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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피에르항의 농무<4>
4.
봄이 가고 곧 여름이 시작될 것 같은 5월 하순이다. 황사 예보가 있더니 바깥은 온통 미세먼지로 뿌옜다. 박 관장은 선원회관을 나서서 초장동 쪽으로 걸었다. 천주교 부산교구 초장 성당까지는 15분정도 걸렸다. 시간이 되기까지 주차장 옆 등나무아래 앉아 잠시 기다렸다. 아침미사 집전을 위해 본당으로 건너가는 신부가 멀찌감치 목례를 하며 지나갔다. 오전 9시 50분, 수녀가 제대(祭臺)에 촛불을 점화하면서 미사가 시작되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스피커를 통해 수녀가 천상병의 시 ‘귀천’을 낭송하고 잠시 묵상의 시간을 가진 뒤에 <선교를 위한 기도>를 올렸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 그동안 저희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희 공동체를 크신 사랑으로 돌봐주신 그 사랑에 힘입어 우리 가족들도 그 사랑과 은혜를 이웃과 함께 나눌 것을 다짐하며 기도드립니다. 선교에 대한 저희의 무관심과 부족한 열성을 반성하며, 이제 저희는 앞장서서 주님을 증거하며 복음 선포에 힘껏 노력할 것을 결심하오니, 성령의 능력으로 저희를 도와주소서. 오소서, 굳셈의 성령님, 저희의 마음을 굳세게 하시고 복음을 전하는데 필요한 용기와 지혜를 주소서. 그리하여 저희가 친절과 온유함으로 만나는 사람들을 대함으로써, 그들이 진리의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합당한 도구가 되게 해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세상아. 존귀와 위엄이 그분 앞에 있고, 권능과 영화가 그분의 성소에 있네.”
<입당송>에 이어 사제가 <이사야9:1-7>과 <마태오4:12-17>을 낭독하고 강론이 있은 후에 다음과 같이 <보편지향기도>를 올렸다. ✞(사제)“형제자매 여러분, 아드님을 보내시어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주게 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필요한 은혜를 간절히 청합시다. 먼저 교회를 위해 기도합시다. 구원의 주님, 교회가 세상의 빛으로 환히 드러나게 하시어, 가난과 질병과 전쟁 등 절망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곳에 구원의 희망을 전하게 하소서.” ⌾(신도)“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이어서 사제가 ‘정치인을 위하여’, ‘난치병으로 고통 받는 이를 위하여’, ‘지역사회를 위하여’ 제목별로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영원하신 주님, 한마음 한뜻으로 바치는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신도들은 “아멘”으로 화답하고 차례로 강단 앞으로 나가 성찬에 참여했다. 미사는 한 시간 넘게 계속되었다.
박 관장은 공식적인 일이 없을 때면 미사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는 예배하며 사는 사람이었다. 선상생활을 할 때도 잊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앞에 꿇어앉아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는 ‘아버지께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요한복음4:23)는 말씀을 기억하며 오늘까지도 로사리오와 삼종기도를 드리는 것을 실천에 옮기고 있다. 성당에서 봉사하는 레지오 마리애 활동에도 참여하며, 미사 때는 사제를 도와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분배하는 일을 맡는다. 오늘까지 그의 생명을 연장시켜주신 것은 주님의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함이라 믿었다. 그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하느님의 선교에 동참하려는 열심을 품고 있었다. 하느님은 지난 날 망망대해의 거센 파도 위에 나뭇잎 같은 배를 붙들어주시고 어려운 순간마다 놀라운 지혜를 주셨기 때문이었다. 사무실 그의 책상 유리판 밑에는 <성녀 마더 데레사가 매일 바치던 기도>가 들어 있다. ‘······저를 통하여 빛나시어/ 저를 스치는 사람들이 모두/ 제 안에 깃들인 당신을 느끼게 하소서.······’ 그는 말씀을 묵상하고 봉사하며 살아가는 삶이 즐거웠다.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책상위의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박 관장님, 다음 주 토요일에 시간이 나시겠습니까?”
선원회관 결혼예식장 H사장의 전화이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대원산업 선원의 결혼주례를 부탁하고 싶어서요.”
“예, 시간을 조정해봅시다.”
