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선약수(上善若水)의 교훈(문정일)
한국장로신문 2022년 2월 22일
한자공부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 《한자동호회 카페》에 가입하여 활동한 지가 어느새 15, 6년째가 된다. 그동안 공부한 “사자성어”가 수도 없이 많은데 그 중에 유독 “상선약수”라는 말의 뜻을 한 동안 헷갈리곤 했었다. “윗 상(上)/ 착할 선(善)/ 같은 약(若)/ 물 수(水)”의 네 글자이니 그 뜻을 한 줄로 꿰어 놓으면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이요, 이 말을 의역하면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이라 하겠다. 이 글귀가 헷갈린 이유를 곰곰이 더듬어 보니 평범한 글자 “같은 약(若)”이 의미를 헷갈리게 만든 것이었다. 그러니까 “약수”를 “若水(물과 같다)”로 이해하지 않고 “藥水(약효가 있는 샘물)”를 떠올린 잘못된 선입견이 “본질을 오도하게 된 원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상선약수!” 그렇다. “가장 훌륭한 것은 물과 같이 되는 것”이다. “물은 선하여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서로 다투지 않는다”라는 말이 노자(老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다. 소설가 박경리(1926~2008)씨는 우리민족이 겪었던 혼란스러웠던 시대적 상황과 행정당국의 작품에 대한 탄압도 묵묵히 견디며 폭풍 같은 한국현대사의 한복판에서도 펜을 놓지 않았던 작가였다. 그는 그의 유고(遺稿)문집 한 구절에 이렇게 적고 있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모진 세월은 가고! 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렇게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 홀가분하다.”
또한 소설가 박완서(1931~2011)씨는 이렇게 썼다. “나이가 드니 마음 놓고 ‘고무줄 바지’를 입을 수 있는 것처럼 나 편한 대로 헐렁하게 살 수 있어 좋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안 할 수 있어 좋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안 할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좋은데 젊음과 바꾸겠는가?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 살아오면서 볼꼴, 못 볼꼴을 충분히 봤다. 한 번 본 거 두 번 보고 싶지 않다. 한 겹 두 겹 책임을 벗고 가벼워지는 느낌을 음미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소설도 써지면 쓰겠지만 안 써져도 그만이다.”
두 분은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여류소설가였다 그러면서도 조용한 시골집에서 삶을 마감했다. 이 두 분은 물처럼 살다 간 분들이다. 흐르는 물처럼 다투거나 경쟁하지 않는 ‘부쟁(不爭)의 삶’을 살았고 물이 만물을 길러주지만 스스로의 공(功)을 과시하지 않는 ‘상선약수’의 삶을 살았다. 흘러가는 강물처럼 부딪치는 모든 것들로부터 배우며, 만나는 모든 것들과 소통하며 대하(大河)의 글을 쓰면서 그 글 속에서 인생과 사랑을 이야기했다. 박경리씨는 강원도 원주의 산골에서, 박완서씨는 경기 양주 구리 동네에서 노년의 침묵을 가르쳐주었다. 천천히 걸어도, 빨리 달려도 이 땅에서의 주어진 시간은 오직 한 번의 삶일 뿐이다. 더러는 짧게 살다가, 더러는 조금 길게 살다 떠나간다.
“상선약수!” 물은 항상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되 그 가장 낮은 곳을 채운 다음에는 그다음 낮은 곳을 차근차근 채워준다. 물은 항상 평등하다. 아무렇게나 쏟아 부어도 물은 스스로 균형을 잡고 평형을 이룬다. 그래서 물은 자기들 사이에 높낮이가 없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은 물에 빚을 지지만 물은 단 한 번도 생색을 내지 않는다. 모든 환경에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면서 얼음으로, 액체로, 또 수증기로 모양을 바꾸지만 물은 영원한 물이다. 흐르는 강물은 바위를 만나면 다만 감싸고 돌 뿐, 결코 포기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노자는 “다투지 않는 덕(德)과 만물을 이롭게 하는 지혜”를 배우며 그렇게 사는 것이 선(善)이라 말했던 것 같다.
나는 성경에 나오는 말로 사람의 성품을 묘사하는 말 중에 가장 좋아하는 단어가 “신실(信實)하다”는 형용사이다. “믿음성이 있고 진실하다”는 말일 터이다. “상선약수”와 같은 삶을 살고 간 박경리-박완서 두 어른을 생각하면서 그분들이 한 인격체로서 참으로 “신실한 삶”을 살고 가신 분들임을 보며 가슴에 뜨거운 감동이 와 닿는다.
영국의 한 기자가 테레사 수녀에게 물었다. “당신은, 거리에서 죽어가는 모든 이들의 필요를 채워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떻게 그들을 돕는 일을 계속해 올 수 있었습니까?” 테레사 수녀의 대답이다. “나는 ‘성공하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습니다. 내가 받은 명령은 ‘신실하라’는 것이었어요.” 테레사 수녀는 인간이 ‘신실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당위성(當爲性)을 우리에게 밝히 일러주고 있다.
문정일 장로 <대전성지교회•목원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