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알렉산드로스 대왕. 디아도코이 전쟁.
라고스왕조 치하의 팔레스티나. 안티오코스 3세
(기원전 323~175년)
31.1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제국
그리스의 작은 도시국가들 간에 불화가 계속되면서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는 쉽게 야망을 이룰 수 있었다. 기원전 338년 그는 전체 그리스의 왕이 되었다. 기원전 336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 원정에 대한 아버지의 계획을 어어 갔다. 그는 기원전 334년 소아시아를 점령하고, 기원전 333년에는 킬리키아 동부 이수스Issus에서 다리우스 3세의 군대를 무찔렀다. 거기에서부터 다마스쿠스, 페니키아, 팔레스티나로 진격하여 이집트까지 이르렀다. 이집트를 복속시키고 나서는 메소포타미아로 돌아와 현재의 모술Mossul에서 북동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진 가우가멜라Gaugamela에서 다리우스의 군대와 다시 전투를 벌인다. 여기서 페르시아의 군사력이 완전히 와해되어 알렉산드로스는 인더스 강까지 이르는 왕국의 동편을 점령할 수 있었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에서 숨을 거두었다. 성경에서는 마카베오기 상권 1장 1-7절에만 그의 활동을 짧게 요약하고 있다. 유다인 역사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는 적의를 품고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러나 꿈에서 경고를 받았을 뿐 아니라 대사제 야두아Jaddua에게 환대를 받고 난 후에는 성전에 제물을 바치게 하고 왕국의 영토에 사는 유다인들의 특권을 인정했다. 중요한 것은 알렉산드로스의 정복이 가져온 결과다. 알렉산드로스와 더불어 그리스 문화가 동방 문화와 혼합되는 시대가 열리며 헬레니즘이라 불리는 새로운 문화를 꽃피운 것이다. 도시들이 이 새로운 문화의 전달 수단이 되었는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같은 신생 도시들도 있고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도시)를 따라 구조와 건축을 변화시킨 기존 도시들도 있었다.
31.2 디아도코이와 왕국 장악을 위한 전쟁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왕국은 ‘디아도코이’diadochoi(후계자들)라는 칭호를 얻은 장군들에게 분배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왕국의 지배력을 장악하기 위해 혹은 자신의 영토를 넓히기 위해 디아도코이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기원전 281년 왕국의 영토가 삼등분될 때까지 전쟁은 40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마카베오기 상권 1장 9절에도 언급되어 있다. 여기서는 자세히 소개하지는 않고 팔레스티나 역사에 중요한 몇 가지만 언급하겠다. 디아도코이 사이의 첫 번째 협약은 매우 일찍 이루어졌는데 영토의 경계선은 기원전 321년에 합의되었다. (팔레스티나가 포함된) 코일레 시리아Celesiria 지역은 이집트의 통치자 프톨레마이오스(라고스의 아들. 이 이름에서 라고스왕조가 나왔다)에게 맡겨졌다. 그다음 시대에 등장하는 안티고노스가 시리아 대부분을 지배했다. 기원전 306~305년에 그는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알렉산드로스의 다른 디아도코이들도 자기 영토에서 그렇게 불렸다. 안티고노스의 지배는 기원전 303년에 절정에 달했는데, 이때 소아시아와 팔레스티나도 그의 왕국에 속했다. 이 지도는 그 시대를 나타낸다. 그러나 곧 프톨레마이오스가 안티고노스를 무찌르고 코일레 시리아의 지배권을 되찾았는데 당시 영토 구분도 살펴볼 수 있다. 데메트리오스 폴리오르케테스(안티고노스의 아들)는 마케도니아,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이집트와 코일레 시리아, 셀레우코스 1세는 왕국 동편,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북부, 현재 터키의 상당 부분을 다스렸는데, 수도는 안티오키아였다.
31.3 라고스왕조 지배하의 팔레스티나.
