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코이 쇼이치 編
1972년 1월 24일 태평양에 위치한 미국령 괌 섬의 정글.
폭포가 있는 탈로포포(Talofofo) 강가에서 새우를 채집하던 괌 토착민 차모로족 두 사람이 강가를 배회하던 수상한 사람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원주민들이 이 사람을 붙잡으면서 잡으려는 자와 도망치려던 자의 몸싸움이 시작됩니다. 허리가 굽고 깡마른 모습의 이 사람을 본 토착민은 자신들이 증오하는 일본군으로 판단해 현장에서 총으로 사살하려 했으나 다른 사람이 말리는 바람에 붙잡혀 괌 경찰에 넘겨집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은 괌에서 차모로족과 미군들을 대량학살함으로서 원주민들은 지금도 일본을 증오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종전 초기에는 밀림에 남아있던 일본군 패잔병 일부가 원주민들에게 발견되어 사살되는 일도 종종 있었다고 하네요.
흐트러진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 때 묻은 얼굴에 나뭇잎을 몸에 두른 이 사람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곧 신문의 1면으로 실렸지만 오랜 기간 동굴에 웅크리고 숨어있었던 탓에 똑바로 걷기 힘들어 했습니다. 겉모습을 보면 그는 사람 모양을 한 원숭이처럼 보였지만 3개월간 재활치료를 받으면서 영양상태가 좋아지자 점차 신체와 심리적 건강을 회복합니다.
국적은 일본, 이름은 요코이 쇼이치(橫井庄一), 그가 기억하는 연도와 현재를 대입해 얻어낸 그의 나이는 57세, 태평양전쟁 때 일본에게 점령당한 괌을 탈환하려는 미군의 상륙작전에 맞서 저항하다 포로로 잡힐 것이 두려워 패잔병들과 함께 밀림으로 숨어든 그의 계급은 일본군 오장(하사)였습니다.
1915년 일본 아이치현에서 태어난 요코이 쇼이치는 20세에 군에 입대해 제대했지만 태평양전쟁 발발로 다시 영장이 나오자 1944년 제38연대 하사(오장)의 계급으로 점령지인 괌의 수비대원으로 배치되었습니다.
그해 7월에 미군이 일본에 빼앗겼던 괌 탈환을 위해 진격하자 일본은 완강히 저항하다 무차별적인 함포사격에 이은 상륙작전에 일본군 2만여 명이 전사했는데, 그 전투에서 미 해병과 육군은 3,000여 명(7,000여 명 부상)이 전사한 반면 일본군은 1만8,000여 명(포로 1,250 명)이 숨졌습니다. 그 중 상당수는 항복하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본국의 비인간적인 옥쇄명령에 따라 자결한 군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육군 오장 요코이 쇼이치와 남은 패잔병들은 자결을 택하지 않고 도망쳐 깊은 밀림 속으로 은닉해 들어갔고, 그렇게 살아남은 대다수의 일본군은 보급이 끊겨 밀림과 바위굴에서 굶주림으로 죽어가다 살아남은 100여 명은 미군에 항복했습니다.
그러나 항복은 군인의 치욕이라 생각했던 요코이 쇼이치는 뜻을 같이하는 군인 두 명과 함께 밀림에 남기로 했고 그 후 28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그는 계속 혼자 남았죠. 요코이는 괌의 깊은 산속 대나무 숲 중앙에 총과 총검으로 동굴을 파고 몸을 숨긴 채 과일과 쥐, 개구리 등을 잡아 날 것으로 먹었습니다. 군복이 낡아 찢어지자 나무껍질을 엮어 옷을 만들었고, 종려나무 잎으로 견대를 만들어 사용하며 낮에는 동굴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야생동물처럼 먹을 것을 구하러 밖으로 나왔습니다.
괌은 적도 부근의 열대기후를 가지고 있는 지역이며 강수량이 충분하고 연 평균기온도 낮지 않아 원시적 생존이 가능했습니다. 요코이는 은신생활 초반에는 불을 피우는 연기로 인해 미군에 발견될까 두려워 음식을 익혀먹지 못 했습니다. 그는 이름도 모르는 열대과일들을 마구 먹어 구토와 설사에 시달렸고, 익히지 않은 야생돼지고기를 먹고 복통으로 고생하기도 했답니다. 처음에는 3명이 공동생활을 했으나 나중에는 다른 땅굴을 만들어 혼자 떨어져 지냈고, 함께 생활하던 두 명의 동료는 병사하거나 먹을 것을 구하다 열대호우로 불어난 강물에 휩쓸려 죽고 자신이 발견되기 8년 전부터 혼자 남았다고 했습니다.
