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계의 미학: 너 없는 나, 나 없는 너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은 어디서 올까요? 바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홀로 자신을 들여다볼 기회가 있는 사람이라면 문득 왜 사는지 묻곤 합니다. 언젠가 어르신들을 위한 미사 후에 특강이 있었는데 강사가 다짜고짜 어르신들에게 마이크를 대고 “할아버지 왜 사세요?”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금 더 생각해 보고.”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어떤 할머니는 “그냥 살아 있으니까 살지 뭐.”라고 하셨습니다. 김상용 시인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란 시 끝부분에 “왜 사냐건 웃지요”란 말처럼 내 삶의 이유에 대해 논리적인 답을 찾기보다 생명 그 자체를 깊이 관조하는 물음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듯싶습니다.
요즘 같이 경제가 어렵고 도덕적 가치가 무너진 우리 사회의 총체적 난국 속에서 삶이 힘든 이유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겠지만, 정말로 삶을 힘들게 하는 것은 아마도 세상의 힘든 일이라기보다는 일을 힘드게 만드는 사람들 때문일 듯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뜻하는 ‘인간人間’이란 두 글자는 많은 묵상거리를 던져줍니다. 두 사람이 서로 기대고 있는 형상을 문자화한 ‘인人’이 필연적으로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을 표현한 것이라면, ‘간間’은 서로의 ‘사이’, 곧 ‘차이’와 ‘다름’은 서로 실컷 기대다가도 진저리치는 인간관계의 허와 실을 보여 줍니다.
유다계 종교 철학가인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는 <나와 너>에서 인간의 본질은 ‘나와 너’의 만남 속 ‘사이 존재’임을 밝혔습니다. 당시 인간의 실존적 자기 관계만을 고집하는 개인주의적 인간학에 대항하여 부버는 참된 인간은 나와 너 사이에 존재하는 열린 공간 속에서 서로를 동등한 대화의 주체로 바라보는 사람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가장 큰 비극은 ‘나’처럼 사랑받고 인정받으며 살고 싶어하는 ‘너’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를 나의 생의 도구인 ‘그것’으로 폄하하는 데 있다고 지적합니다. 한마디로 ‘너’없이 ‘나’만을 위한 삶이나, 반대로 ‘나’ 없이 ‘너’에게 매여 사는 것도 참된 인간성의 완성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이 힘든 건 바로 피할 수 없이 맺어진 사회적 관계 속의 ‘너’를 떠나 살 수 없는 ‘나’의 숙명적인 본질에 있습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생각이 떠오르면 가슴 속에 돌덩어리 하나가 주저앉은 느낌이 들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생각하면 행복하고 가슴 설레는 사람도 있건만, 유독 관계 속에서 나한테 상처를 준 사람들의 기억은 참 오래 갑니다. 그래서 상처받은 우리는 가끔 동굴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바쁜 일상과 중독성 강한 취미생활로 도피해 버리기도 합니다. 생각할수록 자꾸 미운 ‘너’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그런 미운 ‘너’를 안고 살아야 하는 내가 더 밉고 싫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신부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신학생 때 사제직의 꿈을 안고 신학교에 들어가 살면서 유독 그분을 힘들게 한 선배 신학생이 있었습니다. 사사건건 그분의 말과 행동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선배는 의도적으로 그분을 ‘왕따’시키고 무시하는 눈빛과 행동을 했습니다. 그분은 밤마다 잠자리에 들면 속이 부글부글 끓어 고생을 했습니다. 그 선배 생각만 하면 가슴이 덜컹 내려앉고, 행여 밉보일까 말도 제대로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그분을 고생시킨 선배가 입대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세상살이가 좀 편해졌습니다. 그렇다고 상처받은 내 마음속에 미움의 벽이 허물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선배와 화해를 하게 된 것은 선배가 군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자기에게 해준 말 때문이었습니다. 선배는 병이 들면 수술을 해서 고통을 치유할 수는 있겠지만 수술자국은 남는다고 했습니다. 병은 나아도 수술자국을 보면 아팠던 기억이 자꾸 떠오르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 상처를 너에게 남겨준 것이 미안하다고 선배가 말해 주었을 때 그분은 용서가 참으로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관계 속에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그 관계가 좋든 싫든 우리는 알게 모르게 ‘나’ 혼자 살고 싶어하면서도 실상 ‘너’를 떠나 살 수 없는 인생이 역설을 살고 있습니다. 내가 풀 수 없는 문제들, 나를 힘들게 하는 문제들은 사실 내가 겪기 이전에 나보다 먼저 같은 문제를 겪은 ‘너’를 통해 얻어낸 ‘삶의 지혜’로 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몰랐던 세상을 알게 해 준 스승들, 살 길이 막막해져 쳐진 나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일으켜 주는 인생 선배들과 내 잘못을 고쳐주는 어머니의 사랑어린 충고, 견딜 수 없을 것 같던 고통을 먼저 겪은 친구가 보내주는 따뜻한 위로의 손길을 통해 얻은 ‘지혜’는 생각에 머물고 마는 ‘지식’과 다릅니다. 지식은 ‘앎’에서 그치지만, ‘지혜’는 아는 것을 살아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나와 너’의 관계의 미학은 묵상에 좋은 도움이 됩니다. 가끔 교회생활이 힘들고 귀찮아질 때가 있습니다. 성당에서 상처받는 일이 싫고, 보기 싫은 신부님이나 수녀님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내 생각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나의 영적 갈증을 풀어주지 못하는 교회 현실이 답답하기도 합니다. 솔직히 ‘너’ 없는 신앙생활에 빠지고 싶은 충동도 듭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 결코 이웃을 떠난 나 홀로 신앙이란 없습니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공동체적입니다. 신앙인이란 ‘너’의 삶의 고백들과 신앙 체험들로 ‘나’를 성숙시키면서도, ‘너’를 통해 다가오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놀라운 발견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하느님을 필요할 때만 부르는 대상 곧 ‘그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인격적인 ‘너’ 곧 ‘나’를 참된 ‘나’로 만들어 주는 사랑아신 분으로 대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하는 이와의 만남을 떠리는 마음으로 기다리게 하는 ‘아름다운 너’로 우리 앞에 서십니다.
신앙인에게 삶이란 너 없이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며, 나 없이 너만 바라보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삶은 모순덩어리인 내가 참된 ‘너’를 만나 새로운 내가 되는 체험입니다. 여기서 참된 ‘너’는 볼 수 없는 하느님을 내게 드러내주는 나의 이웃입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가진 이웃! 신앙인은 이웃과 만나도록 초대해 주시는 하느님을 향해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