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로남불(아시타비我是他非)
"내로남불"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줄임말이다. 아시타비(我是他非)는 사자성어로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는 뜻이다. 비슷한 말로 '내가 하면 투자, 남이 하면 투기"도 있다. 우리는 흔히 나에게는 유난히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영어로는 이중잣대(Double Standard)라고도 한다. 운전하다 보면, 지그재그 하면서 난폭하게 운전하는 사람들을 목격하곤 한다. 내가 과속할 때는 사정이 있어서 당연하게 여기고, 남들이 과속하면 비난하는 경우도 "내로남불"에 해당한다. 필자도 물론 그런 경험이 있다.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인 프리츠 하이더는 "행위자-관찰자 귀인 편향"이라는 말을 했다. 귀인이란 사람들의 특정한 행동에 대하여 여러 가지 원인 중 어떤 원인을 그 행동이 귀속시켜야 할지를 추론하고 결정하는 과정을 말한다. 예를 들면 똑같은 상황에서도, 자기 행동은 외적인 요인(예, 상황)에서, 타인의 행동은 내적인 요인(예, 성격)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 이솝의 우화에도 "신포도"가 나온다. 여우가 포도를 따 먹으려고 여러 차례 시도해도 잘 안되니까, "저것은 신 포도야" 하고 대상을 비난하고 자기를 합리화한다. 일종의 자기방어 기제다. 내로남불 또한 심리학적으로 보면 자기합리화이고 자기방어 기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객관적으로 살펴보자. 이른바 기득권 즉 가진 자들이나 방귀깨나 뀌는 사람들의 심리도 다르지 않다. 쉽게 말하면 밥그릇 싸움이다. 현재도 인간이 만든 모든 공동체에서 온갖 싸움과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왜 그럴까? 편 가르기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밥그릇 싸움이다. 그들은, "무조건 내가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고 주장한다. 싸움이 그치지 않는다. 왜 사람들은 인간관계를 힘들어할까? 다르기 때문이다. 왜 다를까? 신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렇게 좋아서 결혼했는데, 정작 결혼해서는 매일 쌈박질이다.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것과 함께 틀린 것을 구별해야 한다. 사람은 원래 다르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어찌 나와 의견이 같을 수가 있을까?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해 주면 된다. 다양한 사람들의 성격이나 의견이 다른 것을 그냥 다르다고 받아주면 쉽게 해결이 된다.
개그 프로에서 이런 유행어가 있다. "그건 니 생각이고". 그렇다. 서로 다양한 의견을 개진할 수 있어야 민주주의 사회이고 건강한 공동체라 할 수 있다. 배려와 용납이 쉽지 않다. 그러나 상대방이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지 (성격이 아니라) 그 배경이나 상황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예상외로 일이 쉽게 풀린다. 이런 일화가 있다. 어떤 아빠가 두 아이를 데리고 전철에 탑승했다. 두 아이는 천방지축으로 뛰어논다. 주변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린다. 애 아빠가 아이들을 돌보지 않고 방관한다고 비난을 퍼붓는다. 한참 후에 애 아빠가 어렵사리 말을 꺼낸다. "사실 조금 전에 애 엄마가 죽어서 묻고 오는 길입니다." 그 말을 듣던 전철 안의 모든 사람은 숙
연해졌다. 더는 아이들을 나무라지 않았다. 애 아빠에게 손가락질하지도 않았다. 똑같은 상황인데, 무엇이 바뀐 것일까?
"그럴 수도 있지"와 "그럴 수가 있을까?" 이 두 문장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르다. 내 가족들을 포함 매일 만나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차피 매일 얼굴 보는 사이라면 원수같이 지낼 필요가 없다. 상대방의 처지와 상황을 조금 더 이해해 주고 용납해 주면 된다. 큰 그릇이 작은 그릇을 품는 법이다. 작은 그릇은 절대 큰 그릇을 품지 못한다. 사무엘 스마일의 <인격론>을 읽어보면서 사람의 인품에 대하여 묵상해 본다. 어떤 사람의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도 인품이 없으면 미성숙한 사람일 뿐이다.
성경에도 이런 말이 있다.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들의 작은 티는 쉽게 보이는 법"이라고. 바리새인들이 그랬다. 당시 그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지만, 자신들의 들보는 바라보지 못하고 사람들의 티만 지적질했다. 인류의 구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비난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는 일을 자행했다.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하라." "회칠한 무덤"이라고 예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질타했다.
예로부터 선각자들이나 인품이 올바른 사람들은 정도를 걸었다. 시비를 걸어도 못 본 체했다. 일희일비하지도 않았다. 남들의 일에 대하여 덜 관심을 두고 자신의 인격 수양에 힘썼다. "나만 옳고 다른 사람들은 틀렸다"라는 전제를, "나도 틀릴 수도 있고 착각할 수도 있다"고 인정하자. 언제부터인가 희끗희끗한 머리가 보이고 점점 건망증도 생기는 것 같다. 잘 잊어버리고 잘 부딪히기도 한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나이가 들면, "지갑은 열고 말은 적게 하라(Less talk, much money)"는 명언이 있다. 사소한 일에는 가능한 양보하자. 다른 사람을 비난할 때, 두 손가락은 상대방을 향하지만, 나머지 세 손가락은 자신을 향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이진종 <시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