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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곤도주점=주인이 일제시대 일본 음식점에서 요리를 배워 주점을 열었다. 곤도는 이 집 주인 권씨의 창씨개명 이름이다. 1950년대 후반 김윤환, 윤장근, 허만하 등 젊은 작가들이 많이 찾았다. 지금의 한양제화 2층으로 정종과 안주를 팔았다.
2. 녹향=음악 감상실이었다. 곤도주점 지하 1층에 자리잡고 있었다. 1950년대 후반부타 1961년까지 '녹향시절' 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향촌동의 젊은 문인들, 이른바 막내들이 즐겨 찾았다. 열 두서너개 경사가 급한 시멘트 계단을 따라 음악감상실로 들어가면 '낭만의 블랙홀'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지금 녹향 음악감상실은 대구극장 맞은 편에 있다.
3. 건너집`고바우집`뚱보집=경상감영 공원 주차장 출구 쪽에서 미나까이(三中井-일제시대 당시 고급 백화점, 지금의 대우 유료주차장)백화점으로 이어지는 골목에 있었던 막걸리 집들이다. 이 골목 양쪽은 막걸리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젊은 문인들은 책이나 우산을 잡히고 술을 마셨다. 30대 중반의 고바우집 마담과 동거했던 박지수는 남문시장에서 좌판을 열고 손금과 점을 봐 주고 받은 돈으로 문인들에게 술을 사기도 했다.
5. 화월호텔=시인 구상과 마해송이 자주 묵던 호텔이다. 지금의 판코리아 성인텍 쪽이 호텔 입구였다. 당시에는 무척 비싼 호텔이었는데, 하룻밤 숙박비가 가난한 문인의 한달 생활비에 가까웠다고 한다.
6. 호수다방=장마담이라는 미모의 여인이 맡아 운영했다. 유치환, 백기만 등이 호수 다방을 자주 찾았다. 대구 문인들이 4.19와 5.16을 맞이한 다방으로 전해진다. 60년대 중반까지 번성했다. 지금의 '랜디아 제화' 2층이다.
9. 모나미 다방=1951년 시인 이효상이 '바다' 출판 기념회를 가졌던 공간이다. 향촌동 골목과 북성로가 이어지는 모퉁이에 있었다. 현재 명성식당 자리.
10. 백조다방=당시 백조다방에는 이미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다. '나리 나리 개나리…'로 시작하는 '봄나들이' 등 400여 곡의 동요와 교가를 작곡한 권태호 선생이 자주 찾았다. 권 선생은 술을 마시면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고 통금에 걸려 경찰이 '너는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개 올시다.'고 대답하고 계속 기어갔다고 한다. 권태호 선생은 '메기의 추억'을 잘불러 듣는 이의 눈시울을 붉히게 했고, 술자리에서는 일본가요 '해변의 노래'도 곧잘 불렀다. 그는 향촌동 호수 다방 앞을 지팡이로 막고 '통행세'를 거둬 담배를 사기도 했다. 지금의 북성로 '제비표 페인트' 위에 다방이 있었다.
11. 꽃자리 다방`청포도 다방=지금의 '국제 미공사' 옆이 꽃자리 다방이었고, 그 맞은편 한일 유료주차장 옆 성미 초밥집이 '청포도 다방'이었다. 꽃자리 다방에서 구상 시인의 '초토의 시' 출판 기념회가 열렸다. 이 시집의 표지화는 화가 이중섭이 그렸다. 청포도 다방의 이름은 육사의 청포도에서 비롯됐다. 시인들이 이름을 붙여주었고 다방 마담이 받았다. 당시 다방의 마담은 준 문인이었다고 한다.
12. 경복여관= 소설가 최태응과 화가 이중섭이 머물렀던 여관이다. 중앙로 '코끼리가 청바지를 입는 이유' '아세아 양행' 자리였다. 가난한 문인들이 수중에 돈이 좀 생긴 날에 묵곤 했던 비교적 고급 여관이다. 돈이 없는 날엔 훨씬 허름한 곳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13. 춘추다방=여류 수필가 이화진이 운영했던 다방이다. 이화진은 가난한 문화예술인들을 아꼈고 다방을 경영하며 문인들의 쉼터를 제공했다. 그녀는 퇴계 집안의 후손답게 늘 한복차림의 고전적인 몸가짐에 가체머리를 올린 단아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화진은 오늘날 영남수필의 효시인 '경북수필'의 창립동인이며 고희 기념문집 '잔화(殘火)의 장(章)'을 냈다. 현재 중앙통 롯데 양복점 2층이 다방 자리였다.
(2007.7.5 소설가 윤장근`도서 '향촌동 소야곡')
윤장근 "향촌동을 잊을 것인가?"