“미리 말씀을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열흘정도 남았으니 그렇게 급한 것도 아니었다. 선원들 가운데는 밀고 당기던 혼사가 출국 일에 맞춰 진행되면서 갑자기 결혼날짜가 정해지는 때가 종종 있었다. 박 관장은 자신의 결혼도 시간적인 여유가 많지 않았던 것을 기억했다. 기도를 드릴 때마다 그의 해상생활은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보다 나은 삶을 이루기 위해 인생 황금기의 젊음을 불태우던 동료선원들의 모습들도 잊지 못한다.
1995년 7월, 초여름이었다. 눈물을 감추기 위해 선글라스를 끼고도 연방 흐르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훔치는 아내의 등을 쓰다듬어 위로하고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었다. 처자식뿐만 아니라 선원들의 안전과 선원가족들의 생계를 양어깨에 메고 떠나는 것이다. 자녀들은 한 치의 부정도 없이 깨끗하게 번 돈으로 공부시켜야 한다. 선원들과 그들의 가족에게도 최대한의 보람을 안겨주어야 한다는 다짐을 새롭게 했다. 김해공항을 이륙해 김포공항에 도착할 때 까지는 눈을 감고 지난 일을 되새겨 보았다. 철도공무원을 하다 노동운동에 참여했고, 정치에 발을 들여놓아 야당의 당원으로 젊은 패기를 불살라보았지만 여의치 않았다. 지인의 소개로 윤활유 사업에 손을 댔지만 실패로 막을 내렸다.
지난날 배에 대해서는 ABC도 모르던 그가 선원이 되었던 것은 어찌 생각하면 막장인생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서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자’는 자세로 열심히 일했다. 다른 길이 없다는 절박함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 성실하게 일한 덕분으로 갑판원에서 3항사로, 2항사로, 1항사로 승진하면서 이제는 선장의 막중한 책무를 맡게 된 것이다. 김포⟶앵커리지⟶프랑스에서 1박을 하고 포르투갈을 거쳐 라스팔마스까지 가야했다. 김포에서 앵커리지 까지는 7시간30분이 소요된다고 했다. 본사 직원들의 전송을 받으며 비행기 트랩을 올랐다. 비행기를 탈 때마다 생각나는 것은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려다보이는 높은 빌딩도, 거대한 선박들도 모두가 하나의 점에 불과했다. 알라스카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지상은 빙산의 연속이었다.
라스팔마스에 도착하니 기지장과 현지 교민 몇 분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가자. 나의 집 천성호로.’ 지난 날 2년간 정들었던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아스디칸 독야드에 계류되어 있는 C.S호에는 버스 편으로 밤 11시경에 도착했다. 박 선장은 이리저리 배를 돌아보고 기관실 구석구석을 살피며 차디찬 C.S호 선체를 두 팔로 껴안아 보았다. 선장으로서의 첫걸음은 마음이 무거우면서도 감격적이었다. 55명의 선원과 그들의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이었다. 또한 엄청난 재산을 그를 믿고 맡겨준 회사도 고마웠다. ‘C.S호야, 나를 도와다오.’ 오직 기도하는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좋은 꿈을 꾸고 힘찬 출발이 될 수 있도록 염원하면서 첫날밤을 보냈다.
출항을 하루 앞두고 선원들은 모두 라스팔마스 일주 관광을 내보내고 박 선장은 준비물을 다시 점검했다. 간식에 필요한 해바라기씨앗, 중국차 등 기호품도 충분히 챙겼다. 마지막 선박수리를 끝낸 C.S호는 기지항인 생피에르(Saint-Pierre)로 돌아와 첫 항차를 시작했다. 어장까지는 30시간의 긴 항해를 해야 할 것이었다. 수석1항사에게 스텐바이 포인트를 안내하고 사무실로 내려갔다. 선내 작업조를 편성하고 기관장을 불러 협조사항을 확인했다. 연인과 첫 데이트를 하는 것만큼이나 마음이 설레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본사에 출항 전문을 보내고 나서 현지법령에 의한 모든 보고사항도 일일이 점검했다. 항구를 벗어난 배는 서서히 속력을 올리기 시작했다.
