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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일 입관식 이야기는 잊고 못 넣었는데,
아버님의 육신을 마지막으로 뵙고 인사드리는 참으로 슬프지만 엄숙하고 또 아름다운 시간이었습니다.
한시간 넘게 진행된 입관식에는 아버님의 모든 자식 손주들이 다 함께 했습니다.
이제 8월 3일입니다.
저희는, 8월 1일 저녁 다 된 시간에 영안실에 들어섰다가
8월 3일 새벽5시에 영안실을 나섰습니다.
그래서 머문 시간이 30시간 조금 넘는다고 들었습니다.
병원 영안실에서 나와 장지로 갈 사람들 모두 버스에 올라타
먼저 벽제승화원으로 갔다가,
다시 아버님을 모시고 이천호국원으로 향했습니다.
여기서 잠시 지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불과 3일전, 그러니까 월요일
의사로부터 아버님의 암이 전신으로 다 퍼져있다는 소식을 접한 그 날,
서둘러 형제들이 다 병원에 모였습니다.
아무래도 조용히 이야기나눌 곳을 찾아 비상구 밖의 계단에 모여서
고운아빠가 방금 의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전하고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아버님이 떠나실 마음의 준비를 하자고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큰 시숙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전에 아버님께서 이천호국원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 한번 알아봐야겠다고 하십니다.
그 다음날, 고운아빠는 제게 아무래도 자식들 입장에서는 영광 선산으로 모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고 말하더군요.
거기에 할머니 할아버지도 계시고 작은 아버지도 계시고 하니 그리로 모시게 될 것 같다고..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이천호국원으로 모시기로 최종 결정했다고 합니다.
아버님께 다시 한번 여쭤보니, 이천호국원을 재차 희망하셨다고 합니다.
6.25참전 유공자이신 아버님께서 미리 이 곳 정보를 숙지하고 있으셨다가 큰시숙님에게 언질을 주셨던 모양입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1-2일 전
셋째 시숙님께서 "아버지, 그런데 거기 가시려면 화장하셔야 해요" 하고 말씀드리니
아버님께서 2,30초 가량 말씀 없이 생각을 하시더랍니다.
그리고 다시 이러셨다 합니다. "그래도, 갈란다."
평소 화장이라는 장례 형태에 대해서 두려움을 수차례 말씀하셨던 어머님도 계시고 해서
쉬이 결정하기 어려웠지만, 아버님 당신이 원하시는 일이고 해서 일단 그리로 정하기로 했습니다.
영광 작은 아버님도 아버님 돌아가시기 전날 밤,
"죽으면 다 그만인 것인데, 땅에 묻히나 화장을 하나 아무 차이 없다,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는 것이 마땅히 옳은 일이다" 하셨고요.
큰시숙님께서는
바쁘게 아버님의 군번도 챙기시고 호국원에 제출해야 할 서류들도 미리 알아보셔서 준비하시고
벽제승화원 예약도 하셔야 하고, 정말 짧은 시간에 또 정말 많은 일들을 소리없이 다 챙겨놓으셨습니다.
큰시숙님, 정말 고맙습니다.
고운아빠가 표현을 잘 못해서 말을 못했지만, 이번 일을 겪으면서
진심으로 큰형님께 존경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제게 여러번 이야기했더랬습니다.
벽제승화원에서 아버님 모시고,
가족들은 가족들 대기실에 가서 쉬게 되어 있습니다.
약 한시간 좀 넘게 진행된다고 해서 저희는 대기실 방에 눕거나, 복도 소파에 앉아 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 거기서 먹은 과자들이랑 바나나우유가 갑자기 생각나네요.
다들 아침을 걸러서 무지 맛있게 먹던 느낌이...
영광에서 오신 제일 큰 사촌시숙님의 재미난 이야기 들으면서 그 시간, 그리 슬프지 않게 잘 보냈어요.
그때 들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약간 19금이라 생략합니다.^^
자, 그럼 사진들 나갑니다.
이 날, 정말 더웠습니다.
치마저고리 입은 여자들도 덥지만, 남자분들은 더 더웠을 듯 합니다.
입관식 때 정말 희성이가 많이 울어서 제가 더 슬펐었죠.
아버님은 제게 언제나 "우리 희성이는 한시도 가만 있는 법이 없다, 뭘 하든 하고 있지, 멩~ 하게 가만히 있지 않는다"면서
자랑스러워 하셨습니다.
