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디스 교회의 문제
“너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다.”(3,1)
‘너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이라는 말씀을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르디스 교회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유명한 교회였다는 뜻입니다. 사르디스 교회는 적어도 겉모습은 괜찮은 교회였습니다. 수많은 행사와 사업과 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참여율도 좋았고, 다양한 사업들이 아주 바쁘게 돌아가고, 성경 공부 프로그램도 많았고, 좋은 일도 많이 했습니다. 적어도 사람들 눈으로 보기에는 살아 움직이는 번창한 교회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해진다고 주님께서 보시기에도 좋은 교회라고 착각해선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놀랍게도 이런 교회가 실제로는 ‘죽은 것’이라고 진단하십니다. 영적으로 무기력하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겉만 화려하지, 영적 내실이 전혀 없다고 하십니다. 열심히 달리고 있는데, 하느님께서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겉으로는 경건하나 속으로는 그렇지 못하다고 하십니다. 설교가 유창한데 성령의 감동이 없다고 하십니다. 하는 일은 많지만 예수님께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아서 영적 힘이 없다고 하십니다. 예배가 많지만, 극히 형식적이고,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진정한 영적 갈증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미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마태 15,8)
사르디스 신자들은 사르디스 도시 사람들처럼 항상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며 살았습니다. 이렇게 과거의 환상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인생은 비참합니다. 현재에 대한 감격이 없고,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없습니다. 사르디스 도시처럼 사르디스 교회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우리도 한때는 에페소 교회나 스미르나 교회처럼 소아시아 교회들의 맏형 같은 대단한 교회였습니다. 우리 교회 때문에 생겨난 교회, 우리가 개척한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이런 자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럼 사르디스 교회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요? 지금의 사르디스 교회의 영적 영향력은 어떤가요?”라고 물어보면 고개를 푹 떨군다. 대개 교회의 역사가 수십 년 이상 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교회일수록 화려했던 과거를 이야기하기는 좋아하지만 현재는 너무나 무기력한 모습입니다. 자리에서 물러난 권력자와 같습니다.
사르디스 교회가 죽어가고 있었던 현상은 사르디스라는 도시가 죽어가던 현상과 아주 비슷합니다. 아무리 도시가 죽어가더라도 교회가 살아 있었더라면 이 도시는 달라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어가는 도시의 영향으로 교회도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환경의 노예가 되어, 세속화되어 가는 교회의 슬픈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르디스 교회가 ‘너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어찌 보면 죽음보다 더 비참한 것은 식물인간’이라고 합니다. 죽지도 않은 상태에서 죽은 것이나 다름없이 기계에 의지해 생명을 유지하는 그 비참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살아 있으나 살아 있는 게 아닙니다. 사르디스 교회가 영적인 식물인간같이 변하고 있었습니다.
2절에 보면 ‘깨어 있어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은 ‘Wake up!’, ‘너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사르디스 교회는 영적으로 잠들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바꾸어서 말하면, 사르디스 교회는 죽어가고 있는데 정작 자신은 자기가 죽어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구약성경의 천하장사 삼손이 드릴라의 꾐에 빠져 머리가 깎이고, 하느님의 힘이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는 주님께서 자기를 떠나셨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판관 16,20)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저 ‘이만하면 됐지?’라고 스스로 만족합니다. “이제 우리 교회도 이만하면 됐지 않은가? 더 이상 선교하면서 힘들게 노력할 필요 없이 가족같이 살기에 딱 좋은 인원 데리고 그냥 우리끼리 알뜰살뜰 살면 좋겠다.” 이런 식의 잘못된 현실 만족이 바로 사르디스 교회의 비극이었습니다. 달리지 않는 자전거는 쓰러지고 말 듯이, 비전과 도전이 없는 교회는 쓰러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르디스 교회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에페소 교회나 페르가몬, 티아티라 교회와는 달리, 사르디스 교회는 이단의 도전이나 지역 상인조합, 혹은 로마 정부의 박해가 바교적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면 좋은 환경이니까 교회가 더 잘될 것 같은데, 상황은 그 반대로 전개되었습니다. 교회가 너무 편안하게 지냈던 것이 오히려 교회의 야성을 무디게 함으로써, 서서히 죽어가게 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환난이 없고 편안한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려움과 박해, 도전이 있을 때 교회가 정신을 차리고 영적으로 살아 있는 것을 봅니다. 역경과 환난이 찾아올 때 우리는 하느님 앞에 부르짖기도 하고, 원망도 하고, 죽기살기로 매달립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편안하면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는 것을 점점 멀리하게 되고, 기도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듭니다. 우리의 영이 서서히 죽어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유럽이나 미국 교회가 저토록 죽어버린 것은 어떤 외부의 박해나 어려움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좋은 주위 환경이 서구 교회들의 영적인 야성을 서서히 죽여갔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지옥으로 가는 길은 편안하고 밋밋하면서 전혀 장애물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반면에 천국으로 가는 길은 좁은 길이며, 도처에서 환난곽 역경이 기다립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초점을 맞추고 달려가면 그 시련들을 하나하나 극복해 갈 수 있고, 그때마다 영적으로 성장하고 깊어집니다.
사르디스 교회는 하느님 앞에서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나의 하느님 앞에서 완전하다고 보지 않는다.”(3.2) 혹자는 “어떻게 우리가 하느님 보기에 완전할 수 있는가? 그건 애당초 불가능한 것 아닌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기대치가 너무 큰 것 아닌가?”라고 반문할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인간이 행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요구하시는 영적 성숙의 기준, 영적 실력의 기준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겸손하고 신실한 마음으로, 첫사랑의 열정으로 하느님 앞에 바로 서 있기만 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완전하게 봐주시고 칭찬해 주십니다. 스미르나 교회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나태해져버린 사르디스 교회는 이 기준에 다다르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완전하다’는 것은 잔이나 그릇 따위가 비어 있는 모습을 뜻합니다. 즉, 형태는 갖추어져 있는데 속이 텅 빈 것 같습니다. 속 빈 강정입니다. 외형은 화려한데 안에 들어가 보면 형편없는 건물과도 같습니다. 사르디스 교회는 형식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예배도 드리고, 헌금도 하며, 기도도 하고, 공부도 하고, 선교와 자선도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눈으로 안을 들여다보면 생명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영적 활기, 주님을 향한 열정이 없습니다.
‘완전하지 않다’(not complete)는 것은 ‘미완성’을 뜻합니다. 주님의 이 평가는 얼마나 충격적인가?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미사를 드렸는데, 주님께서는 그 미사가 완성되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그 미사를 해치운 것이지,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제사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헌금을 드렸는데, 교만하고 무덤덤한 마음으로 드렸기 때문에 그 헌금이 완전하지 않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우리가 했다고 하는 일들이 주님 앞에 아무 의미도 없이 떨어진 것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할 때 대충 시간을 때우고 사람들 보기에 눈가림만 하면 큰일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그 마음의 태도를 보십니다. 하느님의 일을 매너리즘에 빠져 건성건성 해치우듯이 하면 큰일납니다.
“주님의 일을 소홀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피 흘리는 일에서 칼을 거두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예레 48,10)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