북위44도 서경53도, 투망지점에 도착하자마자 그물목줄, 후릿줄, 전개판 목줄, 전개판을 차례로 내렸다. 전개판은 그물의 입구를 넓게 벌려 고기가 그물 속으로 들어가게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300미터 길이의 끌줄(warp)은 수심에 따라 조정할 수 있도록 25미터마다 표식을 달았다. 투망 완료시부터 브릿지의 당직항해사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진다. 한사람은 키를 잡고 또 한사람은 끌줄의 상태를 살피고, 책임 당직사관은 레이더를 주시해야한다. 그리고 본선박의 현재 위치를 어장도에 계속 표시해 나가야 한다. 그야말로 전투이다. 책임 당직사관은 수석1항사, 차석1항사를 중심으로 두 개조로 나뉘어 세밀하게 상황을 주시하며 대처해야 한다. 그리고 4시간이 지나면 양망을 하게 된다.
작업지시를 끝내고 선장실로 돌아와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키며 비디오를 틀었다. 챙겨온 30개의 테이프 중에 임의로 고른 것은 드라마게임<빗물 만들기>였다. 한 프로를 다 보고나서도 아직 양망 시간이 남았다. 브릿지에 올라가자니 선장이 너무 서두르는 것 같은 인상을 줄 것 같고, 선원실로 내려가자니 너무 간섭을 하는 것 같아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선장은 언제나 외로운 존재이다. 책임선원들의 다양한 의견을 듣지만 최종결정은 언제나 선장의 몫이다. 따라서 모든 책임도 선장이 져야한다. 어쩌면 수도자가 수도를 하는 것보다 더 고독한 자기와의 싸움이다. 도저히 결정하기 어려운 상황에 부딪힐 때도 있다. 이때는 기도할 수밖에 없다. 그가 항해사 시절에 실수를 할 때면 선장은 “니가 선장이 되어보아라. 그때는 내 심정을 알 것이다.”라고 하던 말이 생각난다. 이제는 그런 말을 반복할 때가 많아졌다. 아무리 유능한 항해사라도 선장을 능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전체를 이끌어가는 경험이 없는 그들은 안목이 좁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선장은 항상 고독한 지도자의 자리를 지켜가야 했다.
트롤선의 면접을 보던 날이었다. 선상생활 10여년에 최하위직 갑판원에서부터 경력을 쌓고 또 쌓아가며 자격시험을 치렀다. 선장을 두 번하고 그 당시로서는 하기 힘든 육상근무를 두 번하고서도 무슨 객기나 부리듯이 다시 바다를 생각하게 되었다. 원양어업에는 10개의 업종이 있다. 업종마다 조업의 특성과 선박의 모형이 다 다르다. 그 중에서도 선미 트롤선은 승선하기가 무척이나 까다롭고 텃세도 유명한 업종이었다. 타업종의 선장을 몇 번하고 나서 트롤선으로 전업을 하면 바로 선장으로 받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직위가 2항사정도로 내려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 측이나 잘 아는 선장에게 손이 닿으면 1항사의 행운을 잡을 수 도 있었다. 가쓰오선 개척, 냉동운반선, 연안어장 통발선을 거쳐 기왕 원양어선에 몸을 담은 이상 마지막으로 트롤선에 도전해보기로 마음먹은 지가 한 달이 넘었을 때였다.
타업종의 선장으로 근무하던 사람이 다시 트롤선의 항해사로 근무한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었다. 트롤의 ‘트’자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차피 인생은 모험이라는 최초의 각오를 다시 불러일으켰다. 흔히들 ‘용의 꼬리보다 뱀의 머리가 되라’는 말을 하지만 그는 다시 용의 꼬리로 시작하여 용의 머리가 되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 12월의 차가운 날씨에 옷깃을 여미며 트롤선 사무실에 들어가 면접 차례를 기다렸다. 며칠 전 부산 소장은 그의 지원서를 접수하면서 직원들에게 사람은 탐이 나지만 팀 구성에는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한바 있었다. 그는 선장보다 나이가 두 살이나 많은데다 트롤승선 경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밖의 모든 이력은 월등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게 되면 선박 운항과 선원 통솔에 어려움이 따를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때 구성되는 선원들은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캐나다 북부의 북대서양과 뉴펀들랜드에 투입되었다가 입항 중에 좌초되었던 트롤선에 승선하도록 되어 있었다. 만약에 다시 실패하면 회사의 존폐에 영향을 미칠 만큼 막중한 사업이었다. 그래서 본사에서는 특별히 상무를 부산으로 파견하여 면접을 실시하고 있었다. 통상 원양어선은 2년여의 계약이 끝나면 1항사가 후임 선장으로 계승되기 때문에 선원구성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것이었다. 긴장된 마음으로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때 그의 이름이 불렸다. “예”라고 대답하고 들어가니 면접관의 얼굴은 호랑이 인상처럼 우락부락한 모습이었다. ‘잘 못 걸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앉게나.”
