 1. 동물의 자리에서 2. 종족[민족]의 자리에서 그리고 3. 신의 자리에서 묻는 것이 보통이다.
1. 동물의 자리에서 사람을 묻는 까닭은 동물이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데 있다. 사람은 동물에게서 문화를 배웠다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사람을 동물과 동등한 존재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인도사상에 따르면, 사람과 동물 사이에는 거리낌 없는 윤회가 이루어진다. 불교의 윤회사상은 진정 모든 존재는 평등하다는 원리가 된다. 사람이 내세에서는 소로 태어날 수 있고, 소는 내세에서는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다. 사람과 소는 서로 넘나드는 존재가 된다. 미개인들의 토템사상에서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동물과‘동족관계’에 있다고 본다.
사람은 생물학적으로 보면 분명히 동물이다. 밥 먹고 통 싸는 존재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을 동물보다 못한 존재라고 생각할 경우가 있다. 망나니를 보면,“짐승만도 못하다.”고 혹평을 한다.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30대 적에 10여 년 동안 결핵요양소“한산촌”을 운영하고 있을 때이다. 어느 중증환우가 피를 토하면서 사경을 해매고 있었다. 다른 환우들은 생명의 전선에서 힘겹게 싸우고 있는 그 환우 곁에 모여‘힘내라’고 응원을 하고 있는데, 그 옆방에 있는 어느 젊은 녀석은 기타를 치며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한번은 회진을 하는데, 침대 밑을 보니까 그릇이 소복이 싸여 썩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화가 치밀어 밖으로 나와 그 알루미늄 그릇들을 마당 한 복판에 내동댕이쳤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향해 내동댕이친 것이다. 나는 이러저러한 사건을 겪으면서 내게 붇게 되었다.“사람은 어디까지 사람이고 어디까지 동물인가?”그러면서 대학을 뒤로 하고 요양소 일에 몸을 던진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인가 후회까지 했다. 나는 그때 의미론자였다. 삶보다 의미가 먼저였다. 의미가 없으면 살기가 힘들었다.
하물며 사람을 만들었다는 신은 어떠했을까? 제1성서(구약성서)에는 야훼 신이 사람을 창조한 데 대해서“내가 저 따위 악하고 몹쓸 것들을 왜 만들었을까”하고 심히‘통탄하는’대목이 있다. 사람은 창조주까지 후회하게 만든다. 그러니 그들과 같은 사람인 나도 후회할 정도니,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내가 환우들을 사람으로 대할 수 있을까?”나는 몇 달 뒤에 나름 답을 찾았다.“내가 세운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말자. 사람을 있는 그대로 만나자. 그 사람은 바로 그 사람이 아닌가.”나는 그 뒤부터 환우들을 생긴 그대로 안으려고 하니,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2. 종족[민족]중심의 자리에서는, 사람의 존재를 그의 종족이나 민족에 종속된 데서 확인하려고 한다. 그리고 자기의 종족만이 사람이고, 다른 종족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린파르저는 근대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가리켜“인간주의로부터 국수주의로 넘어가는 야수가 되었다.”고 말했다. 지금 세계는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넘어서려는 추세에 있다. 유럽연합(EU)도 그 시도의 하나이다. 그러나 분단국가인 우리의 경우는 다르다.
내가 교수 시절에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한일민중신학세미나』에 간적이 있다. 세미나가 끝나고 오사카에서 일본인 목사들과 좌담이 있었다.“어째서 일본에서는 우리나라 동포들을 그렇게도 차별하십니까?”내가 물었다. 그러자 일본인 어느 목사가 대답했다.“그것은 우리 민족을 지키자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민족주의를 내세우고 있지 않습니까?”그러자 나는 대답했다.“일본사람들이 내세운 민족주의는‘지배이데올로기’이지만, 우리가 내세운 민족주의는 민족통일을 위한 ‘해방이데올로기’입니다.” 예수시대의 유대인들은 유대민족만이 신의 선민(選民)이고, 다른 민족이나 부족, 특히 사마리아 사람들은 사람으로 치지 않았다. 예수는 그런 관념을 깨버렸다.
그러나 사람은 어느 존족이나 민족에 속하기 전에 하나의 사람이다. 시인 휠더린은 다음과 같이 읊었다. 오늘의 휴머니즘은 여기에서 잘 나타난다.
그대는 수공업자는 보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보지 못하고
사상가는 보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보지 못하네.
그대는 성직자는 보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보지 못하고
주인과 종, 젊은이와 늙은이를 보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보지 못하네.
