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인지 시 원고
1. 이팝나무
-光州 오월의 슬픈 밥
이슬은 본래 슬픔이 아니다
지상으로 떨어져 사라진 뒤에
견딜 수 없는 슬픔이 된다
밥솥이 끓는다
끓다가 잦아들기를 기다리는
저 뜨거운 입자, 그것은 명치 끝 슬픔
마침내 고봉밥
光州 도동고개 늘어선 가로수가 하얗다
이슬이 지기 전에 가지마다
소복 입은 밥의 덩어리들
저토록 눈부신 행렬을 보았느냐?
아이야 맘껏 배를 채우거라
배를 채워 함께 슬픔이 되자
망월로에 오월이 오면
뜨거움을 견디는 슬픔이 되어 걷자
2. 까닭
눈발이 날리던 주말
광주 광천동 꿈의궁전 예식장
훤칠한 꺽다리 신랑의 혼주석에
초로의 여인이 혼자 앉아 있었다
빈 의자 하나가 왜 그리 쓸쓸한지
뷔페식당 산해진미가
된통 맛이 별로인 까닭이나
카랑카랑한 주례사에
고개를 떨구던 여인의 눈물을
나는 알 까닭이 없다
3. 늙은 호박
오메~ 으째야쓰까잉~
밭두렁에 저 호박 좀 봐
남세스럽게 엉덩짝을
어따 내두르고 난리여
소피 다 봤으면
언능 치마 내리더라고
뭐시라고?
생긴 대로 살 껴
누가 좀 보면 어뗘, 닳간디
얼굴 밴밴한 것들이
늙어빠졌다고 어림 반푼 쳐주간디
그려 그려
생긴 대로 살드라고 암만-
근디 뭘 을매나 묵고
엉덩짝만 고로코롬 키웠는감? 뻘거니-
4. 지문 하나
등산길
생태복원지역 표지판 안쪽으로
까치 한 마리 주검을 보았다
허공에 깃을 치다가
먹이를 찾던 지상에 마지막 지문을 찍었다
서둘러 찾아온 바람이
까치의 깃을 쓰다듬어 염을 하는데
슬쩍 지나치는 방관자
바람만도 못한. 참 못됐다
바람의 은덕으로 신령스런 산의
생태는 복원될까
산 채로 걷다가 시큰거리는 발등이
까치의 뼈마디 녹아내리듯 지문을 남기면
그때의 주검은 누가 애도해 줄까
판독이 불가한 지문 하나
어느 바람이 호호 불어줄까
5. 멀건 김칫국
눈감고도 가위질은 척척 인데
눈뜨고연애 한 번 못해봤다
까까뽀까 미용실 꺽다리 총각
싱글벙글 저울질이 한창이다
아직 말도 못 붙인
순두부집 순심이가 물렁할까
단골이 된순살치킨집
영심이가 더 물렁할까
멀건 김칫국에 배가 부르다

경기도 수원시 칠보로129번길 16 가동 B02호(호매실동 풍림빌라)
夏林 안 병 석(010, 2617-4785)
한국한비문학 신인상
서은문학, 팔도문학동인
한국아파트신문 시 필진
평택 아주2차아파트 관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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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결혼 40주년
꿈에 갈래머리 손녀의 얼굴이
유난히 둥글게 보이더니 오늘 아침
허공에 길을 내던 꽃이 피었다
벽을 더듬던 두 개의 줄기가
마주보며 깍지낀 덩굴손으로
하찮은 미열에도 이마를 짚었으리라
외진 단층집에서
화장실이 따로 딸린 이층집으로
함께 이삿짐을 풀어
품 깊숙히 혈관에 핏물을 나르던 꽃
빛이 바랜 이불을 털어
허공에 길을 내던
아내의 손금을 점령한 여정들
잎이 푸를수록 혈맥은 붉어서
꽃을 매달기엔 높아보이던 한 생애
익숙한 빛깔의 꽃잎이
앳된 걸음마를 배우는 아침
여명을 걷어내며
내 귀울음 엿듯다 속살이 여물어버린
40이라는 숫자가 딸의 나이만큼 낯설다.
