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불러라
제법 오래되었던 이야기네요. 딸아이가 대학생일 때였지요. 학교에서 큰 상을 받았데요. 무슨 콘테스트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상품이 유럽 여행이었어요. 디자인이 전공이라 프랑스와 덴마크로 일주일의 여행을 다녀왔습니다.(울 부녀 간에 선물로 유럽 여행한 건 닮았어요) 돌아와서 내민 선물이 할아버지는 파이프 담배였고 제게는 만년필이었지요. 워터맨이라고 유명한 만년필이기에 주책없이 "요즈음 무슨 만년필이냐"고 하다가 아내한테 잔소리 들었던게 선합니다. 딸아이도 입을 삐죽 내밀고. 언제나 제가 앞뒤가 막혀서 주위분들 마음 상하게 해준 게 많지요.
사실, 어렸을 때야 만년필이 선물로 인기가 있었고 저도 어렵게 파카51인가 만년필과 샤프에다가 볼펜까지 갖추었던 게 있는지라 참 좋더라고요. 하지만 컴퓨터를 막배운 터라 글씨를 쓸 일이 별로 없어서 그런 얌통머리 없는 말을 한 게지요. 그리곤 그만이었어요. 그러다가 딸아이 선물을 요긴하게 써야겠다고 생각한 게 이곳 지방 공장으로 내려와서입니다. 대림 판공 때 신부님이 집 떠나 적적할 때 성경필사를 해보는게 어떠냐고 권유하시데요. 옳커니하고 시작한 게 성경필사입니다. 문구점에서 노트와 잉크(잉크병이 아니고 카트리지)를 잔뜩 사다가 놓고 시작한게 성경 필사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볼펜으로 쓰면 잉크 똥 때문에여간 번거로운 게 아닙니다) 저녁을 먹고서 설겆이를 끝낸 다음 책상에 앉으면 통신 성서 숙제를 하지요. 그리곤 노트를 잡고 워터맨, 명품 만년필을 들고서 성경 말씀을 한자 한자 정성스레 필사를 하는게 제 하루 일과입니다. 원체 게을러서 아직도 구약 이사야서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만년필이, 아니 딸아이한테 미안할 따름입니다. 노트는 열 권째인가 그런데 진도는 영 아니올시다. 제 글씨는 딸아이 표현을 빌리면 명필이래요. (오냐 니 자랑할라꼬)
얼마 전부터 본당 교중미사 때, 성경 필사한 교우들한테 신부님께서 축복장을 주시더라고요. 다들 부러워하며 대견해 하시는데 전 축복장에 욕심만 가득하지 진도는 안나가고.....아마 제가 축복장을 받으러 나가면 울 본당 뒤집어질 거예요. (저 양반이 무슨 필사까지)
이만하면 딸아이 선물에 멋진 응답이 될까요? 소중한 선물에 보답 또한 이 정도는 되어야겠지요. (조금만 오래 쓰면 손가락이 아프더라고요) 선물 주는 사람에 대한 응답 또한 뜻 있는 거로 해야 진정한 감사라고 여겨집니다. 언젠가 우리 딸아이한테 신부님의 축복장 을 보여주고서 네 선물 고맙고 감사했다고 뻐길래요. 눈에 선합니다. 누구보다 효녀인 우리 리오바가 아빠 넘 멋있다고 안겨올 걸 생각하면 신바람 나지요. 얼릉 워터멘을 들고서 필사를 시작해야지요.
그런데 울 신부님 임기가 끝나고 가버리면 축복장은 우예 될까 걱정이예요. (하모, 니 그럴 줄 알았다. 지금 후딱 쓰거래이, 안 쓰고 모하노!!)
사실 신부님 가셨어요. 축복장이 날아가버렸단 말이예요. 우짜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