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퍼
조옥상
한 청년이 무대 위에서 현란한 불빛 받으며 노래 부른다. 숨이 찰 정도로 빠른 몸짓이 역동적이다. 객석에서도 손뼉을 치며 다 같이 어깨를 흔든다. 무슨 신나는 일이 일어날 조짐이다. 물끄러미 바라보다 무대 가까이 다가앉았다. 래퍼 청년이 손을 내민다. 같이 흥겨워하던 어떤 젊은이가 주저 없이 손을 잡자 무대 위로 끌어당긴다. 이웃나라에서 나라의 수장을 뽑는 상황에 시선이 집중되는 시간, TV를 보다 잠이 들었다. 무대 위의 그 청년은 한을 풀어내기에 그렇게 신바람 나게 몸을 흔들었던 것일까. 심중의 의사를 입 밖으로 드러내는 말, 말. 그 소리의 구심점에는 소통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들어서 기쁜 소리든, 아니든 그 말은 소리의 파장을 타고 타인에게 전해진다. 가슴에 응어리진 곡진한 덩어리가 빠져나가는 소리의 파장은 심하게 너울을 친다. 태양이 뜨겁게 내리쪼이는 들판이다. 푸른 하늘의 뭉게구름이 빠르게 이동한다. 드넓은 밭에서 목화 따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원래 타고나기를 건장한 골격으로 태어난 사람들이다. 혹독한 일상 속에서도 지극히 낙천적이다. 광채 나는 눈, 건강한 피부,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계속 흥얼흥얼 노래를 부른다. 오랜 세월 억압당했던 선조들에게 사죄하라는 메시지를 노래하는지, 배고픈 슬픔을 호소하는지, 아니면 멀리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며 애틋함을 노래하는지, 목화 따는 그들의 일상은 과연 어땠을까. 하나같이 어느 곳에도 꿈은 없다고 절망했을까, 아니면 바로 여기에 꿈이 있다는 희망으로 전진했을까. 긍정과 부정의 차이는 낯선 괴리처럼 극과 극이다. 목화밭에서 계속 몸을 흔들며 노래하는 건강한 그 청년은 비록 그림 속에서 만난 인물이었지만 희망을 향해 `꿈은 바로 여기에‘ 라고 흥겹게 노래했던 것 같다. 랩이 시작된 때는 누욕에서 디스코 열풍이 불던 1970년대 흑인 빈민가거리에서 댄스파티를 열풍적으로 시작하면서 DJ가 중간 중간 노랫말을 되뇌이며 마이크를 사람들에게 들이대며 흥을 돋워 주는 것으로부터 보급되었다 한다. 도시지만 흑인 빈민가에서 시작되다 랩 가사로 흑인들의 고달픈 삶을 묘사해 읊었다 하니 아마도 그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으리라. 1980년대를 지나면서 록 가수를 토해 대중화에 이르렀다지만 랩의 전성기는 지금까지 계속 발전하고 있다. 래퍼는 리듬에 맞춰 중간 중간 반복적으로 소리를 내며 역동적으로 몸을 흔들어야 제격이다. 신명이 난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어깨가 들썩여지는 음악이다. 하지만 정확한 랩의 변천사라든지, 한때 과격한 가사의 논란에 대해서 거론되었던 문제는 내 좁은 식견으로는 모르는 것이 마땅하리라. 다만 약자였던 흑인들의 철저한 한을 풀어내는 데 일조했다는 것만으로도 랩이 위대해 보여 관심 있게 듣고 즐기는 편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나도 가끔씩 래퍼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목화밭에서 한을 풀어내며 해방을 꿈꾸는 노예는 아니었지만 내게도 묶여있었던 사연이 있지 않는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편협함, 물질 만능주의에 익숙해진 허영심, 자아실현을 하지 못한 아쉬움에서 오는 후회, 이런 애착심들을 과감히 풀어내야 할 사연들이 돌덩이처럼 놓여 있다. 현란한 불빛이 춤추는 무대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형광등 아래면 어떤가, 설거지하며 몸을 좌우로 흔들며 반복적으로 읊어 낸다면 오래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갈 것이다. 랩은 대중적이다. 폭포 밑에서 피를 토하며 얻는 득음의 경지가 아니어도 나름 유창하게 흥을 돋우며 부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음정, 박자도 자유자재로 붙인들 그 누가 틀렸다고 지적하지 않으리니, 본인이 하고자 하는 말에 장조를 붙이든 안 붙이든 아무 상관없으리라. 중얼대는 소리가 똑똑히 들려도 좋고 입속에서만 대충 얼버무려도 문제가 안 될 것이다. 무료한 시간, 한 가락 뽑아내는 창도 괜찮을 것이고, 팝도 재즈도 고상하게 뽑아내는 가곡도 좋을 것이다. 그 속에서 묻어 나오는 희로애락에 천착된 빛깔들이 흥겨운 리듬을 타고 허공 속으로 저마다의 날개를 달고 거침없이 자유롭게 날아갈 테니까. 그러고 보면 누구나 다 래퍼가 될 수 있으리라 본다. 좋은 감정이든 언짢은 기분이든 현재도 미래도 숱하게 쏟아내며 읊었던 가사 모두 래퍼의 노래가 아니겠는가. 