3. 문제는‘신의 자리에서’사람을 보려는 길(방법)이다. 이것은 신화시대의 산물이지만, 그 핵심은‘사람은 신이 만들었다’는 데 있다. 그러기에 사람은 신의 창조본성을 좇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의 뜻을 따르는 것이고, 신을 닮는 것이고, 신이 온전한 것 같이 사람도 온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주장이 이를 대표한다. 그런데 사람은 신을 닮을 수 없고, 신처럼 온전할 수가 없고, 신의 뜻을 제대로 따를 수 없다. 도대체 신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사람이 유한한 존재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은 사람을 유한한 존재로 만들어 놓고, 어찌 완전한 존재가 되라고 하는 것일까? 그리고 신은 전지전능하고 사랑이 넘치는데, 어찌 사람이 천재지변(天災地變)과 같은 엄청난 고난을 겪어야 하는가? 태풍으로, 해일로, 지진으로, 핵물질(核物質) 따위로 수천수만의 생명을 앗아가게 하는가? 그리고 독재자의 탄압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했는가? 그것은 사람의 죗값으로 하여 신이 내리는 형벌이라고 풀이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런 잔혹한 신이 어디 있는가? 그래도 신은 사람을 구원할 길을 여러 가지로 열어놓았다 하는가? 신이 사람이 되어 사람 대신 속죄물이 되었다는 대속론 말인가? 꼭 피를 보고야 구원의 길을 열었어야 했는가? 그것은 피에 굶주린 신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평가를 면치 못한다. 에른스트 불로흐는 신을“피에 굶주린 신”이라고 혹평했다.
신을 잘 섬기면 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화[벌]을 받는다고 한다. 신을 잘 섬기는 민족은 번창하고, 신에게 반역하는 민족은 파멸을 당한다고 한다. 그 따위 신은 편협하고 부조리하다. 그것은 신의 공평과 사랑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그래서 신은 끝내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 신학에서조차 나치가 저지른‘아우쉬비츠’(유대인 학살사건)이래 신학은 가능한가고 물었다.‘신의 죽음의 신학’이 나타난 것은 그 때문이다. 신은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죽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 신은 재해석 되어야 한다는 것이리라.
무신론적 철학자 포이에르바하는 신은 인간의 피조물이라고 했다.“신은 인간성의 객관적 투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신을 예배하는 것은 곧 사람을 예배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은 인간학이다.”고 단정했다. 이와는 다른 의미로, 신학자 불트만은“신을 말하는 것은 곧 사람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면서,“신학은 인간학이다”고 선언했다. 결국 신은 사람과 세계를 말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서,‘작업가설’의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신을 지배이데올로기로 삼아서 사람을 억누르고 못살게 구는 지배수단으로 악용한다는 데 있다. 이런 신은 새로운 신의 탄생을 위해서 죽어야 하는 것이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한 것은 그 때문이다. 사르트르와 같은 무신론적인 인간주의자들은 신의 있고 없음에 관심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을 억압하는 구속하는 신일 때, 그런 신은 사정없이 거부하는 것이다. 신의 자리에서 사람을 묻는다는 것은 사람을 비판하는 거점, [이것을 신학에서는 사람의‘바깥점’(外點)이라고 하는데,] 이 경우를 빼고는, 사람을 묻는 길로서는 적합하지 않다. 그럴 경우 신은 오히려 사람을 사람으로 홀로 서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이 된다.
5.
다음으로 사람을 사람 안에서 묻는 길이 있다. 여기에는 주로 세 가지 관점이 있다.