할아버지 영정과 위패를 들고 이 날 듬직한 장손 역할을 했습니다.
아버님이 편히 쉬시게 된 곳, 국립이천호국원입니다.
국립이천호국원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과 공훈을 세운 국가 유공자, 참전 유공자가 작고한 후 그분들을 안정하고
명예를 선양하는 호국의 성지로 뿐 아니라,
나라사랑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설립된
국가보훈처 소속의 국립묘지입니다.
저도 지금 까페 글 올리려고 홈페이지에 처음 들어가봤는데 정말 사이트도 잘 해놓았네요.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국립이천호국원 조성 경위입니다.
국립이천호국원은 조국수호를 위하여 신명을 바치신 국가유공자 및 참전유공자들이 영면하시는 호국성지로 이곳에 안장될 호국영령들은 6·25전쟁시 백척간두의 조국을 지키고 우방국을 돕기 위해 멀리 월남참전에 선봉적 역할을 하신 분들이다.
현재 6·25 및 월남참전자 등 약 50만 명에 이르는 참전유공자들이 생존해 계시고 이들 대부분이 고령에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보훈연금을 받고 있는 전공상자를 제외하고는 국가적 차원에서의 보훈혜택은 제반여건상 미흡한 실정이었고. 또한 참전유공자들의 국립묘지 안장문제도 안장자격과 수용능력의 한계로 대부분의 참전유공자들이 안장혜택을 받을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이러한 당면 문제 해결을 위하여 국가보훈처에서는 94년 5월 「향군 참전군인묘지 조성사업계획」을 수립하여 국립영천호국원(2001.1 개원), 국립임실호국원(2002.1 개원)에 이어서 국립이천호국원은 부지매입(2002.8)~공사착공(2005.7)~준공(2008.4)으로 수도권일원의 국가유공자 및 참전유공자분들을 "야외 봉안탑"에 모시므로 그분들의 위훈과 명예를 선양하는 상징적 추모공원으로 조성하게 되었다.
호국원 들어가면서 찍었습니다.
이건 호국원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사진인데, 항공 사진이랍니다.
호국원에 도착해서 서류상의 절차를 마치는 동안 유족들은 건물 내에서 앉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입을 벌리고 자도 참 잘생기고 멋진 형규
침까지 흘렸다면 약간 해석이 달라질 듯~
보통은 저 입이 거침없이 벌어지는데, 사진 찍는 것을 눈치챘나 봅니다.
서류절차가 다 끝나고 받은 종이입니다.
아버님이 가실 곳의 정확한 위치입니다.
모두들 아버님 계신 15구역을 향해 걸어 올라갔습니다.
장안동 부모님께서 이날 여기까지 같이 가시겠다고 새벽일찍 일산으로 오셨는데
그냥 가시라고 돌려보내드리길 정말 잘 했다고 생각한 순간입니다.
무릎이 아파서 평지도 잘 못 걸으시는 친정엄마가 여기까지 와서 같이 올라가지 못하셨을 겁니다.
1구역, 2구역, 3구역 이렇게 언덕으로 올라가면서 저렇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단군할아버지, 고조선, 삼국시대 이렇게 시대별로 완전 역사 박물관 같았습니다.
15구역에 도착했습니다.
15구역의 그림은 아무래도 6.25 전쟁 당시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호국원 직원이 와서 오늘 안장될 두 분이 쉬시게 될 방을 열어놓습니다.
이제 유골함을 모시게 되면 그 안을 진공처리해놓는다고 했고,
60년 후에 영구보관 또는 이관을 결정짓게 된다고 들었습니다.
나중에 내려오면서
제가 "60년 뒤면 희성이가 몇살이야? 90 가까이 되는거야?" 하니,
고운아빠 "60년 뒤면 내가 105살이니까, 희성이 말고 내가 결정해도 될 것 같다"고 하고,
큰시숙님은 "나는 좀 어려울 것 같애" 해서 다들 크게 웃었습니다.
이날 두 분이 안장되었는데요,
직원의 인솔 하에 묵념하고 식을 간단히 이행하고 있습니다.
이 사진은 셋째 시숙님께서 찍어서 제게 카톡으로 보내주셨는데,
정말 너무너무 잘 찍으셨죠?
각도도 기가 막히고, 저 상황을 절묘하게 잘 포착하신것 같습니다.
