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앞에서 열차를 놓치고
참으로 어이없게 열차를 눈 앞에서 놓치고 말았다. 일요일 오전 11시 1분 용산행을 타려고 서울 가는 홈에서 기다리지 않고 여수 가는 홈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11시쯤에 열차가 도착해 타려고 보니까 용산행이 아니고 여수행이었던 거다. 정신이 번쩍 들어 계단을 날다시피 뛰어 반대홈으로 갔지만 열차는 눈 앞에서 떠나고 있었다. 아무리 속도가 붙기 전의 열차라도 그것을 붙잡을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런 낭패라니. 어쩐지 내가 열차를 기다리면서 서성대고 있었던 홈에는 나이든 사람들이 많았고 반대편 홈에 젊은 사람들이 많았다. 허탈감 속에서 많은 생각들이 오갔다. 택시를 잡아타고 장성역까지 뒤쫓을까. 아니다. 그러다 또 놓치면 택시비는 택시비대로 날아가고 더한 허탈감을 감수해야 하니. 이 시간대의 열차가 매진이 많아서 3일 전에 예약해 놓은 건데 열차 출발 30분 전에 역에 도착해서 아무런 생각없이 태연자약하게 반대편 홈에 앉아 있었다니.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었다. 이미 열차는 학구를 지나서 구례구를 향해 줄달음치고 있을 것이다. 떠나는 것은 떠나 보내자. 하지만 눈을 감고도 갈 수 있을 정도로 내 발에 익숙한 역의 홈을 반대로 찾아들다니. 이건 아마도 너무도 단조롭게 살아가는 나의 일상에 충격을 주기 위한 누군가의 의도이지 않을까. 겸허, 신중 이런 덕성에 대한 깨우침에 대한 촉구일 수도 있고, 일상에 잠복한 뜻하지 않는 사건들에 대해서 통찰하라는 의도일 수도.
도대체 이런 상황은 어떤 말로 비유하는 게 적당할까.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 아니지. 이 말은 이 상황에 맞지 않아. 첫모 방정에 새 까먹는다? 아니야. 이 말은 노름판 따위에서 쓰는 말이야. 에이 포기.
택시를 타고 버스 터미널에서 서울가는 버스를 탔다. 열차에서 읽기 위해서 가져 온 이성복 산문집 ‘타오르는 물’을 펼쳤지만 통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창 밖으로는 벚꽃잎들이 성글게 떨어졌다. 그 꽃들이 만발하여 이 지상을 조금이라도 밝게 하려 했을 때도 우리는 조금도 밝아지지 못했다. 하기는 꽃이 이 인간의 세계를 밝게 하려 피는 것은 아니다. 인간과 꽃의 친연성은 지구별과 지구별에서 수억 광년 떨어진 별과의 거리만큼이나 먼 것일 것이다. 다만 사람들이 그 꽃을 자주 들여다 보고 냄새 맡고 그것의 형상을 그려내고 노래하는 것은 사람들의 은유에 대한 욕망으로 온 것일 것이다.
은유는 본질적으로 동질성 또는 상사성(相似性)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밤하늘에 뜬 국자 모양의 7개의 별자리를 사람들은 북두칠성이라 부른다. 이러한 연상 작용은 우리의 상상력의 첫 자리에 놓이게 되면서 많은 이야기와 노래를 만들어 낸다. 정철은 “북두성 기울여 창해수 부어내어 저 먹고 날 먹여늘 서너 잔 기울이니 화풍이 습습하여 양액을 추켜드니 구만리 장공에 적이면 날리로다”라고 했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이 로맨티스트가 북두칠성을 노래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북두칠성의 그 국자 모양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우연히 그러한 형상을 발견했을 뿐이다. 말하자면 북두칠성의 7개의 별자리들 중 이웃하는 두 개의 별 사이의 거리는 지구와 그 별들 사이의 거리보다 더 먼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자를 가지고 실측해 보지 않아서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러할 개연성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은유를 시도할 때 형상적 닮음으로만 하게 되면 그것은 매우 초보적인 것일뿐더러 실패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나의 생각을 포함한다. 외로움을 얘기하면서 숲 속에서 혼자 쓰러지는 나무로 은유한다면 어떨까? 그것은 자신이 겪는 외로움의 성질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것이 연인이 떠나고 없는 상태에서 오는 것인지, 직장에서 자리를 잃고 겪는 것인지 아니면 이도저도 아니면 인간으로서 근원적으로 앓게 되는 것인지에 따라서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은유를 시도할 때 첫 번째로 실증되거나 확증된 것에 대해서 부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있는 것에 대해서 부정할 때 있어야 할 것에 대해 긍정하게 되고, 있어야 할 것에 대해 부정할 때 있는 것에 대해 긍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20년 전에 서울 남대문 시장에서 사 입은 프랑스제 아이더 등산 재킷이 너무 낡아 블랙야크나 코오롱 스포츠에서 새로 나온 신상품을 사고 싶을 때(이것은 있어야 할 것) 나는 그것을 부정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산은 내가 오르지 등산 재킷이 오르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라고. 그러면 20년이나 입은 나의 낡고 오래된 프랑스제 아이더가 더 값있는 것으로 생각되게 되고 나는 그 옷을 입고 더 열심히 산에 오르게 될 것이다. 반대로 내가 가지고 있는 슬픔은 진실된 슬픔이 아닐 것이라고 부정해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나는 헛된 감상에 빠지지 않고 슬픔의 진상을 규명해 보려고 할 것이다.