첫째로, 사람은 나면서부터 ‘본질’을 지니고 있어서 그 본질을 실현해가는 과정과 목표가 사람의 삶을 이룬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것을‘본질론적 관점’이라고 일컫는다. 사람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답하려면 먼저 사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사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면 사람의 본질을 따로 물을 필요가 없다.‘무엇인가’고 묻는 것은 본질을 묻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람의 본질을 알고 싶어 한다. 문제는 본질을 통한 사람인식이 정당한가에 있다. 사람에게는 정말 본질이 있는 것인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대체로 본질이란 말은 “그것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그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바로 그것”을 뜻한다.(아리스토텔레스) “사물의 본바탕이 되는 근본적인 요소”정도의 뜻을 가진다. 흔히 사람의 본바탕은 이성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가리켜‘이성인’(호모사피엔스, homo sapiens)라고 부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람은 이성을 가졌기 때문에, 우주의 원리를 파악하고, 자기를 인식하고,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성주의는 현대에 이르러서도 그 특징을 잃지 않고 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비판철학』에서는, 오늘의 비인간적인 세계는 이성이 그 비판기능을 잃어버리는, 이른바‘이성의 부식화’(腐蝕化)로 하여 나타난 현상이므로, 사람다운 세계는 이성이 그것의 비판기능을 회복하는 데서 가능하다고 진단했다. 이것을 호르크하이머는‘이성의 복권’(復權)이라고 불렀다. 사람에게 있어서 이성은 아직도 그 중요성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이성만의 존재인가? 그렇지 않다. 사람은 느끼고 의욕하고 행동하는 존재이다. 괴테의 말마따나, “이성이라고 하는 자그마한 방파제는 한번 정열의 물결이 일기 시작하면 쉽게 무너진다. 냉철한 이성인의 핏줄 속에는 차가운 물이 흐르고 있지만, 살아 있는 행동인의 핏줄 속에는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다.” 그래서 사람을 ‘행동인’(homo faber)이라고 부른다. 사람의 위대함은 생각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창조하는데 있다.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에 따르면, “생각하는 것은 행동의 한 기능에 지나지 않다. 사람은 본디 행동하기 위해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성은 행동의 틀 속에서 빚어진다.”지금은‘정통’(正統, Orthodoxy)의 시대가 아니라, ‘정행’(正行, Orthopraxis)의 시대라고 한다. 이론(Theoria)보다 행동(Praxis)이 우선이다. 이론은 행동의 검증을 거처야 비로소 진리가 된다.
사람의 삶에서 이성은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사람의 충동이나 감정이나 의욕이나 욕망은 이성의 제재를 받기도 한다. 이것은 이성이 감정이나 의지와 상호의존적이라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이성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사람의 욕망은 가치중립적이어서 그 자체가 좋고 나쁘고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욕망은 삶의 원동력이다. 욕망이 없이는 사람은 살 수가 없다. 이성은 다만 사람의 욕망을,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는 대로 이끌어가야 한다. 나는 이것을 ‘욕망의 인간화’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성의 의식 활동은 이미 무의식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이것은 이성이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타율적이라는 것을 실증한다. 그런데 무의식의 심층은 삶의 실재와 직결되어 있다. 삶의 생동성은 무의식의‘깊이’에서 뛰어나온다. 무의식은 삶의 창조적인 원동력이다. 쇼펜하우어의‘맹목적 의지’나, 니체의 ‘힘에의 의지’나, 마르크스의‘소유에의 의지’나, 프로이트의‘리비도’(성적 에네르기)나, 베르그송의‘엘랑비탈’(생명의 약진) 따위는 모두 그것의 표현이다.
그런데 이성의 결정적인 문제점은 사람의 삶을 인식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이성은 사람을 인식할 수 있는 범주와 도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만일 이성이 사람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려면, 그것의 범주와 도식을 바꿔야 하는데, 그 때 이성은 이미 이성이 아니게 된다. 베르그송이 이성 대신에‘직관’을 말하고, 딜타이가‘경험’을 말하고, 하이데거가 ‘이해’를 내세운 것은 모두 그 때문이다. 이것은 이성이 사람의 한 부분을 가리키는 것일 뿐, 사람을 ‘온통으로’말할 수 없다는 한계를 드러낸다. 현대에 이르러 “이성의 사람은 이제 해체되었다.”는 이른바‘인간해체론’이 나온 것은 그 때문이다.
둘째로, 사람을 보는 데는 실존주의적인 관점이 있다. 실존주의철학이 이를 대표한다. 실존철학에 따르면 사람의 존재는‘실존’이다. 실존이란 말은‘지금-여기’에 있는 현실의 존재를 가리킨다. 그래서 현존(現存)이라고 한다. 실존이란 말은 본디 라틴어 existentia에서 유래했는데, existentia는 ex(밖에)와 sistere(선다)의 합성어로서, 그것은 ‘나섬의 존재’를 가리킨다. 나섬의 존재란 새로운 자기를 만들어가기 위해서 자신을 미래의 가능성을 향해 끊임없이 내던져가는 존재방식을 뜻한다. 따라서 실존론적 인간이해에서는 사람의 삶이란 자신의 본질을 실현하는 과정이 아니고, 새로운 자기를 창조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에게 보편적인 본질이라고 여기는‘인간성’따위가 처음부터 타고 났다는 것을 거부한다. 인간성이라는 것도 사람의 자기창조의 소산이다. 사르트르의 말마따나“실존은 본질에 앞선다.”이 명제는“사람은 주체성으로부터 출발한다.”는 뜻을 함유하고 있다. 사르트르는 말한다.“‘나는 나다’고 외친 사람은 이미 그의 구원을 그 손아귀에 쥐고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선언했다.“주체성이 진리이다.”내가 20대 때 두해 반 동안 폐결핵으로 죽을 번 하다가 살아나서 맨 먼저 외친 소리가 있다.“나는 나다. 내 대신 그 누구도 나를 살아주지 않는다. 내가 나를 산다.”