생각과는 달리 면접관은 조용히 말했다.
“괜찮습니다.”
그는 별 생각 없이 사양하며 서있었다.
“임마, 앉으라면 앉아. 안 잡아먹어!”
쳐다보는 그의 눈매가 섬뜩했다. 경상도 기질이 몸에 밴 것 같은 사나이였다.
“예.”
기가 죽은 목소리로 대답하고 그는 면접관 앞에 앉았다.
“니, 트롤 좀 아나?”
“전혀 모릅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기 와 배를 탈라카노?”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 짜아식, 도전 좋아하네!”
상무는 그의 이력서를 들여다보았다.
“니, 김준식 선장 밑에서 일했구나?”
“예.”
“기다려봐라.”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기분 나쁠 정도로 다시 아래위를 훑어보는 것으로 면접은 끝났다. 회사 문을 나와 자갈치 시장으로 들어서면서 다시금 삶의 의미를 되새겨보았다. 생선 비린내와 갯냄새를 맡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도마 위에서 팔딱거리는 생선처럼 생동감이 넘치고 있었다.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꼼장어집에 들러 소주 한 병을 시켜놓고 지나온 해상생활을 돌이켜보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회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채용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2항사 자격은 주겠지’ 하는 기대감을 갖고 상무 앞에 앉았다.
“그래, 수석1항사든 차석1항사든 꿩 잡는 게 매니까, 잘 하는 놈이 다음 선장이 되는 거지 뭐! 니, 수석1항사 해라.”
뜻밖의 말을 듣고 나니 갑자기 그의 양어깨에 무거운 짐을 올려놓는 것 같았다.
“선원은 56명이다. 항해파트 사관은 수석1항사, 차석1항사, 2항사 A, B, 실항사 1명이다. 선원구성 잘 해라!”
선장과 함께 고심하며 두 달 정도 걸려 선원구성을 끝냈다. 출국 하루 전 선원들을 다 모아놓고 식사를 하며 얼굴을 익히고 선장은 당부의 말을 나누었다.
“어떤 순간에도 자기 자신을 죽여야 한다. 묵묵히 맡은바 임무를 잘 감당하는 자는 성공할 것이고, 매사에 자기만을 내세우는 자는 결국 자신을 죽게 하는 것이다. 돌아오는 날까지 지금의 모습대로 건강하게 사랑하는 가족을 만날 수 있도록 서로가 최선을 다하자.”
수석1항사인 그는 마치 개인의 신앙고백 같은 선장의 다짐을 가슴에 새기고 다음날 김포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는 2천 톤급 트롤선의 업무를 익히기 위해 6개월 동안은 기항지에서 외출 한번 하지 않고 땀을 흘리며 책무를 숙지했다. 어느새 선장의 꿈을 키워가던 2년의 세월이 파도너머로 사라졌다.
“초사님이 떠나시면 우리는 어떡합니까? 초사님 때문에 모두가 힘을 얻고 어려운 일도 잘 견뎌냈습니다.”
그동안 정들었던 선원들의 사랑과 아쉬움을 남기고 다음 항차 선장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생피에르를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 다시금 김포공항을 밟았을 때 계절은 봄이었다. 하늘은 쾌청하고 마음 또한 가벼웠다. 성공적인 1항사의 임무를 끝냈다는 안도감은 그간의 피로를 잊게 했다. 해상생활을 하면서 내내 그랬듯이 귀국할 때도 가족들에게 사전에 연락을 하지 않았다. 본사에 들러 보고를 하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벅찬 가슴으로 현관의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집안에서 들려오는 아내의 음성이었다. 아무런 대답도 않고 계속 벨을 눌러대니 아내가 문틈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너무도 뜻밖의 일이라 아내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멍하니 남편을 쳐다보던 아내가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 오랜만에 아내와 기나긴 키스를 했다. 아내의 눈물이 입속으로 흘러들었지만 그래도 싫지 않고 오히려 달콤했다. 정말 남편이 맞는지, 자꾸만 쳐다보는 아내의 손을 잡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저씨 누구야?”