사진 찍으신 셋째시숙님을 제외한 다른 세 아드님들과 사위가 다 보여서 또 좋고요.
아버님,
이제 편히 계십시오.
가까운 곳에 모셨으니, 자주 들러 인사드릴 수 있어 다행입니다.
모두 그렇게 말하면서 내려왔습니다.
내려와서 호국원 근처에 있는 한식뷔페집에 갔습니다.
기대했던 것보다 음식이 아주 훌륭했어요.
밥도 돌솥밥이 나왔고요, 반찬 하나하나 다 맛있었습니다.
네, 우선은 우리 모두가 배가 무지 고팠었거든요~
주인아저씨로 추정되는 남자분이 약간 높은 곳에 서서 계속
음식을 각자 담고 있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밥은 떠가지 마시고, 반찬이랑 국만 가져가세요"
"밥은 떠가지 마시고, 반찬만 가져가시면 됩니다."
아저씨는 살짝 미소를 짓고 계셨고 말투도 대단히 상냥하셨습니다.
그때, 신샘
제게 말합니다.
"엄마, 저 아저씨 지금 행복하지? 돈 많이 버니까..."
얼마나 웃기던지...
나중에 밥을 다 먹고 나서는 제게 와서 또 묻습니다.
샘, "엄마, 지금 이거 누가 돈 내는거야?"
엄마, "할머니가..."
샘, "이걸 다 할머니가 내셔?'
엄마, "(속으로 진짜 집요하다 생각하며) 몰라, 고모한테 가서 물어봐"
쪼르르 고모에게 간 신샘, 이러더랍니다.
샘 "고모, 지금 이거 누가 돈 내?"
고모 "할아버지가 내셔."
샘, "돈 많이 들어온 걸로?"
영안실내 유족 휴게실에서 틈틈이 부의금을 정리하고 기록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 가족들이 부자가 된 것 같아 내심 크게 놀랐었나 봅니다.
천진난만하다고 해야 하나, 돈독이 올랐다고 해야 하나?
동시에 두 가지 평가가 다내려질 수 있는 상황이지요~~잉?
밥을 먹고, 버스에 타서 다들 일산으로 돌아옵니다.
너 나 할 것이 버스에서 정말 엄청나게 피곤한 잠들을 잤는데요,
잠들기 직전, 우리 4차원 소녀 신고운이 제게 한 말을 쓸께요.
엄마, (고운이 손을 꽉 쥐며) "고운아, 이제 할아버지 편히 쉬실거야, 기분이 좋다, 그치?"
고운, "응. 엄마 할아버지가 country(나라)를 위해 전쟁에 나가고 해서 이렇게 좋은 곳에 오실 수 있던 거지?"
엄마, "(뿌듯한 목소리로) 그럼, 그렇지"
고운, "(역시 결연한 목소리로) 엄마, 나도 그럴래, 나도 아프가니스탄 갈꺼야"
정말 띠용~~!!!
나중에 이 말을 고운아빠에게 전하니,
"야, 네가 크면 미군도 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할거야"
한술 더 뜹니다.
저는 버스에서 잠을 자는데,
정말 얼마나 심하게 목을 꺾어대면서 잤는지, 나중에는 제 목에 용수철이 달린 줄 알았습니다.
왼쪽으로 퍽! 180도 꺾어서 오른쪽으로 퍽!
한번은 살짝 눈을 떴는데,
세상에 제 입에서 침이 거의 폭포 수준으로 쏟아내리고 있더라고요.
식구들끼리니 누가 봐도 창피할 것은 없는데 드러워서 원...
역대 최대로 많은 침을 쏟아부은 낮잠으로 영원히 기록될 듯 합니다.
집에 와서 일단은 두꺼운 상복을 벗고,
다들 씻고 옷을 갈아 입었습니다.
그리고 좀 쉬다가 저녁 먹으로 동네 근처의 맛있는 베트남 식당인 포메인으로 갔습니다.
우리 식구들, 이 날 이 식당을 먹여 살렸습니다.
저랑 희성이랑 나란히 앉아있었는데,
저 대목에서 제가 희성이에게 "희성아, 형규가 고운이 얼굴보다 딱 2배 크다" 했더니,
희성이 하는 말, "부피는 한 4배 되는데요?" 해서 진짜 많이 웃었어요.
