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눈물이 온다
왜 눈이 온다, 라고 하는가
비가 온다, 라고 하는가
추운 날
전철에 올라탄 할아버지 몸에는 작은 고양이가 안겨 있다
고양이는 이때쯤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는지
할아버지 어깨 위로 올라타고
사람들 구경한다
고양이는 배가 고픈지 울기 시작했는데
울음소리가 컸다
할아버지는 창피한 것 같았다
그때 한 낯선 소년이 주머니에서 부스럭대며 뭔가를 꺼내 작은 고양이에게 먹였다
사람들 모두는 오독오독 뭔가를 잘 먹는 고양이에게 눈길을 가져갔지만 나는 보았다
그 해쓱한 소년이 조용히 사무치다가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안으로 녹이는 것을
어느 민족은 가족을 애도중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외출할 때 옷깃을 찢어 표시하고
어느 부족은 성인이 되겠다는 다짐으로
성기의 끄트머리를 잘라내면서 지구의 맨살을 움켜쥔다
그리고 그들을 제외한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면서 심장에 쌓인 눈을 녹이고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면서
가슴에 등불을 켠다
슬픔이라는 구석
쓰나미가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간 마을에
빈 공중전화부스 한 대를 설치해두었다
사람들은 그곳에 들어가 통하지도 않는 전화기를 들고
세상에는 없는 사람에게 자기 슬픔을 말한다는데
남쪽에 살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휴전선을 넘어
남하한 한 소녀는 줄곧 직진해서 걸었는데
촘촘하게 지뢰가 묻힌 밭을 걸어오면서
어떻게 단 하나의 지뢰도 밟지 않았다는 것인지
가슴께가 다 뻐근해지는 이 일을
슬프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나
색맹으로 스무 해를 살아온 청년에게
보정 안경을 씌워주자 몇 번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안경 안으로 뚝뚝 눈물을 흘렸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너무 벅차서라니
이 간절한 슬픔은 뭐라 할 수 있겠나
스무 줄의 문장으로는
영 모자랐던 몇 번의 내 전생
이 생에서는 실컷 슬픔을 상대하고
단 한 줄로 요약해보자 싶어 시인이 되었건만
상대는커녕 밀려드는 것을 막지 못해
매번 당하고 마는 슬픔들은
무슨 재주로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
슬픔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겹쳐서
양말에 구멍이 났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넘기려 했지만 신경이 많이 쓰였다
오래 있어야 하는 자리였고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양말 구멍으로 내민 살이
꼭 그곳에 있기 싫은 내 얼굴 같았다
구멍이 나는 쪽은 항상 오른발이었다
신경쓰면서 살지 않았지만
신경쓰지 않아도 집요하게 한쪽에서만 구멍이 생겼다
하긴 사람만 없으면 그것도 별일은 아니겠지만
밖으로 나가 새 양말을 사서 얼른 신었다
신었던 양말을 벗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 위에다 심었다
속옷을 두 장 입는 사람도 있다
가면과 가면은 겹쳐진다
쓰고 있는 가면 위에 다른 가면을 겹쳐 쓸 수도 있다
만두피가 생겨 만두를 빚을 일이 생겼는데
안에다 채울 것이 없어 냉동만두를 넣고 통째로 감쌌던 적 있다
얼굴
하루 한 번 삶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당신 얼굴 때문입니다
당신 얼굴에는 당신의 아버지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지나갑니다
어머니도 유전적으로 앉아 있지만 얼굴을 자세히 보면
누구나 그렇듯 얼굴만으로는 고아입니다
당신이 본 풍경과 당신이 지나온 일들이 얼굴 위에서 아래로 차곡차곡 빛납니다
눈 밑으로 유년의 빗금들이 차분하게 지나가고
빗금을 타고 표정은 파도처럼 매번 다르게 흐릅니다
얼굴은 거북한 역할은 할 수 없습니다
안간힘 정도는 괜찮지만 계산된 얼굴은 안 됩니다
바다의 얼굴을 보여주세요
당신 얼굴에 나의 얼굴을 닿게 한 적 있습니다
무표정한 포기도 있는데다 누군가와 축축하게 헤어진 얼굴이어서 그럴 수 있었습니다
당신 앞에서 이유 없이 웃는 사이
나는 당신 얼굴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얼굴에 얼굴을 물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하루 한 번 당신과 겹쳐지는 삶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단추가 느슨해지다
인연이 느슨해져서
꽉 물고 안 놓을 것만 같던 인연이 헐거워져서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라서
밤길을 걷고 걸었다
집으로 돌아오기보다는
집을 나서야 하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 싶어
밤길을 걷다 돌고 돌아서도 걷다가
머리를 밀어볼까도 생각하였다
우리는 단추 같은 존재들이기도 할 것이어서
같은 단추들과 나란히 배열을 이루다가도
멀어져 온데간데없이 잃어버리고 마는
단추 같기도 할 것이어서
도무지 헐렁해져서 어느 날 다시 입을 수 없는
벗어놓은 바지 같을 것이다
우리의 어떤 일 같은 것들은 단추가 되어
매달리기도 하고
우리의 아무 일 같은 것이 단추가 되어
느슨히 떨어지기도 하는
그 극명한 절정의
전과 후가 만들어낸 길을 걷다가
그만 실을 밟고 실에 감겨 넘어지면서
밤길을 걸었다
갈급에게
그 산에는 절벽이 있다
그 절벽 끝에는 사원이 있다
사원 안에는 기도실이 하나
그 안에서는 절대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해서는 안 된다
그 안에서는 절대 자신을 들여다보거나 갈구해서는 안 된다
나를 위해서가 아닌
나를 제외한 기도만을 허락한다고 어둠이 안내한다
그것이 막막하여
숨을 쉬는 것조차
당신을 떠올리는 것조차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알게 해주는 절벽 끝 방에서
촛불을 켰다
세상이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실
한 사내가 실을 들고 지나간다
한 손에 든 실뭉치에서 실을 살살 풀면서
어딘가로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어느 끝에다 실을 묶어둔 것인지
어디서부터 걸어온 것인지
실은 한 방향으로 길게 길게 풀려나가고 있었다
길을 가던 사람들은
실을 밟기도
실에 감기기도 했다
어느 길 중간에서 실에 걸린 사람들은
그 실을 끊으려고도 했지만
절대 그렇게는 끊어지지 않았다
얼마쯤이나 지났을까
실이 공중으로 들어올려지는가 싶어
눈으로 실을 따라가보는데
저멀리로 커다란 연이 떠오르는 게 보였다
인생에 실 하나를 묶어둔다면
인생 어느 귀퉁이에다 실을 묶어두고
어딘가로 어딘가로 마냥 길을 잃어도 되는 거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