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한 황혼 (박완서'황혼'을 읽고) 고지혜
3월 독후감의 박완서 님의 작품이 선정되었을 때 솔직히 아는 작품이라고는 중학교 때 배운 옥상의 민들레꽃과 얼마 전에 배운 그 여자네 집이 전부였다. 나의 독서수준을 잠시 소개하자면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라는 베스트셀러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른 외국작가의 작품인줄로만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번 독후감 수행평가 작품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미망, 아주 오래된 농담, 엄마의 말뚝 등은 아예 제목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런 나에게 단편인 '황혼'은 길이가 짧아 읽기 쉽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글솜씨가 턱없이 부족한 나에게는 오히려 단편이 감상문을 쓰기에 더없이 어렵다는 것을 쓰는 내내 느꼈다.
서울 도심에 살고 있는 평범한 중산층가정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고부간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작품에서 며느리는 대학교육까지 받은 소위 '요즘사람'이다. 그리고 시어머니를 부양해야하는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 그에 따라 며느리를 비롯한 다른 가족들까지 시어머니를 그저 자식들의 돈벌이에 들러붙어 밥을 축내는 '식충이'정도로 치부한다. 반면 이런 가족들의 냉대와 멸시에 지친 '늙은 여자'는 명치 부근의 응어리로 관심을 호소하지만 관심은커녕 오히려 가족들에게 성적욕구를 주체하지 못하는 '늙은이의 주책' 정도로만 받아들여진다. 이 작품이 표면적으로는 단순히 고부간의 갈등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그 안에는 잔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현대인들의 각박한 삶의 태도를 말하고 있는 듯 했다.
책 속에서 '젊은 여자'라고 지칭되는 며느리는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고 대학교육까지 받은 '현대인'의 전형적 모델이고 주변 가족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젊은 여자의 남편은 늙은 여자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골방에서 홀로 생활하는 어머니의 외로움에 무심하게 대처한다. 이런 남편의 모습에는 젊은 여자와는 또 다른 현대인들의 '방관자적 삶'의 태도가 반영되어 있다. 글에서 모자간의 대화는 거의 찾아볼 수 도 없거니와 늙은 여자의 고통 역시 신경 쓰지 않는다.
이렇듯 모든 가족에게 늘 무시당하고 없는 사람 취급당하며 홀로 골방에서 생활하는 늙은 여자는 자신에게 갑자기 찾아온 병으로 인한 고통의 시간동안 자신의 젊었을 적 '며느리'시절에 대한 회상에 잠긴다. 늙은 여자가 지금의 젊은 여자만한 나이였을 적에 시어머니도 자신과 같은 병을 얻어 고통스러워 하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때의 자신과 현재 며느리의 태도는 완전히 다름을 느낀다.
늙은 여자에게 무심한 것은 가족만이 아니었다. 명치 때문에 찾아간 병원에서는 의사에게까지 쓸모없는 노인취급을 받는다. 묻는 말에도 정확히 대답해 주지 않고 늙은 여자가 시어머니와 명치의 병이 유전되는 지를 묻자 의사는 노인의 무지함을 탓한다.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늙은 여자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셈이다.
결국 세상으로부터 이해받기를 포기한 늙은 여자는 사람들을 비난하며 골방 속에서 외로운 황혼을 흘러 보낸다.
자살률 세계1위, 버려지는 아이들, 외롭게 죽어가는 독거노인들... 연일 신문이나 뉴스를 장식하는 소재들이다. 이러한 사회 문제들의 근본적 원인은 타인에게 무관심한 우리 모두의 책임이 아닌가 싶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인들의 각박한 마음을 한 번 더 돌아보게 해준 이 책은 어떠한 긴 장편보다도 더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