이래뵈도 아역배우 출신인데 쩝~~
시키고, 먹고 또 시키고 또 먹고
그러다가 집으로 들어옵니다.
아파트 주차장에 대놓고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노을이 참 이쁩니다.
큰시숙님이 찍어서 보내주셨어요.
꼭 아버님 인생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저 노을이 이야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그 다음날 새벽에 친정식구들과 제주도여행을 떠납니다.
당초 제주도여행을 몇달전부터 계획해서 제 큰동생과 친정부모님이 여행 예약을 다 해놓으셨는데
이번에 아무래도 우리 가족은 못 갈 것 같아서 여행 취소를 하네 마네 하던 와중이었는데
아버님이 8월 1일에 돌아가시고 3일에 발인을 하게 되면서 여행에 동참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삼우제도 있고 해서 여전히 맘에 걸려
큰시숙님께 이렇게 여행을 가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고 말씀드리니
"아버지께서 막내네 여행 가라고 시간을 딱 맞춰주셨잖아요, 맘 편히 잘 다녀오세요,
그리고 아버님 평소 성격상 여행 가시는 것을 틀림없이 원하셨을 거에요." 하시는데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시댁 어른들이 넓게 이해해주셔서 저희는 다음날 새벽 3시에 일어나 택시를 타고 용산역에서 친정식구들을 만나
제주도로 떠날 수 있었습니다.
이제 다음편부터는 친정식구들과 함께 한 제주도여행기
그리고 시댁식구들과 함께 한 강원도 밤골 여행기를 이어서 올리겠습니다.
(다음에 계속)
첫댓글 이렇게도 세세히 그간의 상황들을 시간 시간 엮어서 연재를 해주는 우리 막내 현아에게 정말 눈물 나도록 고맙고 감사해. 자네를 통해 우리 가족들은 더 큰 가족애와 우애를 할수있으리라 확신하네. 그동안 게을렀던 나자신이 부끄럽네. 먼훗날 우리 가족들의 역사가 될 이까페를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될 책임감을 느끼네. 올려진 사진과 글들을 보면 날이 갈수록 그리움이 더해져 내색은 안하시지만 엄마는 더하실거야. 조만간 엄마랑 아버지께 다녀 올라고...
상세하게 잘 올렸다. 모두에게 잊지못할 중요한 기록물이 될 것이다. 계속 수고 많이 해라.
고모, 그리고 아빠,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제 핸드폰, 고운아빠 핸드폰, 카메라, 애들 핸드폰 등에서 사진들 뽑아놓고 하나하나 정리해서 글을 올리다보니, 새록새록 마치 제 앞에서 진행되는 일을 보는 것마냥 기억이 생생하게 시간별로 떠오르더군요. 지금은 생생하지만, 기록되지 않으면 저도 다 잊고 나중에는 대충 느낌만 남을 거에요. 생각해보면 지나간 모든 일들이 그러해요. 저도 글을 올리면서 아버님께서 제게 베풀어주신 아량과 사랑을 그야말로 울컥울컥 느껴서 더 잘하지 못한 것이 후회되고 죄송하고 그렇습니다. 아버님 삶의 마지막 며칠을 정리하다보니 아버님이 얼마나 훌륭한 분인지 더 실감이 납니다.
이제는 아버님이 우리 마음속에서, 그리고 특이 이 카페안에서 잊혀지고 지워질 수 없이 영원히 남아 계시게 되었네요. 애들 엄마의 놀라운 기억력이 고마울 따름이에요. 세상 어느 누구의 죽음이 이렇게 아름답게 기억되고 기록될까하는 생각을 잠시 해봤습니다. 누나 말대로 가족들이 더 우애할 수 있게 해 주셨고요.
예전엔 거의 못들어왔지만 요즘은 가끔 들어와봅니다. 아버지의 흔적이 곳곳에 베어있고 아버지 떠나시는 순간의 기록이 오롯이 남아있어 아버지가 그리워지면 나도모르게 카페에 들어오곤 합니다.
아버님 떠나시기 전날의 단편적인 기억 하나를 올립니다.
지난 5월말 아버지가 패혈증 진단을 받고도, 심지어 신장암 진단을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신다는 생각을 우리 자식들 아무도 생각치 못했습니다. 저렇게 멀쩡한 정신을 갖고계신데 돌아가신다는건 엄두도 낼수 없는 상황이었지요.