예수도 선언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지 않고, 인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 “사람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이것을 우리는 예수의 인간선언, 또는 인권선언이라고 부른다. ‘안식일’이라고 한 것은 안식법 대신에 경제. 정치, 종교 따위 그밖에 무든 것을 상징한다. 민일 안식일을 ‘하느님’으로 대치한다면, “사람은 하느님을 위해서 있지 않고, 하느님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 “사람은 하느님의 주인이다.”고 말 할 수 있다. 이것은 신성모독이인가? 우리에게는 “하느님. 내가 당신의 주인입니다.” 하고 한번 큰소리칠 수 있는 뱃장이 있어야 한다. 예수도 십자가에 처형되었을 때, “하느님, 어째서 나를 버렸습니까.” 하고 울부짖으며 죽어갔다고 하지 않는가? 이 말이 사실이라면, 예수는 신에게 버림을 받았고, 신으로부터 퇴출을 당했고, 마침내 신과의 단절을 경험했을 터이다. 그에게는 신이 없었음에 틀림없다. 하물며, 가톨릭에서는 사제를 ‘신부’(神父, Father of God) 곧 ‘하느님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사람이 ‘신의 아버지’란다. 이건 놀라운 역설이다. “하느님의 아버지이다.”고 하는 것은 너무한 짓이고, 차라리 “나는 신이다.”라고 하는 것이 차라리 애교스럽다. 히브리종족의 해방자 모세가, 이집트의 노예살이를 하고 있는 동족을 구하라는 신의 지시를 받고, “도대체 당신은 누구시오?”고 물었을 적에, 야훼 신은 대답했다. “나는 나다.” (I am who I am.). 여기에서 Be동사는 하부리말 Haya 동사의 번역인데, Haya 동사에는 ‘Become’과 ‘Act’라는 뜻이 있다. 그런데 그 글의 앞뒤관계로 보아 ‘Act’ 로 옮기는 것이 좋다. 여기에서 Act는 ‘하게 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독일어의 Wirchen이라는 말이 훨씬 더 가깝다. 그러니까 모세의 하느님은 모세로 하여금 히부리종족을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시키게 하는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이런 뜻에서 “나는 나다.”고 외쳐볼 수 있는 배짱을 가져본 것은 어떨까.
북녘의 주체사상을 한 마디로 묶으면, “사람은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로 표현할 수 있다. 모든 것에는 ‘하느님’도 포함된다. 주체사상은, 신을 빼고는 예수의 인간선언과 상통한다. 예수는 신과의 단절을 호소하면서도 신은 끝내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스스로 고뇌하고 결단하고 선택하고 책임지는 주체의 존재이다.
유대교의 랍비가 죽어서 하느님에게 갔다.“하느님, 나는 우리 민족의 해방자 모세처럼 살지도 못했고, 우리민족의 예언자 엘리야처럼 살지 못했습니다. 용서하시기 바랍니다.”하느님이 대답했다.“너는 모세처럼 살지 못하고, 엘리야처럼 살지 못한 것이 잘못이 아니라, 너 자신을 살지 못한 것이 잘못이다.”‘나’(주체)를 살라는 부버의 이야기다.
