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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다’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결에 따라 다르다고 할 수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깨끗함’ 혹은 ‘순수함’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혹은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쉽게 오염될 수 있으며, 그 본래의 바탕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희다’라는 단어의 관형어인 <흰>이라는 제목의 한강의 소설은 등장인물의 삶에 비추어, 그 단어의 의미를 탐색하는 작품이라고 생각되었다.
작품의 목차는 크게 ‘나’와 ‘그녀’ 그리고 ‘모든 흰’이라는 소제목을 붙인 장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시 각 장에 다양한 단어나 표현들을 제시하고 그에 관한 간략한 서술들로 채워지고 있다. 작품을 이끌어가는 인물인 ‘나’는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한 봄에 내가 처음 한 일은 목록을 만든 것이었’음을 고백하면서, ‘강보, 배내옷’ 등 그와 관련된 단어들을 제시하는 것으로 작품은 시작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들은 태어나자마자 죽은 자신의 ‘언니’에 대한 사연과 그것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았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들이 소개되고 있다. 아마도 작가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나’는 외국의 어느 도시에 머무르면서, 자신은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녀’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면서 내용을 이끌어가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어느새 2장에서 ‘그녀’의 입장이 되어 ‘나’를 관찰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는 불가능하지만 작가는 작품으로라도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죽은 자신의 ‘언니’를 이해하고자 시도한 것이라고 이해된다. 만약 ‘그녀’가 무사히 성장했더라면 당연히 ‘나’는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나’의 삶을 통해서 ‘그녀’의 모습을 찾아보고자 한 것이리라. 그리고 마침내 3장의 ‘모든 흰’을 통해서, ‘나’와 ‘그녀’ 그리고 그들의 부모의 입장을 이해함으로써 태어나자마자 세상을 떠난 ‘그녀’를 영결하는 의식을 치르고 있다고 하겠다.
책의 말미에 있는 ‘작가의 말’에서 초판에서 아무런 말도 쓰지 않았지만. 개정판을 내면서 비로소 그것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작가의 자녀와 함께 폴란드의 바르샤바에 초대를 받아 머물면서, ‘한국을 떠나 오기 전부터 쓰고 싶었던’ 이 작품을 구체적으로 구상했다고 한다. 자신이 머물던 도시가 2차대전 당시 ‘폭격으로 95퍼센트 이상의 건물들이 파괴된 도시’였으며, ‘내 삶과 몸을 빌려줌으로써만 그녀를 되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 작품을 통해 ‘내 언니’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작가는 ‘나의 삶을 감히 언니-아기-그녀에게 빌려주고 싶었기 때문에’ 이 작품을 통해서 그것을 실천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작품은 여느 소설처럼 명료한 상황이 제시되기보다 그저 누군가의 수필처럼 읽혀지고 있다고 하겠다. 아울러 ‘해설’로 제시된 평론가 권희철의 글은 딱히 이 작품의 해설이라기보다 소설가 한강에 대한 작가론적 탐구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차지하는 면수는 많지 않지만, 작가 한강을 깊이 있게 분석한 ‘해설’의 분량은 소설 전문에 비견할 수 있을 정도이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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