막내아들이었다.
“아빠다. 이리 온.”
아이는 스스럼없이 그의 품에 안겼다. 아내는 아무에게도 잘 가지 않던 아이가 남편의 품에 안기는 것이 신기했다. 한편으로는 자식들이 아빠를 아저씨라 부르는 그 서러움을 되새기며 지난번 C.S호 1항사 승선이 선원생활의 마지막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트롤 선장으로 두 번째 승선을 했던 것이다.
조용히 성경책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스피커에서 항해사의 소리가 들렸다.
“양망 준비!”
이윽고 인터폰이 울렸다.
“선장님, 양망 10분전입니다.”
“알았어!”
그는 브릿지로 올라갔다. 대체로 첫 항차에는 안전사고가 많았다. 특히 트롤은 어구가 대부분 철제이기 때문에 전개판을 고정시킬 때 사고가 일어날 확률이 높았다. 끌줄이 감기고 전개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서 후릿줄과 그물 목줄을 감자 원통이 올라왔다. 고기를 모으는 원통끝(cod end)이 가득차지 않았다. 피쉬 폰드(어획한 고기를 넣는 곳)에 고기를 쏟아놓고 보니 ‘가자미 50펜(1펜은 13kg), 가오리 10펜, 나머지는 쓰레기’였다. 초라한 어획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고를 받자마자 선장은 즉시 다음 투망 코스를 결정해야한다. ‘첫 술에 배부르랴! 과도한 욕심을 내지 말자.’ 첫 항차를 안전사고 없이 무사히 끝낸 것으로 만족해야한다. 그리고 선원들이 작업에 숙달하기 까지 건강을 보살피고 선상생활의 리듬을 잘 조절해야 했다. 작업은 6시간 근무, 6시간 휴식의 2교대로 진행되었다. 하루 12시간 휴식이면 그다지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브릿지로 올라가 어장도를 들여다보며 조업계획을 새로 세웠다. 숙고를 거듭한 끝에 한국의 어느 선박도 망을 끌어보지 않은 미개지 어장으로 모험을 감행하기로 했다. 그곳은 그물의 파손이 잦은 관계로 외국 선박들도 엄두를 내지 못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박 선장은 직접 투망을 진두지휘하고 나서 통신실 선미창을 통해 예망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얼마 후 양망을 하는 윈치 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그 것은 무엇인가 그물에 가득 담길 때 나는 소리였다. 그물 속에서 뒤척이는 어종은 가오리가 아니었다. 쓰레기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원통이 불룩했다. 갑판장이 오른 손을 번쩍 높이 들었다.
“가자미다!”
선원들은 온통 흥분해서 그물을 끌어올렸다.
“93번(노랑가자미) 200펜, 92번(참가자미) 200펜입니다.”
최종 보고를 받았다.
“진짜가?!”
“예, 진짭니더.”
‘하느님 감사합니다.’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며 대충 계산을 해보았다. 양투망 포함해서 2시간 10분, 이상 없으면 하루 12망이면 4,800펜(62.4톤), 어림잡아 8만 불은 넘는다. 환율 870원이면 7천만 원에 달하는 수익이다.
“힘내라!”
공장이 힘차게 돌아간다. 다른 선박이 ‘어획이 어떠냐?’고 물어오면 ‘형편이 없어서 다른 곳으로 옮겨야 되겠다’고 적당히 거짓말을 하도록 지시했다. 그동안 고기가 잡히지 않아 선원들 보기에 선장의 체면이 서지 않아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오랜만에 기분 좋게 즐거운 식사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이틀간 고기를 잘 잡았다. 이웃 선박의 물음에 아무리 거짓말을 해보아야 저들이 눈치 체지 못할 리 없었다. 다른 선박들이 1마일도 안 되는 거리에 접근해 조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곳은 그물이 자주 파손되던 곳이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모른 체했다. 그들의 선박은 양망을 하고 있었다. 그물이 파손되고 끌줄이 튀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욕심을 내어 투망을 하던 선박들이 뿔뿔이 흩어져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한 자리에서 몇 개의 선박이 휘젓고 다닌 결과는 망을 크게 찢기는 손실을 입고 말았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