만해는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고 했다. 만해는 바로 그러한 부정의 묘법을 통찰한 선지자였다. ‘님’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자신은 그 ‘님’을 보내지 않았다고 했다. 있어야 할 것을 부정함으로써 참된 긍정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내가 그 님을 떠나 보내지 않았으므로 그 님은 영원히 내 마음 속에 살아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언제든지, 언제라도 그 님과 다시 만날 수 있는 희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만해의 ‘님의 침묵’은 지금 실연당하고 쓰라린 마음을 달래지 못하는 연인들에게 큰 위안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많은 훌륭한 시들은 대부분 연애시의 포즈를 취하는 것 같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빈집
기형도가 서른이 못 돼 죽었기 때문에 이 시는 아마도 그가 20대의 젊은 나이에 쓴 시일 것이다. 이 시는 지금은 내 곁에 없는 연인에 대한 그리움에 대한 시가 아니다. 사랑의 열병을 앓는 와중에 그는 이 사랑이 영원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예민하게 깨닫고 있었다. 인간이란 완전할 수 없으므로 그들이 벌이는 사랑이라는 것도 완전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그러한 한계적 인간으로서 사랑의 모순과 고통에 대해 노래한 시이다. 그런데 웬 “공포를 대신하던 흰 종이들아”인가. 그녀가 떠난 마음은 ‘빈집’이 된다. 그가 실제로 숲 속의 빈집에서 살았을 리는 없으므로 빈집은 빈 마음일 것이다. 그는 밤이면 자주 촛불을 켜고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너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너를 사랑한다’고 쓰는 순간 ‘너를 사랑했다’가 돼 버리지 않는가. 모든 현재는 과거에 잠식당할 수밖에 없다. ‘너를 사랑한다’의 반대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일까.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심리적으로 얽어매고 있던 모든 고리는 끊어지고 그는 더 이상 내 마음 속에서 소용돌이를 일으키게 하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공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산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 자체가 공포를 학습하는 일일 뿐이라는 극도의 비극성이 이 시에 내장되어 있다.
고속버스 앞 부분에 설치된 텔레비전에 현정부의 국무총리라는 정운찬이라는 자가 나타났다. 그가 검은 양복에 검은 넥타이를 매고서 천안함 사고로 희생당한 젊은이들에 대한 범애도기간을 선포한다고 말했다. 한 마디로 말해 그는 틀렸다. 일찍이 프린스턴 대학에서 세계적 석학 폴 크루그먼을 사사했다는데 나는 오래전부터 그를 이중인격자 또는 곡학아세의 전형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는 서울대 총장 시절 김대중 정부 이후 지속돼 온 ‘3불 정책’을 정면으로 반대했다. 이 나라의 고등학생을 1등부터 꼴등까지 줄세워서 딱 서울대 신입생 정원만큼만을 상위에서부터 독식하려고 했던 자이다. 이러한 정책은 사교육이 만연한 한국에서 가진 자들에게만 서울대 입학 기회를 줌으로써 서울대를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고자 했을뿐더러 가진 자가 부와 권력과 명예까지 독식하게 하는 소위 ‘강철군화’의 첨병 같은 역할을 했던 자이다.
그가 검은 양복을 입고 검은 넥타이를 매고 가슴에 근조 리본을 달고 나와서 슬픈 표정을 짓지만 내가 볼 때 그것은 형편없는 가식일 뿐이다. 그 표정이 과연 슬픔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지금 그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바로 현 상황에 대해서 부정부터 해야 한다. 있어야 할 것은 진실이다. 과연 무엇이 1000톤이 넘는 거대한 초계함을 두 동강을 내서 바다에 수장시켰는가. 그는 있어야 할 것에 대해서 고민하는 자세를 보이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 있는 것은 무엇인가. 북한이다. 북한의 소행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실은 없는 것을 있는 것이라고 단정짓는 태도야말로 심각한 문제이다. 은폐와 협잡과 조작과 선동의 망령이 대한민국의 하늘에 어둡게 깔려오고 있다. 진실을 규명하려면 용기가 필요한데 그에게 용기를 기대하는 것은 이명박에게 합리적 이성을 기대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울 것 같다.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비장한 결단과 치열한 고민도 보여주지 않고 그저 슬퍼하자고 한다면 누가 따르겠는가.