실존주의의 사람이해는 저절로 사람본질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신을 거부한다.“만일 신이 없다면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텐데. 그런데 신은 없다. 그러기에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명제가 가능하다. 사르트르의 논리이다. 유신론적 실존주의자 키에르케고르도“사람은 실존에서 출발한다.”고 말한다. 사람의 존재방식인‘실존’을 말하는데 신의 있고 없음은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셋째로, 사화학적, 역사학적 관점이 있다. 사람은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 있는 존재이다. 이런 뜻에서 보면 사람을 인간(人間)이란 말로 나타내는 것이 좋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한자말을 쓰지 않으려고 하는데,‘인간’이란 말은‘사람’을 나타내는 데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사람은‘홀로’사는 존재가 아니라,‘함께’사는 존재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관계의 존재이다. 사람은‘사이의 존재’이다.‘나’없이‘너’없고,‘너’없이‘나’없다. 나와 너는‘우리’를 이룰 때 나도 살고 너도 산다. 불교에서 즐겨 쓰는 말로 나타내면, 나와 너는 불일불이(不一不異)의 관계에 있는 존재이다. 사람이 함께 살아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사람을 관계의 존재라고 할 때, 서로 사람으로 받들고 섬기면서 가진 것을 함께 나누는‘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민중신학’에서는 이것을‘밥상공동체’라고 일컫는다. 주체와 주체의 만남,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야 말로 사람으로서 가장 바람직한 만남이다.‘나’와‘그것’의 만남은 참 만남이 아니다.‘나’와‘너’의 만남이 참 만남이다. 그런데‘너’와 ‘그것’은
언제나 서로 넘나든다. 오늘의‘너’가 내일은‘그것’이 되기도 한다. ‘나와 너’, ‘나-너’, 그것을 부버(M. Buber)는 인간의 근원어(根源語)라고 했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의 진정한 만남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나가 만나는 처음 상대는 흔히‘그것’으로 대한다.‘그것’에 대한 나의 의식은 상대를 지배하려든다. 사람들은 처음 만났을 적에는 서로 상대를 자기 눈 안에 집어넣으려는 눈싸움으로 시작한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내게 만일 지옥이 있다면, 그것은 상대방의‘눈초리’이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사르트르의 유아론(唯我論, Solipsism)이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오직 나만이”가 아니라‘나-중심으로’라는 뜻이다. 나없는 너가 가능할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사르트르의‘나-중심성’에 동의한다. 나-중심성을 긍정적으로 이해한다면,‘나의 깊이’에서‘너’를 만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나에 대한 성실성이 곧‘너’를 가능하게 한다. 참으로 나’를 사는 사람은‘동시’에‘너’를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너를 사랑한다고 할 적에, 그것은 단순히 너를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을 받지 않고도 살 수 있지만, 사랑하지 않고는 살기 어렵다. 이것은 단순히‘자기사랑’(Self-love)의 차원을 넘어선다. 우리가 에고이즘(Egoism, 이기주의)과 에고티즘(Egotism, 자기중심주의)을 구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사람은 사회와 역사 안의 존재이므로, 사회가 악의 구조로 짜여 있거나, 독재지배권력의 횡포가 사람을 억누르고 짓밟을 적에, 사람들은 가만히 있지 않고 그 비인간화현상에 맞서 들고 일어난다. ‘사람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다. 여기에는 저절로 사회개혁이나 역사의 변혁이 따르게 마련이다. 사회개혁과 역사변혁에 참여하는 것, 그것은 사람답게 살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이 해야 할 당연한 사명이다. 여기에서 사람은 어떤 존재로 나서야 할까? 그것은 ‘반항인’이다. 그래서 프랑스 행동주의 작가 까뮈는 사람의 본질을‘반항’에 두었다. 그는『반항인』이라는 책 서문에서“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선언했다. 사람의 존재의의가‘반항’에 있다는 것이다. 함 석헌은 말했다.“맨 처음에 대듦(저항)이 있었다.”사람의 존재의의를‘대듦’(저항)에서 찾았다. 불의와 부정에, 독재권력과 경제착취에, 반통일의 수구세력에 대들 줄 모르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넷째로, ‘놀이’에서 사람의 본질을 보려는 철학자도 있다. 네덜란드의 철학자 호이징거(Huizinger)는 사람을‘호모 루덴스’(homo rudens) 곧 ‘놀이하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사람의 바탕은‘놀이’에 있다는 것이다. 일(노동)이 사람의 본질이 아니고, 놀이가 사람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거저 노는 것이 놀이가 아니다. 일하는 것도 놀이의 하나이다. 일은 놀이로서 해야 한다. 강제노동 따위는 결코 놀이가 아니다.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은 노동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놀이로서 노동하는 자리이다. 모든 경제적인 착취나 문화적인 소외는 사람을 노동의 노예로 보고, 놀이의 사람으로 보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그래서 자본주의체재에서는 사람은 끝내‘노동의 노예’로 살고,‘놀이의 사람’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호이징거의‘놀이’는‘노닐음’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자의‘소요유’(逍遙遊)가 그것이 아닐까? 나는 그것을‘하느님과의 노닐음’이라고 부른다. 신과 함께‘노는 것’, 그것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즉물적으로 만나는 것이다. 씀바귀는 쓴 그대로 먹는다. 그렇지 않으면 씀바귀만이 지닌 쓴맛을 만날 수 없다. 식당에서 밥상을 치우는 것도, 하느님과 함께 노니는 일이다. 남편이 먼저 아내에게 온 마음으로 큰 절을 올린다든지 하는 것도 하느님고가 함께 노니는 일이다, 폐허 속에서도 사자의 꿈을 꾸는 것, 파멸을 당해도 패배를 모르는 자리, 한 없이 자유스러운 경지, 그것이 하느님과 함께 노니는 삶이다.‘생천주’(生天主)는‘유천주’(遊天主)까지 가야한다.
