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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金洙暎 1921∼1968]
1950년대 말, 서울 명동의 한 술집에서 시인 몇이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 이미 술기운이 올라서 다들 붉어진 얼굴이다. 그들 사이에는 시며 잡지, 원고료, 문단 얘기들이 오간다. 다만 유난히 키가 큰 한 사나이는 아까부터 입을 꾹 다문 채 말이 없다. 좌중의 화제가 사회와 정치 쪽으로 옮아가자 입을 다물고 있던 사나이도 말문을연다. 엔간히 취기가 올라 있던 그는 자유당과 이승만을 향해 직설적인 비판과 함께욕을 토해낸다.
한 시인이 제지하려고 들자 그가 대뜸 항의한다.
"아니,자유 국가에서 욕도 내 마음대로 못 한단 말이오?" "글세,김형 말이 도에 지나치니까 하는 말이지." "도에 지나쳐? 그럼 이 썩어빠지고 독재나 일삼는 정부며, 늙은 독재자를 빼놓고 불쌍하고 힘없는 문인들 험담이나 해서 쓰겠어? 당신 시가 예술 지상주의 냄새가 나는 건 그 지나친 조심조심 때문이오!"
이에 상대방이 발끈해 말다툼으로 번지고 결국 술상까지 엎어져 술자리는 난장판으로 끝난다. 이 키 큰 사나이가 바로 시인 김수영(金洙暎.1926~1968)이다.
"푸른 하늘을 제압(制壓)하는/노고지리가 자유(自由)로왔다고/부러워하던/어느시인의 말은 수정(修正)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비상(飛翔)하여 본 일이 있는/사람이면 알지/노고지리가/무엇을 보고/노래하는가를/어째서 자유에는/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혁명(革命)은/왜 고독한 것인가를//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이라고 노래한 김수영.
그는 현실의 전위에 선 시인의 불온성을 온몸으로 밀고 나가며, 도시 소시민의내면과 자의식을 까발려 내보이며,그때까지 한국시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여성적 운율과 재래의 토속성을 벗어던지고 세련된 도시 모더니즘의 시세계로 나아갔다.
김수영은 1921년 11월 27일 서울 종로 6가에서 김태욱(金泰旭)의 셋째아들로태어난다. 김수영네 집안은 본디 의관(醫官)이나 역관(譯官), 부상(富商)들로 이루어진 중인들의 주거지인 관철동에 있었다. 무반(武班) 계급에 속한 김수영네는 경기도 파주. 문산. 김포와 강원도 철원. 홍천 등지에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해마다 4백여석을 거둬들이는 지주 집안이었으나, 일제의 침탈 뒤 급변하는 사회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몰락했다.
그는 어의동공립보통학교(지금의 효제초등학교)를 전학년 우등으로 마치고 당대의 수재들이 진학하던 경기도립상업학교에 응시했다가 떨어진다. 당연히 합격할 것으로 알았던 집안은 낙방 소식에 울음바다가 된다. 2차로 응시한 선린상업 주간부에도 떨어져 결국 선린상업 전수과 야간부에 진학한다. 상급학교 입시에 거푸 실패한 것은 잔병치레가 잦던 그가 보통 학교를 졸업하던해에 폐렴과 늑막염으로 앓아 누워 1년쯤 학업을 쉰 탓이다. 1941년 김수영은 선린상업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뒤 도쿄성북(東京成北)고등예비학교와 도쿄상대(東京商大) 전문부에 적을 두고 공부한다.
그는 해방과 더불어 귀국한 뒤 친구와 함께 일고여덟 달 동안 영어 학원을 경영하기도 한다. 이 무렵 연극에서 시 창작으로 진로를 굳힌 그는 1945년 "예술부락"에 "묘정(廟廷)의 노래"를 내놓으며 문단에 나온다. 그의 등단작인 "묘정(廟廷)의 노래"는 평론가 김현의 말처럼 "조지훈류(趙芝薰流)의 회고 취미가 압도적"인 작품이다.
