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우리 집은 무척 가난했다. 가난 때문에 서러운 일을 자주 겪었다. 세상에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슬프고 서러운 일이 많은지 알고 싶었다. 우주의 근본을 알면, 답을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물리학을 선택하게 된 이유다. 돌이켜보면, 물리학으로 세상의 근본을 알아낼 수 있다는 생각은 많이 순진했다. 오늘날 물리학자들은, 신의 섭리는 말할 것도 없고, 어떤 고정된 법칙에 의해 세상이 돌아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정된 법칙이 없다면 미래 또한 결정될 수 없다. 답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현대물리학자들 대부분은, 고정된 법칙이 없더라도, 확률 법칙은 존재한다고 믿는다. 한두 차례의 시도가 어떤 특정한 결과를 보장할 수는 없겠지만, 무수히 많은 시행이 반복되면 결국은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결과가 실현될 것이다. 이런 생각은 양자역학에 의해 뒷받침된다.
양자역학은 한 마디로 정리하면, “우주는 파동”이라는 것이다. 파동은 출렁대는 현상을 의미한다. 파동은 수학적으로, 확률을 결정하는 함수(수강자 주 : 함수란 원인변수와 결과변수 사이의 대응관계를 나타내는 등식)로 표현representation할 수 있다. 확률을 결정하는 함수―즉, 파동함수―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시계바늘에 비유해 볼 수도 있다. 시계바늘에 비유하는 것은 내 아이디어다.
무슨 말인가. 유명한 영의 이중슬릿 실험―세로로 쪼개진 아주 작은 이중의 틈 사이로 전자를 통과시키는 실험―을 통해 설명해 보자. 우주의 일부로서 파동에 따라 움직이는 전자는 이중슬릿을 통과할 때, 입자이면서 파동인 존재라면, 둘로 쪼개질 수 있다. 쪼개진 전자 역시 파동의 원리에 종속된다.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파동함수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인 전자는 이중슬릿을 통과하기 위해 둘로 쪼개질 때 파동함수의 제곱근(루트) 형태로 존재한다. 쪼개졌던 전자가 합쳐져서 특정 위치에 나타날 확률도 파동함수에 의해 결정된다. 즉, 시시각각 변화하는 두 시계바늘의 재결합(파동함수의 두 제곱근의 곱) 상태가 하나로 합쳐진 전자의 출현 확률을 결정한다. 하나의 전자라는 입장에서 보면 무의미한 말일 수 있지만, 전자총을 이용해 수백만 개의 전자를 이중슬릿 사이로 통과시키는 실험을 해보면, 모든 전자는 파동의 예상되는 움직임대로 나타난다.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확률을 결정하는 파동함수가 계산한 바대로 전자가 등장한다. 즉, 우주는 파동이고, 전자는 파동의 움직임에 종속된다. 수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전자의 출현(관측)은 확률을 결정하는 파동함수에 종속된다.
이런 알 듯 말 듯 한 양자역학은 도대체 왜 등장을 했을까. 원자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이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자를 설명해야 하는 이유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원자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과거 케플러 등의 천문학자들은 우주의 운행법칙을 수학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원자의 운동법칙은 많은 물리학자들의 성공적인 노력으로 양자역학과 파동함수에 의한 수학적인 설명representation이 가능해졌는데 그 시초는 발머 공식이라고 볼 수 있다. 발머는 여러 원자 중 수소에서 나오는 빛의 스펙트럼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상관관계는 설명할 수 있는, 일정한 공식을 발견했다. 물리학자들이 이 발머의 공식을 응용해 발전시키고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광양자 가설(빛의 색, 즉 빛의 파동이 에너지의 크기를 결정) 등을 연결하는 과정에서 그 유명한 슈뢰딩거 방정식이 도출되었다. 슈뢰딩거 방정식은 앞에서 언급한, 전자의 존재를 확률로써 설명하는 파동함수다.
슈뢰딩거는 파동함수를 발견, 혹은 발명한 것에 대해 후회를 했다고 한다. 그는 “(우주가 파동이라는) 양자역학에 의하면, 관측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어떤 특정 조건 하에 있는 고양이가 죽을 확률도 있고 살 확률도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중첩상태가 정말로 가능한 것인가”라는 유명한 역설을 남겼는데, 오늘날의 물리학자들은 이것을 역설이 아니라 진실로서 받아들인다. 일부 물리학자들은 슈뢰딩거가 언급한 ‘양자 중첩’ 상태를 평행이론으로 발전시켜 연구하기도 한다.
슈뢰딩거 방정식의 또 다른 공헌자인 아인슈타인도, 파동함수 내에 관측되지 않고 확률로만 존재하는 한 존재의 분신이 (엄청나게 먼 거리에 있는 것으로 가정된) 다른 쪽의 분신에 관측과 동시에 영향을 줄 수 있겠는가, 라고 지적하면서 양자역학의 불완전성을 비판하였다. 하지만 벨의 부등식에 의해 아인슈타인의 이런 ‘양자 얽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은 오늘날 극복된 것으로 평가된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 양자역학이 등장하는 영화에는 컨택트(원제는 Arrival)와 인터스텔라가 있다. 두 영화의 메시지는 거의 같다. 주인공이 자신의 선택이 초래할 수 있는 미래의 어떤 결과를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로 돌아왔을 때 동일한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지만, 지금 나의 선택이 초래하는 결과는 오로지 확률로서만 존재하며 확정된 것이 아니라는 양자역학의 메시지를 영화는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