그런데 결국 하느님과 함께 노니는 일은 사람과 함께 노니는 일이다. 사람과 함께 노닌다는 것, 그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사람과 함께 노닐려고 애쓰고 있다. 아무런 평가 없이 사람을 있는 그대로 만나는 것이다. 사람은‘사람답기’이전에 먼저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주에 아파트로 들어가는 모서리에 차를 세워 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를 만났다.“여보시오. 길을 막고 있어서 아파트로 들어가는데 방해가 됩니다. 다른 데다 세우는 게 좋지 않겠소.” 내가 타이르자, 바락 화를 내면서 쏘아 붙였다.“저리 돌아가면 될 것이 아니오.”길을 막아놓고 돌아가란다. 순간 나는 저 사람도 사람인가 싶었다. 사람은 분명히 사람인데,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드린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그래도 역시 사람은 사람다워야지.”중얼거리면서, 나는 예수처럼 사람을 있는 그대로 맞이하기란 불가능하겠구나 싶었다. 사람은‘사람다워야 사람인가?’,‘사람이니까 사람인가?’나는 아직도 두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아마도 나는‘사람다운 사람’의 벗은 될 수 있어도, 예수처럼‘사람의 벗’,‘죄인의 벗’은 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지금 사람을 있는 그대로 대하는데 많이 익숙해졌다. 얼마만큼 나이 값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6
우리는 지금껏 “사람이란 무엇인가?”에 관해서 가장 기초적인 것을 다루었다. 끝으로 나는 사람과 삶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사람의 존재는 산다는 데 그 핵심이 있다. 사람은 곧 삶이다. 사람과 삶은 같은 뜻의 말(동의어)이다. 국어학적인 근거는 없지만,‘사람’을 줄이면‘삶’이 된다. 그래서 “사람은 삶으로 푼다.”고 말할 수 있다. 삶을 떠나서는 사람을 물을 수 없다.
사람이란 무엇인가의 물음은 삶이 무엇인가를 말하면 된다. 삶이란 무엇인가? 정말 살고 있는 사람은 삶이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그런 경지에 가 있지 못하다. 그래서 사람은 삶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하는 것이다. 삶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 자체가 삶이다.
나는“사람을 묻는 길”에서 이미 삶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다. 사람의 본질실현의 과정이든, 사람의 새로운 자기창조의 과정이든, 사회-역사의 개혁과 변혁에 참여하든, 삶은 나름 특징을 지닌다. 삶이 사람의 본질실현이든, 사람의 새로운 자기창조이든, 사회와 역사의 변혁에 대한 참여이든, 삶은 마침내‘인간화’를 지향한다. 그래서 나는 삶이란 ‘인간화의 실현’이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사람으로 살자.’는 것이고,‘사람답게 살자’는 것이다. 사람다운 세상을 펼치자는 것이다.『매혹된 영혼』을 쓴 프랑스 작가 로망롤랑은 이런 말을 남겼다.
“가라, 수난하라, 그리고 죽어라.
[그러나] 될 것이 되라. 하나의 사람이.”
Go, Suffer, and Die. What you must be ㅡ A Man.
나는 사람이 되는 삶의 기본자세는 성실함과 진실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정치를 하든, 장사를 하든, 가르치든 배우든, 노동을 하든, 농사를 짓든, 고기를 잡든, 성직자의 일을 하든, 시민단체에서 일하든, 교수 노릇을 하든,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은 사람을 산다. 일하는 것으로 사람을 차별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삶에는 귀천이 없다. 사람이 무엇을 하든, 어떻게 살든, 살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경이롭고 황홀하고 고귀하다. 아니 지금 내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운 기적이다. 기적이란 따로 없다.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사실, 내가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 내가 밥을 목으로 넘길 수 있다는 사실, 아니 사는 것 자체가 모두 기적이다.