1950년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진다. 서울의대 부설 간호학교에서 영어 강사 노릇을 하고 있던 김수영은 피난을 가지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인민군이 퇴각할 때 의용군으로 징집되어 이북으로 끌려간다. 평남 야영 훈련장에서 1개월 동안 훈련을 받은 뒤 북원(北院)훈련소에 배치된그는 유엔군이 평양 일대를 장악하면서 자유인이 되어 남하한다. 그런데 얼마 뒤 그는 서울 충무로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보내진다.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정보원이 너어스들과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고 스스로 전하듯이, 그는 포로수용소 야전 병원 외과 원장의 통역으로 있다가 풀려난다.
그는 이후 미8군(美八軍) 수송관의 통역,선린상고 영어 교사,평화신문사 문화부차장 등을 거친다. 서울 마포 구수동으로 이사한 1955년 무렵부터 그는 양계(養鷄)와 번역을 하며 힘겹게 가족을 부양한다.
4월 혁명은 한국 문학의 새로운 세대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4월 혁명에 대한 자의식이 한결 강렬하고 이를 자신의 문학적 자산으로 삼아 성공한 사람으로는 시인 김수영과 신동엽, 소설가 최인훈, 평론가 김현을 꼽을 수있다. 4월 혁명 기간 내내 김수영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들뜬 마음으로 거리를 쏘다녔다. 거의 매일 만취되어 집에 돌아오고,어느 때는 고래고래 소리를 높여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며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다가 날이 새면 또 거리로 뛰쳐나가는 것이다.
4월 혁명을 통해 김수영은 비로소 시인으로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난해시에서 참여시로,서정시에서 혁명시로 나아가던 그는 4.19 전에 내놓은 "하.그림자가 없다"에서 이미 "우리들의 싸움은 쉬지 않는다"고 하며 혁명을 예감한다. 또 "진정한 시인이란 선천적인 혁명가"("시의 뉴프론티어")라고 선언한 바도 있다. 김수영은 혁명의 현장을 생생히 목격하고 자유에 대한 느꺼움을 가누지 못해 밤늦게까지 술을 마신후 아침에 깨어나서는 말짱한 정신으로 시와 산문을 미친 듯이 썼다. 그리고 정치와 사회 현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표현한다.
그는 자유와 정의,사랑과 평화,행복을 얻기 위한 혁명에는 피와 고독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한다. "푸른 하늘을"에서 자유는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라는 대가를 치러야 하며,혁명은 본디 "고독한 것"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서라벌예대.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 등에서 시간 강사 노릇을 하던 그는 이혁명이 "미완"으로 끝나고 말 것이라는 비관적 예감에 사로잡힌다.
혁명이 좌절되었다고 느끼자 그는 "제2광화국!/ 너는 나의 적이다/ 나는 오늘나의 완전한 휴식을 찾아서 다시 뒷골목으로 들어간다"고 토로하거나,체제와 제도는 거의 달라지지 않고 사람만 바뀐 현실 상황에 비애를 느껴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고 절규한다.
이듬해 5.16 군사쿠테타가 터지고 군부 세력이 정권을 잡자 현실에 대한 시인의환멸과 절망은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시인을 정말로 괴롭힌 것은 그토록 혁명을 원했으면서도 스스로 혁명의주체가 될 수 없다는 소시민의 한계에 대한 인식과 자신이 "현실의 피해자일뿐 아니라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뼈저린" 인식이다.
혁명의 장애 요소들이 우리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다는 깨달음은 정치와 사회 현실에 주고 있던 그의 눈길을 다시 "안"으로 돌리게 한다. 그러나 "안",즉 아내를 비롯한 가족이라든지 헤어날 길 없는 소시민적 일상은나태와 허위로 감싸여 있고 이런 사실은 그를 못 견디게 만든다. 밤늦게 집에 돌아와서는 거지가 되고 싶다고 외치거나 가족이라는 속된 사슬에서 풀어달라고 미친 듯이 소리를 쳐서 잠자던 아내와 아이들을 깨워 울리는 등예전보다 심하게 식구들을 괴롭힌다.