프톨레마이오스 3세 치하의 최대 확장(기원전 241년)
프톨레마이오스왕조가 다스리는 코일레 시리아 영역과 셀레우코스왕조가 다스리는 북시리아의 경계선은 엘레우테로스 강(오늘날 나흐르 엘 케비르Nahr el-Kebîr) 하구에서 시작하여 리블라Ribla 남쪽의 오론테스 계곡까지다. 두 왕국 사이에서 분쟁이 여러 번 발생했다. 안티오코스 1세(기원전 280~261년)와 프톨레마이오스 2세 사이의 첫 번째 충돌은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승리로 끝났다(기원전 271년). 기원전 260년부터 253년까지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안티오코스 2세(기원전 261-246년)의 공격에 맞서야 했다. 기원전 253년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딸 베레니케Berenice와 안티오코스 2세가 정략결혼을 함으로써 평화조약이 맺어졌다. 그러나 안티오코스 2세가 죽자 베레니케는 자신의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고, 안티오코스 2세의 다른 아들 셀레우코스 2세(기원전 246~226년)가 왕좌에 올랐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기원전 246~221년)는 셀레우코스 2세와 전쟁을 일으켰고(다니 11,6-9 참조) 시리아를 침략하는 데 성공하여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렀다. 기원전 241년 평화가 찾아왔을 때 라고스왕조의 영토는 최대로 확장되었다. 지도는 이런 상황을 보여 준다. 라고스왕조가 다스리는 동안 유다의 히브리 공동체는 폭넓은 행정적 자치권을 가지고 꽤 유복한 상황을 누렸다. 구약성경의 그리스어 번역의 ‘칠십인역본’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작된 것도 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31.4 안티오코스 3세 치하에서의 유다
셀레우코스 3세(기원전 226~223년)가 잠시 시리아를 통치한 후에 대왕으로 불리는 안티오코스 3세(기원전 223~187년)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기원전 219년 프톨레마이오스 4세(기원전 221~203년)와 대립하여 과거에 셀레우코스왕조가 점령했던 일부 지역을 회복했다. 기원전 218년에 그는 팔레스티나를 점령했으나 기원전 217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게 다시 빼앗겼다(다니 11,10-12 참조). 잠시 평화가 흐르다가 프톨레마이오스 5세(기원전 203~181년)가 왕위에 오르면서 기원전 202년 다시 대립이 시작되었고, 기원전 199년 안티오코스 3세가 파니온Panion(오늘날의 바니야스Banyas. 요르단샘들 근처)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코일레 시리아는 완전히 셀레우코스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그들은 유다도 합병했다(다니 11,13-17 참조). 뒤를 이어 소아시아, 트라키아, 마케도니아로 지배력을 확장해 가던 안티오코스 3세는 로마인들과 충돌했고, 기원전 189년 마그네시아(오늘날 미니시아Minisia)에서 패배했다(참조: 1마카 8,6-8; 다니 11,18-19).
31.5 아파메아 평화조약
마그네시아 패배 이후 아파메아에서 이루어진 평화조약(기원전 188년)으로 안티오코스 3세는 서쪽 국경선을 축소하고(이로 인해 소아시아에 새로운 구획이 지어졌다) 포로들을 송환했으며 전쟁 배상금으로 매우 큰 액수를 지불해야 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기원전 187년 엘리마이스(엘람)에 있는 벨Bel 신전의 보물을 약탈하려다가(로마에 지불한 돈을 모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죽임을 당한다. 그의 뒤를 셀레우코스 4세(기원전 187~175년)가 계승했는데, 그는 오니아스가 예루살렘 성전의 보물을 징발하려 했다(2마카 3,1-4,6). 이 일화와는 별도로 안티오코스 3세와 셀레우코스 4세 치하에서 유다인들의 상황은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던 것 같다. 안티오코스 3세는 히브리 공동체에 몇몇 특권을 인정했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와 후계자들을 위한 제사가 바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