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한 맛, 공부 / 류창희
혹독하게 춥다. 정월 초하루, 초이틀, 초사흘, 해 뜨는 시간을 핑계로 점점 늦게 일어난다. 아침 식사를 하는 시간도 점점 늦어진다.
출근할 사람도, 찾아올 사람도, 나갈 일도 없이 습관적으로 TV를 켠다. ‘응답하라 1988’도 끝나 마땅히 재방송까지 챙겨볼 프로그램도 없다. 창가에 비치는 겨울 햇살은 환했지만, 이렇게 멍청하게 하릴없이 방학기간을 소비한다는 것이 자존심이 상한다. 내가 꼭 ‘잉여인간’으로 전락한 느낌이다.
초엿샛날 아침, 아침부터 무조건 걸어 나갔다. K대 앞 중국어 학원에 한 시간 청강하고 나오며 바로 등록했다. 한층 걸어 올라가 J일본어 학원으로 올라가 한 시간 청강하고 바로 등록하고 내려왔다. 아침마다 학원까지 서너 정거장 걸어가고 걸어오고, 부지런히 집에 와서 점심을 차렸다. 추운 줄도 모르고 매일 학원 갈 욕심에 땀을 흘렸다.
한 달 동안 새롭게 중국어 성조와 권설음 발음 지적을 받으며, 일본어 히라가나 숙제를 하며 두 시간 수업 받고 오면 서너 시간씩 예습복습 했다. 더러 외고 지망하는 중학생이나 아주머니 아저씨의 중년도 있었지만, 대학 앞이고 방학기간이라 대부분 수강생이 대학생이다. 총명함과 순발력은 좇아갈 수 없지만, 성실한 태도 하나만은 내가 그들보다 관록이 있다.
내년이면 벌써 서른이라며 “헐~!” 하는 중국어 선생의 깜찍하고 명랑한 수업에서 나는 요즘 신종언어의 중국어를 들었으며, 시작하는 날부터 종강하는 날까지 분초도 어김없는 시간 엄수와 헛된 숨소리조차 아끼는 완벽에 가까운 일본어 선생의 교수태도에 경의를 표했다. 내가 하던 강의에 반성도 하면서 모름지기 강사의 자세는 저래야 한다, 마음속으로 진정 존경까지 했다.
얼마만의 집중인가 얼마만의 나만 위한 시간인가. 이런 시간만 나에게 주어진다면 좋겠다. 얼마나 공부가 흥겨운지 누가 보면 앞으로 이 공부로 먹고살 듯이 들이덤볐다. 모르면 몰라도 나를 지켜보는 학생들도 저 아줌마는 아마 뒤늦게 ‘공부 귀신’이 씌운 줄 알았을 것이다.
날마다 새롭게 엄습하는 퇴직 부부의 관계, 부모 자식 간의 도리, 말이 근사하여 황혼이지 어찌 떨쳐버릴 수 있을까? 수면제를 복용하던 시간을 무시해버렸다. 날마다 소리 내어 미친 듯이 읽었다. 꿈속에서 ‘ます & です’가 서로 자기 것이 ‘맞다’고 대치하는 바람에 나는 형용사인가 동사인가 편 가르다가 새벽이 되곤 하였다. 손자 보는 날도 예약한 병원에 가는 날도 하루도 결석하지 않고 학원에 개근했다.
그리고 종강했다. 종강을 하고 집에 돌아와 단박에 교재를 재활용 박스에 넣었다. 이번 공부는 나를 혹독하게 부리기 위한 훈련이었다. 공부하고 속이 이렇게 후련하기는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