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장군의 오누이와 나의 오누이 / 한은정
계정 숲이 신바람 장단으로 들썩인다. 나의 몸도 덩달아 들썩인다. 그러나 신명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것은 왜일까? 신록에서 녹음으로 옷을 갈아입는 계정 숲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된 단오제의 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왜구로부터 고을을 지켜낸 한씨 오누이의 업적을 기리던 ‘한장군놀이’가 ‘자인단오제’로 명칭이 바뀐 것이다. 축제 기간 동안 호장장군 행렬ㆍ한장군 대제ㆍ여원무ㆍ팔광대 놀이ㆍ자인 단오굿 등 다섯 마당을 펼치는 경산이 자랑하는 전국적인 축제다.
제관들이 입장한다. 호장장군행렬이다. 여원무의 복장을 한 한장군과 누이동생을 앞세운 가장행렬이다.오색 깃발을 꽂은 마차ㆍ조마ㆍ차량의 행렬은 위풍이 당당하다. 그 뒤를 따르는 시민은 민초들의 환생인 듯하다. 색색이 피워낸 등화 꽃길을 천천히 오른다. 양지바른 곳에 고장을 지켜낸 한장군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몇 대조인지는 모르지만 청주한씨 후예로서 엄숙하게 무덤 앞에 선다.까마득한 선조 앞에서 옷깃을 여미다 꾹꾹 눌러왔던 회한의 보따리가 터져 나온다.
나는 청주한씨 각성공파 후손이다. 파조의 종손으로 태어나신 아버지가 일찍이 세상을 떠나면서 오빠에게 족보를 물려주셨다. 족보는 집이 불탈 때 증조할머니가 불 속에 뛰어들어 건져낸 우리 집 가보다.오빠는 족보를 영남대학 도서관에 보관했다. 열람하고 돌려주겠다는 종조부의 부탁으로 내준 족보는 작은댁으로 넘어가 버렸다. 중년을 넘긴 나이지만 오빠는 아직 홀몸이다. 빗장을 닫고 자책하듯 살아가는 오빠를 볼 때마다 가슴이 저며 온다. 아버지가 물려준 소중한 가보는 이름마저 잊혀가고 있다.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이 불협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마음이 어지럽기만 하다.
한장군 대제가 엄숙하게 진행된다. 고을민들은 수호신인 한장군의 사당을 지어 해마다 제사를 모셔왔다. 왜적을 벤 흔적이 남은 검흔석은 지금도 버들 못에 남아 있다. 종갓집 며느리처럼 여인의 무리에 파고들어 다소곳이 제사에 참여했다. 대제가 끝나갈 무렵이면 울대를 치솟는 울컥한 마음을 가누지 못한다.결혼한 뒤 친정 제사에 제대로 한 번 참여한 적이 없다. 출가외인이라는 현실적인 걸림돌도 있었다지만 다 핑계이다. 괜스레 태고의 업을 타고 나기라도 한 것처럼 오빠를 원망하며 오누이의 정에 선을 그렸다. 단오제 제례의식에 동참하는 것은 제사를 동경(憧憬)해온 나의 잠재의식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길게 늘어선 그네 앞에 다다랐다. 그네뛰기 경기가 한창이다. 그네의 이름이 ‘누이의 그네’란다. 그 말이 나의 발을 묶었다. 어릴 적 다정하던 오빠를 떠올리며 그네에 올랐다.‘한장군 할배와 오빠가 도울 거라 믿으며 날렵한 제비처럼 창공을 날아 일등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장장채승(長長彩繩)의 그넷줄에 매달려 춘향의 솜씨를 보이겠다’는 것은 마음뿐, 발도 제대로 구르지 못한 채 그네에서 내려왔다.낙방이었다. “저런 체구에 무슨”이라며 쑥덕이는 소리에 할 말을 잃었다.
귓불이 붉어진다. 한씨 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객기를 부린 탓일까? 가장 화려한 볼거리인 ‘여원무’(女圓舞)가 시작된다. 한장군과 오누이가 왜적을 무찌르기 위해 여장을 하고 휘저은 춤사위다.
칼을 숨기고자 석자가 넘는 화관을 머리에 쓰고, 온몸을 오색 치마로 치장해 꽃귀신을 만들었다. 차림은 기이하고, 화려했다. 적들이 혹할 수밖에 없는 고등 전술이 장엄하고 구슬픈 가락과 어우러져 왜구들을 홀리기에 충분했다. 한장군과 오누이의 머리에는 함박꽃이 춤을 춘다. 형형색색의 꽃을 두른 무리들이 너울거리며 춤의 향연을 벌인다. 지긋지긋한 피눈물은 이제 그만, 백성을 구하려는 춤사위는 절정을 치닫는다.
“오라, 더 가까이…….” 백성들은 지쳤으나 나라를 걱정하며 배수진을 쳤으리라. 삼색휘장 휘날리는 버들 못에 도천산 왜구들이 밀려든다. 비릿한 웃음소리 바람에 실려 온다. 버들가지 일렁이며 울부짖는다. 밤새 사라진 가족과 벗의 눈물, 망우리 쥐어뜯으며 미친 듯이 흔들거린다.‘원수를 갚으리라 적들을 모조리 섬멸하리라.’ 여흥에 빠진 무리를 향해 한장군의 칼날이 번득인다. 적들의 검붉은 피가 저수지를 물들인다.
단오 굿판이 벌어진다. 기를 받겠노라 춤판으로 뛰어든다. 전통을 계승하는 마지막 장을 장식하듯 남녀노소 민초들의 걸쭉한 놀이판으로 승화한다. 생면부지 사람들이 하나 되어 춤을 춘다. 무리에 휩싸여 시늉을 내보지만, 지금도 썰렁한 집을 지킬 오빠의 모습이 뇌리 속을 파고든다. 지긋이 바라보는 오빠의 따뜻한 미소가 그리워 사무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사방이 어둠으로 내려앉았다. 누이의 밤길이 위험할 세라 오빠의 영상이 내 뒤를 따라붙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