슬픔은 대개 눈에 보이지 않는 속성이 있으며 따라서 그냥 스쳐지나기 십상이다. 로드킬이라고 자동차에 치여 죽는 짐승들이 많다. 우리는 그것만 본다. 그러나 숲 속에 남았을 그의 가족과 동료들이 겪어야 할 슬픔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지상의 뭇생명 중에 사람은 지나치게 이기적이다. 적어도 잠을 이루면서 제 등짝을 모두를 온전히 바닥에 붙이고 잠드는 것은 인간밖에 없다. 다른 짐승들이 네 다리를 모두 한 방향으로 하고 모로 누워서 잠드는 것이 슬프다는 것이 아니라 이 지상에서 생명으로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슬프다는 것이다.
어찌어찌 서울 어머니 집에 와서 이 글을 쓴다.
어머니에게는 열차를 놓쳤다는 말을 못 했다.
첫댓글 끝까지 읽기 전까지는 오늘도 찜질방에서 쓰시나 했습니다^^ 기차를 놓치고 참으로 허탈했을텐데 이렇게 좋은 글로 자신을 달래고...또한 감동을 주시네요.송시인님의 글은 냉정한 듯 하지만 사실은 매우 따뜻하다는 걸 느낍니다.어머니에게 말씀 하시지 않은 건 잘하신것 같구요
저는 찜질방을 좋아하지 않아요. 찜질방에 가게 되면 다음날 하루는 아예 망치게 되거든요. 그래서 3일 전에 열차표를 예약해 놓은 건데...왜 사니? 왜 살아? 되묻게 된 사건이었어요. 어머니에게 열차 놓쳤다고 말하면 그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열차를 놓친건 참 잘한 일이예요.
놓친 여자와 놓친 열차는 왜 그리 아쉬울까. 때 되면 떠나는 것들은 왜 그리 야속할까.
ㅋㅋㅋ 열차는 떠났고, 기차를 타지 않은, 다른 경험을 통해 다른 삶을 살았으니 그것도 하나의 길이었고.
놓친 여자는 인생에 다시없는 가슴아픈 경험을 배우도록 휑하니~떠난것이니 그 또한 고마울 따름.
오늘은 제자가 한 수 위 같은데요? 신난다!
~~~~~~~이러니 제가 시가 나오겠어요?!!
갱숙이 너는 아직도 내가 선생님으로 보이냐?
사실은 귀여운 후배 같아요.
선생님 글의 매력은 한번에 이해를 못하고 세번 네번 읽어야만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읽고도 채 다 이해를 못해요. 한번 읽을때마다 한개씩만 마음에 와 닿아요. 늘 어려워서 또 읽어야 하는데, 그래도 어려워요.
놓친게 아닌거 같네요. 그리되도록 운명이 짜여 있었던 거예요. 떠나는 기차나 님이라는 매게체는 당연히 그리될 운명이고 그에 대한 대처가 어떤것이냐가 중요한거 같아요. 보세요 이처럼 멋진 글을, 마음을 나누게 되잖아요? 좋은 추억 하나 가슴에 담으셨네요~~
작은 것에서 소중한 것을 배워가는 삶...'내가 제대로 와 있는 것일까' 노심초사하며 살피고 또 살폈을 내 모습과는 정반대...초등 6학년부터 결혼 전까지 살았던 곳이건만 얼마나 그곳이 낯설던지...작년 8월부터 아이들 레슨으로 서울을 자주 오르내리며 겪게 된 제 모습이랍니다. 실수없는 길은 제대로 가는 듯 하나 이르러 보면 알맹이가 없는 육신의 조금 편함을 줄 뿐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전 선생님의 실수를 축하합니다^^ 신문의 헤드라인만을 봐도(요즘TV는 거의 안 보거든요) 무언가 석연찮음이 내 눈에도 보이는데 선생님 마음에는 오죽했을까 싶습니다. '무엇을 이루어내기 위한 희생을 어린 저들이 감당해 내야 한단 말인가'하고
내 마음이 울부짖는데...역사의 심판을 어찌 감당해 내려고 저럴까...그들의 훗날의 자손들은 어찌 고개들고 살라고 저러나...그들의 태연함은 과연 큰 것을 위한 일이었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는 것인가. 그 큰 것이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모든 것이 다 순수해서 맑고 깨끗했던 옛 것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큰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볼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꿈꾸며...작은 것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그런 세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