그러나 PET검사(?)결과 그리고 막내의 판단에 우리형제들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었지요. 급기야 우리형제들은 이후상황에 대해 논의하게 됩니다
큰형님께서 말합니다. 예전에 아버님께서 이천호국원에 가시겠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저희는 그런곳이 있는지, 또한 그곳에 가실수 있는 자격이 있으신지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저희 자식들은 상의하고 또 상의합니다. 아버님께서 저희자식들을 위해서 이곳에서 가까운 이천으로 가시겠다는 생각이실게다. 내일(7월31일) 아버님 뜻을 최종 확인해보자. 당연히 아버님이 태어나시고 자라신 고향으로 모셔야 한다는 의견을 수렴하고서.
그리고 돌아가시기 전날 저녁무렵 저희 자식들은 아버지 앞에 섭니다. 평상시 급하지 않았을때 심각하지 않은분위기에서 가볍게 아버지의 정확한 의중을 파악해둘걸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하나. 저렇게 의식이 총명하시고 또 무엇보다도 삶에대한 집념이 저리도 강하신데 아버님 죽음에 대해 어찌 얘기해야하나... 저희들이 망설이고 고민하는사이 큰형님께서 어렵게 입을 뗍니다.
"아버지~ 나중에.. 나중에 아버지 어디로 가시고 싶으세요?" "이천호국원도 좋지만 영광선산으로 가시는것이 어떨까요? 저희들 생각은 마시구요, 이천이나 영광이나 별반 차이는 없으니 아버지 가시고 싶은곳으로 모실께요"
그렇습니다. 큰형님은 제가 고민했던 부분을 "나중에"란 가장 간단한 표현으로 아버지를 불안하지 않게 배려하셨습니다. 어려운 말을 어렵지 않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있는데... 이제 이곳이 너희들 고향이다... 이천으로 보내다오."
"아버지 이천으로 가시려면 화장을 해야 되요. 이천에서 1-2시간만 더가면 영광이예요. 저희들 다니는거 아무렇지 않으니 아버님 가시고 싶은곳으로 가셔야죠" 2-30초 생각끝에 이천으로 가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게 자식에 대한 부모의 심정일까. 아버님께 이천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땅일진데 오직 자식들 불편할까봐. 죽어서도 자식들 고생 덜하는 방법을 선택하셨던 우리 아버지...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아, 시숙님. 고맙습니다. 이 늦은 밤에 이렇게 장문의 답글로 그 중요한 이야기를 나눠주시네요. 아버님은 제가 여기서 살면서 힘든 일들 간간히 까페에 적으면 참으로 빠르고 현명한 판단과 조언을 많이 해주셨어요. 양가 부모님들의 그런 조언이 없었다면 어떻게 10년가까이 살았을지 모르겠어요. 당신이 거의 일생을 보내신 고향이 진짜 고향임에도 자식들이 터를 잡고 살게될 서울이 고향이라고 말씀해주시다니요. 저도 요즘.들어 아버님 말씀 듣고 싶어서 자주 카페 옛날 글들을 찾아보고 있는데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어쩜 그리 좋은 말씀을 잘 해주셨는지 저도 정말 너무너무 그리워요.
그나저나 사루비아가 누구신지 가물가물래서 회원 정보 찾아보니 주소지가 광탄면이어서 셋째시숙님인 줄 알았습니다. 카페 데뷔 축하드립니다. 꾸벅!!
데뷔 늦어서 미안합니다. 그리고 어울리지 않는 닉네임으로 제수씨께 혼란과 수고를 드려 지송합니다. 아버님과 관련한 소소한 일들이지만 제 기억에서 지워질까봐 이렇게 글로나마 남겨둬야 할거 같아서 몇자 적었을 뿐인데 이렇게 환대해 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사실 제가 어디가서 댓글달고 해본적이 처음이라서요.
앞으론 가끔 들어와서 우리 자랑스런 가족의 일원임을 느끼겠습니다.
사루비아씨 나두 반가우이...까페 데뷔 축하 축하! !!
주인장 께서 얼마나 기뻐 하실까. 아버지를 통해 이까페가 더욱더아름답고 소중한 공간 이 되길 우리모두 노력해서 조금이나마 주인장께 보답합시다.
아이고, 무슨 보답은요, 그런 말씀 마세요.
지원엄마의 손님댓글로 올라온 글입니다.
크낙큰 별이 졌습니다. 슬픔이 지금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