2. 나이 탓
촘촘하게 엮은
곰팡내 나는 실크 넥타이
조카 녀석 예식장에 가려고
차려입은 양복 소매가 길다
허우대야 의젓한데
남에겐 얼마나 어눌해 보일까
구두를 꺼내 문지르는데
쏟아지는 아내의 지청구
꾸밀 것 없는 내가 꾸물댄다고
핀잔을 듣다니
젠장-
가슴을 싸맨 브로치와
나비 문양 버선코가 날렵한
아내의 그림자를 밟을까
조심스러운 날
가다 서다 막히는 길
헛 브레이크라도 한 번
콱 쥐어박을까 보다
에이-
참자
3. 어지럼증
전씨 일가 29만 원의 실체가
두 줄 철로위에덜컹거린다.
발등이 부어오르는 기차는 달려야 하고
종착역은 아득한데
어지럼증을 참는 건 어차피 승객의 몫이다.
기차는 줄기차게 외길을 내닫고
조명등은 아까부터 나만 노려본다
승객의 표정은 두 부류여서
의자의 방향에 따라 절반은
멀어지는 풍경에 무표정이고, 절반은
다가서는 미래에 말을 건다
터널을 지날 때마다 허기를 때운
가락국수가 토막 나고
강을 건널 때마다 익숙한 풍경이 단절된다
기차는 목이 쉬었는지 우는 걸 잊었다
발등이 조금 부었을 거다
읽다가 개켜 둔
소화가 어려운 신문의 활자들
내 어지럼증은 도지고 있다
종착역은 당당 멀었다
아직은 견딜만하오-하림 안병
4. 上林의 바람
귀 열어 듣는 일이 보는 일만 하겠어요?
언제 적 바람 上林*에 가 보았으면
휘도는 길 끝자락에 上林
길이라도 내었으면
飛鳥의 날개 속에 꽃무릇을 숨겨두고
연리목* 붉은 허리 안아보고 싶어요
뿌리는 본시 달라도
몸을 섞어 사옵니다
기다림 견디어 이끼 돌만 홀로 서서
단풍잎 질 줄 몰라
한 千 年 孤雲* 임 곁에
눈을 뜨는
바람아
-上林* : 경남 함양읍에 고운 최치원이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둑을 쌓아 만들었다는 울창한 활엽수림.
-연리목* : 뿌리는 다르지만 줄기가 이어져 한 나무로 자라는 나무.
-孤雲* : 신라말의 문장 최치원의 號. 함양 태수를 지냄.
5. 하찮은 궁금증
돌멩이에 지느러미를 달아주지 않아
강물 밑바닥에 숨도 못 쉬게 하시고
깡마른 낙엽 하나를 수심을 모르는
샛강에 떠내려 보내시는지
남강 축제장에 찾아와 그 많은 불빛을
강물에 허우적거리게 하시고
바람은 모래 운동장에 벌씌우고
문풍지를 바르는 촌노의 손등에
주름만 주시는지
또 몇 광년을 달려온 별빛을
양동이 물에 씻게 하시고
왕눈을 부라리는 샛별을
뜬눈으로 토닥이고 계시는지
머리를 쥐어짜는 이 많은 궁금증을
모른 체하시는 야속한 하느님
6. 낙관
오래된 아파트 보도가 실금이 가더니 이 없는 할머니 볼처럼 함몰되었다. 시멘트 몇 포 구해다가 말끔하게 단장을 한 다음 날. 누군가 불립문자로 발자국 낙관을 꾸욱, 두 개나 찍어놓았다. '출입금지' 표지를 못 읽는 고양이 소행이다. 자세히 보니 발자국 낙관이 아주 그럴싸하다. 관리비 대신 소장 낙관을 찍어주는 고양이가 고맙다.
경기도 수원시 칠보로129번길 16 가동B02호(호매실동 풍림빌라)
하림 안병석(010. 2617-4785)
한국한비문학 신인상
서은문학, 팔도문학동인
평택 아주2차관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