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서 먹게 하여 내가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창 27:4)
인간이 죄를 모른다는 것은 선악과를 먹은 후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취한 행동에서 드러난다. 만약 인간에게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먹었다’라는 죄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면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우리가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열매를 먹었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을 것이다.
그런데 벗은 것이 두려워 숨었다는 것은 선악과를 먹은 죄로 인한 두려움이 아니라 벗었다는 자신의 상태를 책망받을 죄로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잘못된 죄 인식은 지금도 아담에 속한 우리가 자기 상태를 돌아보며 믿음을 판단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죄를 알지 못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를 돌아보며 하나님이 기뻐하실 상태가 되는 것에 믿음의 중요성을 둔다. 마음이 선하고 양심 바르며 인품도 훌륭한 상태의 인간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탄의 편에 선 선악과를 먹은 죄의 행동인 것을 도무지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바른 신앙생활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그 결과로 복을 얻을 수 있다는 인간의 발상을 옳은 것으로 안다.
죄를 알지 못하면 복에 대해서도 무지할 수밖에 없다. 복의 내용은 물론이고 복의 근원 또한 알지 못한다. 다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복의 조건으로 생각할 뿐이다. 이것이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죽은 자라는 시각이 없는 인간이 행하는 오류다. 이러한 오류를 오류 있는 자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게 하는 것이 본문이다.
이삭은 축복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자다. 그리고 에서가 아버지 이삭에게 별미를 만들어 드릴 테니 그걸 먹고 나를 축복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다. 이삭이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는 자신의 상태를 염두에 두고 에서에게 ‘별미를 만들어 가져와서 먹게 하고 네게 축복하게 하라’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삭은 왜 굳이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했는지가 의문이다. 야곱보다 에서를 사랑한 이삭은 이미 에서를 축복하려고 했고, 따라서 별미와 관계없이 축복하면 되는 일이다. 그랬다면 야곱이 이삭을 속이고 축복을 가로채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하셨다(말 2:2,3 롬 9:13). 야곱을 선택하신 것이다. 그런데 별미를 가져오라고 한 일로 인하여 축복이 야곱에게로 돌아갔으니 결과적으로 인간의 실수로 인해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졌다고 해야 하는가? 그렇게 되면 ‘우리의 실수도 하나님의 일에 사용되니 실수해도 괜찮다.’라며 실수를 정당화하는 말도 가능해지지 않겠는가?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별미는 복을 중심으로 한 이삭과 리브가, 에서, 야곱 모두의 오류를 드러내는 도구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별미를 만들라고 한 것이나 리브가가 이삭의 말을 엿듣고 별미를 야곱에게 줘서 이삭을 속이고 복을 가로채게 하는 모든 것이 복에 대한 인간의 오해와 오류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삭이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한 것은 단순히 맛있는 별미를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죄를 알지 못한 인간의 복에 대한 무지의 모습이고 이러한 무지를 이삭과 그의 가족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인간은 벗은 상태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했다. 벗은 몸을 하나님이 싫어하신다고 판단한 것이다.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은 것도 선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몸을 가려서 하나님이 싫어하지 않을 상태의 몸으로 보이고자 하는 인간 됨이다. 이것이 선한 자로 하나님 앞에 서고자 하는 것을 죄로 인식하지 못하는 인간의 신앙 행위다.
인간은 하나님을 자기를 기쁘게 하는 자에게 복을 주는 분으로 안다. 그래서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일, 즉 별미를 바쳐야 한다는 발상이 나온다. 그렇게 보면 이삭이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한 것도 단지 별미가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에서를 축복할 권한이 있는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일, 즉 별미를 통해서 에서로 하여금 복 받을 조건을 갖추게 하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리브가가 야곱을 위해 염소 새끼 두 마리를 가져오게 하여 이삭이 즐기는 별미를 만들고, 야곱이 염소 새끼의 가죽을 손과 목의 매끈한 곳에 입어 에서인 척하여 축복을 받은 일들 또한 별미를 바치면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의한 행동이다. 이것이 별미를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와 복에 무지한 인간 됨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 됨은 인간의 역사에서 변하지 않고 드러난다.
또 하나 이상한 것은 이삭의 마음에 에서가 있었고 나중에 야곱이 자신을 속였다는 것을 알았다면 야곱의 축복을 취소하고 에서에게 다시 축복할 수가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버지를 속여서 축복을 받은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니 그러한 야곱을 저주할 명분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삭은 야곱의 축복을 그대로 유지하고 오히려 에서를 저주한다.
이삭이 왜 그랬을까? 축복은 인간의 의도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복과 저주는 하나님의 선택과 작정하심에 따라 확정되어 있음을 알았기에 야곱을 복의 사람으로 에서는 저주의 사람으로 보게 된 것이다. 결국 복은 별미,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라는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작정하신 자에게 전달된다는 것이 성경이 증거하는 원칙이다.
복에 대해서 인간은 단절되어 있다. 누구도 복을 받을 자격이 없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을 바쳐서 복을 받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를 자기의 것으로 정상화하겠다는 의도일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모독하는 원수로 행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야곱은 별미를 바쳐서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사랑하기로 작정하신 복의 사람이다. 그렇다면 가만히 있어도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가 되는데 문제는 인간은 절대로 가만히 있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기 복을 위해서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야곱이 악한 본성대로 살았음에도 복의 사람으로 존재한 것이 하나님의 복의 원칙에 담긴 비밀이다. 그 비밀이 곧 예수 그리스도다. 야곱을 위해 별미를 만들려는 리브가의 계략 때문에 염소 새끼 두 마리가 희생된다. 그리고 야곱은 그 가죽을 입고 이삭을 속인다. 이처럼 복을 향한 인간의 욕망으로 인한 염소 새끼의 희생을 예수님의 희생으로 연결해 보면 성도를 복의 사람으로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날마다 죄 가운데 행하는 우리를 덮고 있는 십자가의 피에 있다. 결론은 예수님의 피가 하나님이 기쁜 마음으로 받으시는 참된 별미이기에 우리 손으로 별미를 만들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신윤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