나는 광주 제중병원 뜰에서 처음으로 기적을 체험했다. 오랫동안 병상에 누어서 지냈는데, 몸의 열이 여섯 달 만에 겨우 38도로 떨어졌다. 걸음을 익히려고 두 사람의 부축을 받아, 병실 밖으로 나와 병원 뜰에 앉아 들판을 바라보게 되었다. 농부 두 사람이 논두렁을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사람이 어떻게 걸을 수가 있을까? 사람이 걷는다는 것, 저게 바로 기적이다.” 너무나 신기하고 경이로운 나머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기적이란 따로 없다. 음식을 목으로 넘길 수 있다는 것,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따위 삶 전체가 기적이 아닌 것이 없다. 성서에서 예수가 병을 고친 일을 두고,‘기적’(miracle)이라는 말 대신에‘표적’(sign)이라고 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성서에는 예수가 한센병환우를 고친 이야기가 네 곳이나 있다. 예수는 병을 고쳐준 다음에 “당신의 몸을 사제에게 보이시오”하고 말한다. 사제가 낫다는 증명서가 있어야 그가 쫓겨난 마을과 집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센병환우에게 가장 절실한 바람은 그가 쫓겨난 동리와 집으로 돌아가서 ‘사람’으로 인정받고 대접받는 일이었다. 당시 한센병환우나 눈먼 사람들은 신의 저주를 받아 병이 걸렸다고 하여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고 ‘죄인’으로 몰았다. 예수가 병을 고쳤다는 성서의 이야기는, 단순히 예수가 초능력을 펼쳐 병을 고쳤다는 기적이야기를 보도하려는 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 ‘난치병 환우’도 사람이다.”, “죄인도 사람이다.”는 사실을 증언하려는 예수의 인간회복운동을 드러내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8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일 말이 있다. 지금 우리에겐 여기에서 강의를 듣고 있다는 사실이 온통의 내 존재이다. 다음에는 그때가 나의 존재의 전부이다. 내가 지금 살고 있다는 사실이 나의 구원이다. 존재가 구원이다. 삶이 구원이다. 다만 우리는 일상을 꼬박꼬박 살아가면 된다. 박 두규 시인의 시구처럼, 땅 속에 있는 지렁이처럼 하루 1m를 기어가더라도 일상을 뚜벅뚜벅 살아가면 된다.
사람은 사는 존재이다. 이왕 사람으로 살 바에야,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질풍노도처럼 생동성이 넘쳐나게 살아야 한다. 삶의 원동력은 힘과 의미다. 의미 없는 힘은 맹목적이고, 힘없는 의미는 공허하다. 다만 사람을 힘차게 살아가는데 우리의 존재의미가 있다. 니체의‘초인’(사나이)처럼 땅(대지)에 충실하며 살아갈 뿐이다. 하느님은 살아 있는 사람의 하느님이다. 진정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죽음이란 없다. 프랑스 작가 앙드레 말로는『왕도(王都)로 가는 길』에서 “죽음이란 없다. 내가 죽을 뿐이다.”고 갈파했다. 그런 사람에게 죽음은 삶의 표현이고 삶의 완성이다.
죽음이 의식의 정지라면 사람은 죽어도 자신의 죽음을 모른다. 의식이 없으니 자기 죽음을 알 길이 없다. 나의 죽음은 남의 기억에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내가 잘 죽는 일은 남에게 잘 죽어 주는 일이다. 남에게 잘 죽어주는 일은 무엇일까? 내가 사람으로서 잘 사는 일이다. 잘 사는 것, 그것이 잘 죽는 길이다. 죽음은 삶의 한 요소이다. 생명을 위협하는 모든 것, 그것은 삶 안에 있는 죽음의 요소이다. 이 죽음의 요소를 잘 극복하는 과정이 다름 아닌 삶이다. 그래서 사람은 사나이처럼 살고, 거인처럼 죽어가야 하는 것이다.“죽음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그리스도교의 터전을 놓은 바을로가 죽음에 대해 승리를 노래한 것이다. 우리는 죽음에게 죽음을 선포하면서, 찬란한 삶을 구가해야 마땅하다.
[지금 내 아내는 삶을 보장받지 못한 채 노인요양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나는 의사에게 부탁했다. “면밀한 진단을 거쳐서 낫고 살 수 없다고 판단되면, 생명의 연장치료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고통 없이 임종을 맞이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내는 이미 죽음을 체념한 한 것 같다. 아내는 가끔 이런 말을 한다.“여보, 낫지 못할 바에야 빨리 죽었으면 좋겠소. 사람은 한번 죽게 마련이 아니겠소. 저는 지금 죽어도 여한은 없습니다.”“나는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여보, 다음에 하늘나라에서 만납시다.”