일본 패망 후 미군은 괌 전역에 무장해제와 투항을 권하는 일본어 전단을 뿌려 일본 패잔병들의 항복 독려와 종전사실을 알렸습니다. 하지만 종전 7년이 지난 1952년이 되어서야 뒤늦게 전단을 발견한 쇼이치는 그제서야 전쟁이 끝났음을 알았으나 군에 있을 때 미군에 투항하거나 사로잡힌 일본군은 미군이 사지를 찢어 죽인다는 세뇌교육을 받았기에 원주민들에게 잡혀 이동하던 중에도 자신도 몸이 찢겨 죽을까 두려워 벌벌 떠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가 살던 동굴 안에는 소량의 생활도구들이 발견 되었는데, 군에서 쓰던 야전용 조리기구들과 더불어 전쟁 당시 가지고 있던 소총은 전혀 관리를 하지 않아 녹이 심하게 슬어 사용이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참고로, 전혀 손을 대지 않아 녹이 슨 총은 나중에 쇼이치의 군인정신을 평가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사실을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 했습니다.
어쨌든 이 사실을 안 일본정부는 쇼이치의 귀국을 서둘렀습니다. 그가 괌을 떠나 비행기로 귀국하는 모습은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하며 일본 전역에 TV로 생중계 되었는데 밀림생활 28년 만에 거동이 불편한 몸을 부축받으며 일본으로 돌아와 준비된 휠체어에 앉아 눈물을 흘리던 요코이의 첫 일성은 “부끄럽게도 살아 돌아왔습니다.” 라는 것이었죠.
그는 여전히 태평양전쟁 당시의 군인의 마음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기에 죽지 않고 살아서 일본으로 돌아오는 것을 군인의 치욕이라고 생각해 공항에서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부끄럽게 살아 돌아와 면목이 없다는, 세월을 초월한 그의 말 한마디는 1972년 그 해 일본 최고의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전후 70년대의 일본은 눈부신 경제성장으로 인해 도시를 중심으로 서양식 고층빌딩이 빠르게 늘어나는 풍요로운 모습에 요코이는 크게 놀랐습니다. 그는 정부에서 지급하는 보상금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도 몰랐지만, 결혼을 하고 부인이나 주변의 도움으로 차차 여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요코이 쇼이치의 오랜 밀림 생활이 TV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었고, 그는 여러 단체의 초청강사로 바쁘게 불려 다니거나 말년에는 토기를 구우면서 편안하게 살다가 1997년 82세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는 일본 내에서 장기간 문명세상과 떨어져 살던 사람이 사회로 복귀한 성공적인 사례로 여겨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요코이 사후 그의 아들은 요코이가 대일본제국의 군인이라는 사실을 영광스러워 했으리라는 대다수 일본인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아버지가 종종 괌을 방문했으며 그곳의 생활을 많이 그리워했다고 말해 그를 일본군인정신의 표본으로 추켜 세우는 등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던 일본 우익세력들을 실망시키기도 했습니다.
밀림에서 붙잡힌 후 경찰조사를 위해 이동하는 요코이 쇼이치. 아래는 땅굴의 구조를 보여주는 그림으로,
일본 요코이 쇼이치 기념관에 있는 내부도이다. 그가 살던 땅굴은 내부출입이 엄격히 금지된 덕분에
지금도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어 괌을 방문하는 많은 일본인들의 필수 순례지로 여겨지고 있다.
요코이 쇼이치 발견 당시 이 소식을 전하는 일본 아사히 신문 1면 기사. 괌의 밀림에 숨어있던 옛 일본군 병사가 28년만에 기적적으로
발견 되었다는 사실과 현지 당국의 보호를 받고 있으며 2주 후 귀국할 것이라는 내용 등이 담겨져 있다.
첫댓글 작가 대니얼 디포가 본인의 여행경험과 상상력으로 탄생시킨
로빈슨 크루소는 명작이 되었는데 여기 일본군 패잔병 쇼이치는 전쟁의 참상으로 야생인이 되어 살았군요 군대교육에 희생된 자결한 동료포로들 그리고 살아돌아온 그를 이용하려던 정치세력을 실감하며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자연인에 대한 향수를 안고 토기를 구우며 마지막 생을 마감한 쇼이치를 군인정신이 투철했다고 말을 할수 있을지요 올려주신
세심한 자료를 통해 다시 군국주의를 곱씹어봅니다 감사합니다
박정해 선생께서 엊그제 카톡방에 올려주신 '오늘의 소사' 안내에서
일본 황정군조 요코이 쇼이치 발견에 대한 소식을 읽자
제가 어렸던 70년대 초 신문을 보시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던 아버님이 떠올랐습니다.
아버님도 이 사실을 무척 신기하게 생각하셨죠.
인터넷 등에는 그가 28년간 말을 하지 않아 언어능력을 상실해 복구시키는 일에 노력했다던데
사실이 아닙니다. 그는 발견되기 8년 전까지 두 명의 동료와 소통하며 함께 살았거든요.
그가 발견되고 아시아 몇 곳의 밀림에서 패잔병들이 추가로 나왔습니다.
갑작스럽지만 요코이에 대한 글을 쓰도록 동기를 제공해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