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산리(農山里)
본 면의 남서쪽 끝에 자리하여 주상면 · 위천면 · 북상면과 맞닿는다. 원농산 · 금계 · 입석 · 손항 · 온곡 다섯 마을이 있다.
- 원농산(元農山), 성가막골
400여 년 전에 창녕 성씨가 마을을 열어 “성가막골”이라고 한다. 왕무덤골 : 마을 남쪽 200미터, 주상면과의 경계 산속에 있는 골짜기, 옛날 싸움에서 죽은 장수의 무덤이라는 큰 무덤 인 왕무덤이 있다.
- 금계(金鷄) · 접재실
원농산의 냇가 동쪽 한쪽을 금계라 하며 이전에는 “접재실”이라 하였다.
- 입석(立石)
고제면 사무소 소재지로서 고려 때에는 절터였다고 하며 큰 돌이 서 있으므로 선돌 · 입석이라 한다. 높은 다리가 있었 으므로 높은다리 고제라는 이름이 생겼다. 신선들이 살던 곳이라 선들, 선평(仙坪)이라고도 하였다.
- 손항(巽項), 솔목
마을 북쪽 손방(巽方)이 좁고, 솔다하여 “솔목”이라 한다. 약 300년 전 팔계 정씨가 마을을 열었다고 전한다.
- 온곡(溫谷), 더우실
겨울에도 따뜻하고 아늑하므로 “더우실”이라 한다. 260 ~ 70년전에 경씨와 양씨(慶氏, 梁氏) 들이 마을을 열었다고 한다.
개명리(開明里)
본디 이 골짜기를 거문골이라 하였다가 300여 년 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여 개명하였으므로 개명골이라 한다. 수유동 · 괘암동을 개명리 1구, 2구에 개명골이 있고, 북쪽 끝에 물안실이 있다.
- 수유동(水踰洞), 무너미
마을 뒷산너머 개발골 골짜기 물을 끌어 넘겨서 농사지었으므로 “무너미”라 한다. 250여 년 전 진양 하씨가 마을을 열었다고 전한다.
- 괘암동(掛岩洞)
마을 뒤 농삿길에 긴 돌이 길 가운데 걸려 있으므로 생긴 이름이다. 250여 년 전 경주 김씨가 삶으로써 마을이 되었다.
- 개명골(開明 2區)
300여 년 전 성산 배씨가 마을을 열었다 하며, 상개명과 하개명 두 담으로 나눈다.
- 수내(水內), 물안실
마을 곁의 냇물이 마을을 안고 있는 듯하여 “물안실”이라 한다. 옛날에는 수다리(水多里)라 하였다. 300여 년 전 진양 하씨가 마을을 열었다. 전라북도 무주군과 경계를 이루는 빼재에서 흐르는 물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서 삼포 · 하수내 · 신기골터 · 상수내 · 빼재 같은 작은 마을이 흩어져 있다.
봉계리(鳳溪里)
탑선 · 지경 · 소사 · 원기 · 원봉계 · 내다 여섯 마을이 있다.
- 탑선(塔仙)
옛날 죽산 전씨(竹山全氏)가 마을을 열었다 하며 마을 앞에 높이 1미터의 2층 석탑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동쪽 원탑선을 “탑서이”라 하고 서쪽에 소사, 북쪼겡 지경이 있는데 이들 세 담을 통틀어서 “탑서이”라고 부르며, 대덕산과 삼봉산 사이에 안긴 높이 700미터의 고냉지대이다.
- 지경(地境)
옛날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으며 지금의 영 · 호남의 경계이다. 경상도 땅 안에 있으므로 “지경내”라고 하며 장포 (長浦)라고도 썼다.
- 원기(院基)
옛날 성초역에 따른 원(院)이 있었으므로 원터라 한다.
- 원봉계(元鳳溪)
옛날 마을 근처 골짜기마다 불당이 많아서 “당골”이라 하다가 한말 이곳에 살면서 동학혁명 때 치안유지에 공이 있었다는 하종호(河宗浩)의 호 봉서(鳳棲)에서 새봉자를 따서 봉계라 고쳤다 하고 300여 년 전 엄씨(嚴氏)가 마을을 열었다고 전한다.
봉산리(鳳山里)
서북쪽에 솟은 두루봉이 봉황새 모양이라 봉산리라 한다. 와룡 · 용초 · 구송 · 둔기 네 마을이 있다.
- 와룡(臥龍)
마을 뒤편에 삼봉산이 솟아있고 땅 모양새를 보고 용강(龍崗)이라 하다가 와룡 선생이 시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300여 년 전 인천 채씨(仁川 蔡氏)가 마을을 열었다고 한다.
- 용초(龍草)
광복 후에 용호동(龍胡洞)과 성초(省草) 두 마을을 어울러서 붙인 이름이다. 성초는 옛날 성초역이 있던 곳이다. 300여 년 전 밀양 박씨들이 마을을 열었다고 전한다.
- 구송(九松)
괴정 · 구룡 · 송정(槐亭 · 九龍 · 松亭) 세 마을을 광복 후에 합쳐서 지은 이름이다. 300여 년 전에 삼척 진씨(三陟 陳氏)가 마을을 열었다고 한다.
- 둔기(屯基)
옛날 신라와 백제가 싸울 때 군사가 진을 쳤던 곳이라 “둔터”라 하고 400여 년 전에 손 · 오 · 강(孫 · 吳 · 姜) 세 성씨가 살았으므로 “손오강터” 라고도 한다.
궁항리(弓項里)
고제면의 큰 골 남쪽 어귀에 자리하고, 북쪽에 학림, 동쪽에 원궁항, 남쪽에 산양이 자리 잡고 있다.
- 매학 · 방학 · 임당 세 마을을 광복 후 합하여 학림이라 하였다. 300여 년 전에 합천이씨가 들어와 삶으로써 마을이 되었다 하고 매학(梅鶴)은 매화나무와 학이 있었다 하고, 방학(放鶴)에도 학이 있었으며, 임당(林堂)은 지금은 없어졌 으나 울창한 숲속에 자리하였다고 전한다.
- 원궁항(元弓項), 활목
마을 둘레의 산과 마을 복판을 가로지르는 개울이 활과 같아서 “활목”이라 한다. 260여 년 전에 신창 표씨가 마을을 열었다고 전한다.
- 산양(山陽) · 뫼너미
산 넘어 남쪽을 바라보는 마을이라 산남(山南) “뫼너미”라 하다가 산 밑의 양지 바른 곳이라 산양으로 바뀌었다. 300여 년 전에 삼척 박씨가 함양 수동에서 옮겨 옴으로써 마을이 생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