언젠가는 술이 억병이 되어서 눈 위에 쓰러진 것을 지나가던 학생이 업어 가지고 경찰서에 데려다 준 일도 있었다. 술에 취한 채 경찰서에 업혀간 그는 순경을 보고 천연덕스럽게 절을 하고 "내가 바로 공산주의자올시다!"하고 인사를 했다. 그는 이튿날 사지가 떨어져나갈 듯이 아픈 가운데에도 아내에게 이 말을 전해듣고는 더럭 겁을 내기도 한다. 극심한 자기 비하나 자기 연민에서 비롯된 이런 잦은 음주와 가정 폭력은 시에서 혁명의 좌절을 가져온 소시민 계급의 안일함과 소극성을 향해 거침없이 내뱉는 야유와 욕설로 변용된다.
1968년 4월 13일, 김수영은 펜클럽이 마련한 부산의 문학 세미나에 참석해 "시여,침을 뱉어라"(원래의 제목은 "시에 있어서의 형식과 내용"이다)라는 제목으로 40분쯤 강연을 한다. 그는 이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파격적이고 예기치 못한 발언으로 청중을 당혹에 빠뜨린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내가 지금-바로 지금 이 순간에-해야 할 일은 이 지루한 횡설수설을 그치고 당신의 당신의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이다."
김수영은 상업 학교를 나왔음에도 숫자를 극도로 싫어해 원고지에 매기는 번호도 아내나 여동생에게 부탁하곤 한다. 1968년 6월 15일,그는 이날도 아내가 번호를 매긴 원고를 들고 광화문 네거리에있던 신구문화사에 나갔다. 번역 원고를 넘긴 뒤 고료를 받은 그는 이날 밤 신구문화사의 신동문(辛東門),늦깎이로 등단한 신예 작가 이병주(李炳州), 한국일보 기자인 정달영(鄭達泳)과 어울려 청진동의 술집들을 옮겨다니며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신다.
술에 취한 김수영은 좌충우돌하며 횡설수설하던 끝에 "야,이병주,이 딜레탕트야"하고 시비를 걸었다. 이병주는 "김 선생,취하셨구먼"하고 껄껄 웃어 넘긴다. 그들이 헤어진 것은 밤 이슥한 시각. 김수영은 이병주가 운전사 딸린 자신의 폭스바겐 차로 모시겠다는 것을 뿌리치고 시내 버스를 타고 서강 종점에서 내린다. 그 때 좌석 버스 한 대가 인도로 돌진하면서 인적 끊긴 길을 비틀거리며 걸어가던 김수영의 뒤통수를 들이받는다.
갈색 옷을 입고 있던 김수영은 "퍽!"하는 두개골이 파열되는 소리를 내며 멀찌감치 나가떨어진다. 밤 11시 30분께의 일이었다. 그는 적십자병원 응급실로 옮겨지나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이튿날 아침에 숨진다.
1969년 사후 1주기에 맞춰 그의 무덤에는 시비(詩碑)가 세워지는데, 이 시비에는"풀"이 육필(肉筆)로 새겨진다. 김수영은 죽은 뒤에 더 높이 평가를 받고 유명해진 시인이다. 그가 죽은 뒤 민음사에서는 1974년에 시선집 "거대한 뿌리",1975년 산문집 "시여,침을 뱉어라",1976년 시집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1979년 산문집 "퓨리턴의 초상"을 잇달아 펴낸다. 이후에도 지식산업사, 창작과비평사, 열음사, 미래사 같은 여러 출판사에서 다투어시선집을 내놓았다. 김수영은 근대적 자아 찾기,온몸으로 자기 정체성 찾기의 한 모범을 보여준시인이다. 그는 이상(李箱) 이후 최고의 전위 시인이며 4월 혁명의 정치적 함의를 정확하게 읽어낸 명실 상부한 현대 시인이다.