지금은 요양병원의 휴가를 얻어서, 집에 와 있다. 아내의 생각이 흐려지기 전에 “인생송별회”를 하기 위해서다. 그보다 하루 내내 아내와 함께 지내면서 그를 기쁘게 하고 싶어서다. 그리고 아내가 죽을 준비를 할 기회를 마련해주고 싶은 것이다. 정신이 맑아진 아내가 말했다.“저는 요즈음에 이중고를 겪고 있어요. 음식을 목으로 넘기기 힘든 것이 그 하나요. 곁에서 한 술이라도 더 먹으라고 간곡하게 권하는데, 먹어주지 못해서 괴로운 것이 그 둘째요,”아내는 병원에서 간병사가 어거지로 먹이려고 하니까,“그것은 나의 인권유린이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의 월권이오.”했다는 것이다. 지금 내 아내는 삶의 일선에서 음식을 목에 넘기는 일, 어지러움과 두통, 그리고 온 종일 누어서 지내야 하는 지루함 따위와 힘겹게 싸우고 있다. 고통의 나날이다. 사실 그것은 죽음과의 싸움이다. 그러나 나는 아내에게“죽음이란 없어요. 제가 죽을 뿐이죠.”라는 말을 듣고 싶다. 그러면서 자신의 죽음을 웃으면서 마지하기를 바란다.]
산다는 것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그것과 싸우는 것이다. 삶은 싸워 이기는 과정이다.“싸움은 만물의 아버지다.”고대 그리스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이다.
산다는 것은 괴로움으로 짜여져 있다. 몸의 아픔이든 마음의 괴로움이든 사람은 작고 큰 고통을 살고 있다. 질병이든 실패이든, 고뇌이든 좌절이든 절망이든, 우리는 끝없는 고통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다. 삶은 수난이다. 그러나 고통을 이겨가는 과정이 삶을 이룬다. 고통의 극복, 그것은 한없는 기쁨이다. 고통과 기쁨, 그것은 삶의 두 바퀴이다. 그러므로 고통을 겪지 않으려면 그만 살면 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삶의 패배자’라고 부른다. 헤밍웨이의“바다의 노인”처럼 우리는 파멸을 당할망정 패배하지는 말아야 한다.
사람의 삶에는 왕도(王道)란 없다. 그저 사람을 살아가는 길 그 자체가 왕도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은 무엇인가?”만을 물을 것이 아니라, “무엇이 사람인가?”도 함께 물어야 한다. 물론 여기에는 ‘정답’이 없다. 그래서 그것은 하늘의 물음으로 다가온다. 마찬가지로“무엇이 사람인가?”의 물음 역시 우리의 영원한 화두이다.“무엇이 사람인가?”
* 이 글은 2012년 가을 날 어느 저녁에 『전남동부지역민족문제연구소』가 주관하는“인문학강좌”에서 했던 강의내용이다.
첫댓글 신학교시절 신학은 인간학이라고 강조하신 은사님입니다
그때주신 인간학 지금 삶의 귀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네~~지금 82세의 연세에도 여전히 귀한 거름을 주셔서 저희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답니다
제가 알기로는 연세가 79세로 알고 있는데요? 학교졸업 후 40대 중반쯤 10여명의 동기모임에 교수님을 모셔서 한말씀 들었는데 그때 하시는 말씀 권정생선생 이야기하시면서 이땅에 살아가는 목회자로써 권정생선생을 모르면 목회자 자격 없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끝나고나서 권정생선생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다 '저만 알고 있다는 사실에'???? 40대 중반의 제자들에게 지금도 직언의 말씀.
ㅋ 내기해요 백만원^^
저희 선친과 나이가 동갑이며 교수님 자제분과 제가 갑인걸로알고 있는데? 쫌 망설여지는군요 전화해서 물어볼수도 없고ㅡ일단 내일 배팅 합니다
내일 배팅? 오~~케이~~~!! 얼마전 기사 쓰며 확인 한 바 있어요 안그래도 돈이 필요했는데 하느님의 선물!?? 내일 확인하시고 농협 641 12 173474로 입금하셔요
좋은글 고마워요. 두 분의 우정어린 댓글도.
다만, 돈이 오고가는 장난섞인 농담은 우리의 놀이에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제니스 고마워요, 잠깐 마음놓고보니 돈이 오갔네요. 귀한가르침 좋았요. 박경숙씨 이기는 물증확보.
1980년 한국신학연구소에서 발행한 '19~20세기 프로테스탄트 사상사'의 약력에 1933년 전남에서 출생으로 나옴.
와온해변가 운저리횟판???? 제니스도 함께....
조만간에 순천갑니다 사랑어린배움터 현판 완성해야하니까요
지난 신학비평 가을호에 보니까 교수님이 박경숙씨 칭찬 대단하던데요? 왠만해서는 칭찬 안하시는 분이신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