한동안 살았던 강마을의 저녁이면 석양이 수면 위에서 춤을 추었다. 그런 해거름에는 강가를 거닐며 사색에 잠겼다. 가끔 이장님 댁 할머니께서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며 강가에 나와 앉아 계셨다. 어느 날인가, 팔순이 다 되신 할아버지께서 며칠 못 넘기신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다. 하염없이 물결을 바라보시는 할머니의 굽은 등으로 황혼 빛이 조용히 울고 있었다. 물안개가 자욱이 피어오르는 강 언덕으로 요령 흔드는 소리가 들린다. 강 건너 털보아저씨의 구성지고도 애달픈 목소리다. 이장님 댁 할아버지께서 저 세상으로 가신 것이다. 바로 뒷산으로 모시는 중인데 상여가 강가를 휘돌아 산으로 올라가는 참이다. 할머니는 아픈 다리를 끌며 뒤따르신다. 강 건너 논에 평생 물꼬를 보러 다니셨을 망자를 생각하니 가슴이 짠한데, 상엿소리마저 애절하기 그지없다. 평소 원두막에 앉아 창을 뽑던 털보아저씨의 질박하고도 곰삭은 목소리가 한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어어야, 어허야.’ 흔드는 요령소리에 맞추어 상두꾼들이 ‘어어야, 어허야.’ 후렴을 붙인다. 키다리털보 아저씨의 구구절절한 상엿소리가 절창이다. 우리의 장례문화는 곡진한 아픔이 배어 있다. 은연중에 접해도 숙연해진다. 땀을 흘리며 산날망에 오르던 상두꾼들이 오후에야 흰 수건을 목에 두르고 내려온다. 요령잡이 털보 아저씨는 자신의 한을 할아버지 상여에 얹어 후련히 다 풀어냈는지 얼굴빛이 환하다. 그날 요령잡이의 구슬픈 랩은 산천을 울리고 온 동네를 울렸다. 할머니께서 강가에 털썩 주저앉아 계신다. 강물 빛이 새벽 이내처럼 푸르다. 며칠이 지났어도 할머니의 동공은 슬픈 나머지 희부옇다. 조심조심 발을 내디뎠다. 할머니의 작사 작곡 랩이 시작되고 있었다. 떨다가 울다가 지팡이로 툭 툭, 돌을 치며 장단을 넣지만 음정 박자는 어설프다. 하지만 곡진한 영혼의 소리가 가슴을 후린다. “왜 생겼나, 왜 생겼나, 백 년도 못 살고 떠날 걸 왜 생겼나.”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시집와서 고생을 밥 먹듯 하셨을 텐데 술고래셨다던 할아버지가 그새 그리워 눈물을 흘리며 한탄하시는 건지, 집에서는 차마 자식들 눈치 보여 못 울고 강가로 나오신 것일 게다. 강물은 때때로 객석도 되고 할머니보다 더 늙은 엄마가 되어 따뜻한 품으로 안아 도닥여준다. 슬픔에 접은 할머니의 힘없는 가락을 오냐, 오냐, 알아들었다며 유유히 흘러간다. 언제부터인가 아이돌이나 젊은 뮤지션의 역동적인 노래와 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고 어깨가 들썩여진다. 누가 보면 채신머리없다고 픽 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축축 처지는 리듬보다는 적당히 흥겨운 랩 스타일 팝, 록, 디스코, 재즈가 점점 괜찮은 것으로 기호가 바뀌고 있으니 아무래도 연륜에 생기가 필요한 모양이다. 순례자의 길이 인생여정이라면 그 강에서 어찌 좋은 사람만 만나고 유쾌한 일만 있으랴. 그런 와중에도 밝고 명랑하게 기분전환하며 사는 것은 만인의 희망사항일 것이다. 하면, 낙천적인 가치관의 대전환이 필요하리라. 근심은 쌓아두면 삶의 리듬이 깨지고 건강을 해친다 하니 좋은 방법을 모색해서 털어버려야 할 것이다. 나름 자마다에게 맞는 방법이 있을 테지만 우선 음악이라는 장르에서 찾아본다. 대중가요도 좋고 빠르게 읊어대는 랩도 좋다지만 질박한 목소리로 풀어내는 우리의 소리도 썩 괜찮다. 우리 선조들은 참 지혜로웠다. 국악의 노랫말을 들어보면 가슴 깊이 맺힌 멍울을 대신한 사연처럼 구구절절하다. 곡조의 높낮이도 최고조를 이룬다. 가슴을 후리듯 뽑아내는 절창 속의 온갖 시름을 삭혀주는 치유가 들어 있다. 굽이굽이 넘는 고개고개는 카타르시스 자체다. 소리를 내다보면 몸과 마음이 시원해지기 때문이다. 과학문명이 앞서가는 시대일수록 자연치유가 절실하다. 그렇다면 스트레스가 쌓인 몸을 풀기 위해서 굳이 화려한 무대를 찾을 것까지 뭐있겠나, 설거지하는 싱크대 앞이 무대요, 마음속으로 흐르는 강이 무대인 것을, 조명이 필요하다면 삶 자체가 현란한 불빛 아니던가. 비춰 주는 만큼 보여주고 아픈 만큼 토해내자. 그러기 위해서 자신감 있는 래퍼가 되어 진솔한 삶의 무대로 가볍게 올라가 노랫가락이라도 한 곡조 뽑아내자는 것이다. 큐, 소리와 동시에 내 여정의 무대에 불이 켜졌다. 신명나는 몸짓으로 올라가 손을 흔든다. 찬란한 불빛을 받으며 신나고 흥겹게 ‘내 꿈은 여기에’하는 희망을 노래하는 한 나는 이미 확실한 래퍼인 것이다. 『수필과 비평』2014년 1월호 제147호 신인상 수상작. 조옥상
전직 교사. 토지문학상 수필 대상. 동서커피문학상 맥심상. 2013년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 수필 대상 2014년『수필과 비평』으로 등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