▣ 비사(秘史) ▣
≪ 마리서사 그리고 김수영과 박인환 ≫
해방을 맞아 평양의학전문대학을 중퇴하고 서울로 돌아온 박인환은 부친과 이모로부터 차입한 돈 5만원으로 뒷날 월북한 시인 오장환(吳章煥)이 낙원동에서 경영하던 스무평 남짓한 서점을 인수한다.
얼마 뒤 초현실주의 화가 박일영(朴一英)의 도움으로 간판을 새로 달고 다시 문을 여는데, 이것이 한국 모더니즘 시운동의 모태 역할을 했던 헌 책방 마리서사(茉莉書肆)이다. 서점 이름은 일본 현대시인 안자이 후유에(安船衛)의 시집 "군함 마리(軍艦茉莉)"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고, 프랑스의 화가이자 시인인 마리 로랑생의 이름을 땄다는 설로 나뉘어져 있다.
어느 게 정확한 것인지 확인은 불가능하다.
"마리서사"의 서가에 진열된 책들 대부분은 박인환이 소장하고 있던 책들인데,문학인들과 예술인들을 위한 전문 서점이었다. 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 마리 로랑생, 장 콕토와 같은 외국 현대시인들의 시집, "오르페온" "판테온" "신영토" "황지"와 같은 일본의 유명한 시잡지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마리서사"에는 하루도 시인이나 소설가,화가들이 모여들지 않는 날이 없었다.
김광균(金光均), 이봉구, 김기림(金起林), 오장환, 장만영(張萬榮), 정지용(鄭芝溶), 김광주 등 시인 소설가들, "신시론(新詩論)" 동인 김수영(金洙暎), 양병식(梁秉植), 김병욱(金秉旭), 김경린(金璟麟)등, 조향, 이봉래 등의 "후반기"동인들, 화가 최재덕, 길영주 등이 "마리서사"의 단골손님이었다.
특히 김수영은 박인환과 동년배로 동인활동을 함께 하며 "새로운 도시(都市)와 시민(市民)들의 합창(合唱)"이라는 앤솔로지를 내기도 하는 등 두터운 교분을 가졌다. 그러나 나중에 둘 사이는 소원해졌다.
김수영은 서구적인 것에 경도된 박인환의 취향을 경박하며 값싼 유행의 숭배자라고 몰아부치며 경멸하고, 박인환은 또 그대로 김수영이 세속적인 눈치만 보는 속물이라고 비난했다.
현실의 장벽을 향해 던지는 칼빛 언어, 자유의지
김수영은 '자유'의 시인이다. 그는 돌에서 피를 뽑아 낼 정도의 치열한 자유의지로 우리 근대사의 뼈아픈 역사와 삶의 생채기를 온몸으로 껴안은 시인이다. 따라서 자유란 테마는 그의 시세계 전체를 관통하며 끈질긴 탐구의 대상을 이룬다. 이런 자유의 정신으로 벼려진 칼빛 언어에는 시적 진정성을 구현하기 위한 김수영의 혹독한 자기 수련(修鍊)이 아로새겨져 있다. 결코 현실의 장벽에 굴복하지 않는 도저한 자유의지는 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로 그려지곤 한다.
"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아슬아슬하게/세상에 배를 대고 날아가는 정신"('바뀌어진 지평선'). 삶의 자유로운 비상을 억압하는 물 위를 아슬아슬하게 날아가는 돌, 무엇을 치어 받으려고 그토록 가열하게 날아가는가. 세상에 배를 밀착하고 날아가는 강인한 정신에서 명징하게 드러나듯, 그가 말하는 자유란 현실의 한계를 단박에 뛰어넘어는 '초월(超越)'의 희열이 아니다. 현실의 아픔과 상처, 갈등과 고통 위를 온몸으로 밀며 나가는 기어넘기, 즉 '포월(匍越)'이자 그 생채기를 안고넘는 '포월(抱越)'의 산고일 따름이다.
그러기에 자유, 그 반역의 정신은 좌절의 쓴맛과 직결된다. "헬리콥터여 너는 설운 동물이다//―자유//―비애"('헬리콥터'). 헬리콥터는 곤고한 지상과 결별하며 이륙할 수 있는 "자유의 정신의 아름다운 원형"이나, 종래에는 어딘가 착륙할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비애가 병존한다. 이런 시적 모반의 정신이 극단에 이르면 그의 시는 "아아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며 혁명을 꿈꾼다.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반항의 정신이 돛을 올리는 순간이다. 4·19 혁명 직전에 발표한 '하……그림자가 없다'와 '나는 아리조나 카보이야'가 그 대표적인 시라 하겠다. 그의 이러한 문학 정신은 소위 말하는 '반시론(反詩論)'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전복을 꿈꾸는 모든 전위 문학은 긍정이 아닌 부정의 정신을 근간으로 해야만 한다는 그의 헌걸찬 주장은 '지금 여기'의 현실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모든 전위 문학은 불온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문화의 본질이 꿈을 추구하는 것이고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들이여! 일상의 안일과 나태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 그대들이여! 지금 어떤 모반의 전략을 꿈꾸고 있는가? 도대체 꿈꿀 수 있기는 한가?
류신(문학평론가)
▶ 작품 활동
- 1945년 [예술부락]에 시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
- 1949년 김경린(金璟麟), 박인환(朴寅煥) 등과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 모더니스트로 각광 받음.
- 1950년대 : 소시민적 비애와 슬픔을 모더니즘적인 감각으로 노래.
대표작 : <헬리콥터>, <폭포>, <눈>등. 1959년 그간의
발표작을 모은 시집 <달나라의 장난> 간행 및 제1회 시협(詩協)상 수상
- 4.19혁명 : 시의 전환점을 이루는 시기. 현실에 대한 적극적 관심을 표현한 참여시를 쓰기 시작.
대표작 : <하……그림자가 없다>, <육법전서(六法全書)와 혁명>,<푸른 하늘을> 등.
- 5.16 이후 :
대표작 : <그 방을 생각하며>, <적> 등.이후 그는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을 노래한
<거대한 뿌리>, <현대식 교량>, <사랑의 변주곡>등을 썼고, <풀>은 1970년대
민중시의 길을 열어놓은 대표작의 하나로 평가. 그 외 <시여,침을 뱉어라>등
- 사후 <거대한 뿌리>(1974), <시여, 침을 뱉어라>(1975)를 비롯,몇 권의 시선집과 산문집 발행.1981년 민음사에서 두 권의 <김수영전집>이 간행 됨.
▶ 대표작
달나라의 장난 / 푸른 하늘을 / 풀 / 눈 / 사령(死靈) / 폭포(瀑布) / 꽃잎(ㅡ) / 꽃잎(二) /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 헬리콥터 / 그 방을 생각하며 / 敵 1 / 六法全書와 革命 / 敵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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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2. 눈물은 푸르다 / 최종천
눈물은 푸르다
최종천
눈물은 푸른 색을 띠고 있다
멍을 우러낸 것이기 때문이다
열린 눈의 막막함
약속의 허망함
우리는 지난 세월을 憎惡에 投資했다
거기서 나온 이익으로
쾌락을 늘리고
문득 혐오속에서 누군가를 기억한다
너의 눈은 검고 깊었다. 그러나
그는 입맞춤으로 너의 눈을 퍼낸다
너는 다시는 달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최종천 시집 <눈물은 푸르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