향촌동 피란문학 거리는 흔적조차 희미했고, 현지 답사만으로는 당시 상황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윤장근 선생(77.소설가.죽순문학 명예회장)은 노구를 끌고 후텁지근한 향촌동 골목을 기꺼이 걸었다. 그는 한마디 한마디 정확하게 전달하려 애썼고, 기자의 메모상태를 확인하기도 했다. 하나라도 틀리면 어쩌나 하는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무척 더운 날씬데 힘들게 해서 죄송하다.'는 말에 '자네 일이 아니고, 나의 일이다.'라며 앞서 걸었다. 이제 충분하다 싶었는데도 그는 설명을 덧붙이고 또 덧붙였다. 그는 마치 '피란기 향촌동 문학'의 행장을 쓰는 사람 같았다. 칠순 후반의 나이에도 그는 술을 빼놓지 않았다.
"향촌동을 이야기하려면 술잔을 앞에 놓아야지. 마른 목으로 무슨 이야기를 해!"
그는 전날 처음 만나서도 곧장 술집으로 향했고, 향촌동 순례길에서도 술집을 빼놓지 않았다. 대낮임에도 거리낌없이 술을 마셨고, '이 잔을 비우고 일어나자'고 해놓고 '여기 한 병 더!'를 거듭 외쳤다.
문학과 더불어 술잔에 낭만을 담아 마시던 그들이었다. 그런 모습들은 이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앞서 걷는 윤장근 선생의 걸음이 종종 흔들렸고, 그의 걸음이 흔들릴 때마다 '향촌동 문학'이 길바닥으로 쏟아져 사라질 것 같았다. 실제로 문인들이 떠난 지 반세기, 향촌동에는 그 기억마저 잊혀지고 있다.
"향촌동을 빼놓고 50년대, 60년대 한국 문학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이중섭과 인연으로 따지자면 향촌동이 서귀포만 못할까? 그런데도 '이중섭 거리'는 제주도 서귀포시에 있다. 우리 대구는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
선생의 말은 옳았다. 당시 대구 향촌동에 시인 구상과 화가 이중섭만 있었을까. 백기만, 마해송, 박두진, 이윤수, 조지훈, 김광섭, 박목월, 유치환, 이호우, 장덕조, 최정희, 최태응, 정비석 등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이 좁은 골목을 풍미했다. 여성 문인이 귀하던 시절 '향촌동의 꽃'으로 불리던 시인 서정희의 로망스가 있었던 곳도 향촌동이었다. 그녀가 육신의 한계와 시류의 비정에 홀로 울다가 떠난 곳도 향촌동이었다. 향촌동은 피란 시절부터 60년대까지 한국문단의 중심이자 문화`예술의 요람이었다.
중구청 "향촌동 골목에 입간판 설치"
반세기가 흘렀지만 문인들이 걷던 향촌동 좁은 골목은 옛 모습 그대로이다. 그들이 조촐한 출판 기념회를 열었던 건물은 낡은 모습이지만 더러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골목에서 문학의 자취를 찾을 수는 없었다. 시인묵객들이 술집과 다방은 모두 간판을 바꿔 달았다. 1950년대 피란문학의 본거지가 잊힐 위기에 놓인 것이다.
윤순영 대구시 중구청장은 "중구는 옛 골목과 대구의 문화가 집적된 곳이다. 대구가 외부로 영역을 확장을 거듭하는 동안 옛 중심이 약화돼 아쉽다. 골목이 살아야 도시가 산다. 경상감영공원과 향촌동 일대를 '실버타운'으로 특화하자는 목소리와 '문학거리'로 해야한다는 목소리 등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고 했다.
윤 청장은 "'향촌동 피란문학거리'의 경우 경상감영 공원쪽 입구와 북성로쪽 입구, 그리고 중요한 건물 앞에 설명과 옛 사진을 덧붙인 입간판 설치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관청의 힘만으로 골목과 상권을 살릴 수는 없다. 일대 주민들의 자연발생적인 의지와 의견이 모아져야 한다."며 일대 주민들의 협조도 당부했다.
1950년대 대구시 향촌동은 '피란문학'의 요람이었다. 번화한 북성로 상점과 관청, 은행이 밀집해 있었기에 이 일대는 일제시대 대구의 유흥중심이었다. 패전한 일본인들이 떠나고 쇠퇴하던 향촌동은 1950년 피란 문인들로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이했다.
전쟁 중이었지만 골목에는 바흐와 베토벤이 물처럼 흘렀고, 문학이 꽃피었다. 묵객들은 외상 술일망정 호기롭게 마셨고, 주인들은 외상인줄 알면서도 술상을 내놓았다. 문인들이 문학과 술에 취해 걷던 향촌동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시인묵객이 떠난 자리에는 오고가는 사람이 드물었고, 남루한 골목에는 후텁지근한 여름공기가 고여 있었다.
향촌동 골목은 좁고 구불구불하다. 50, 60년대 그 좁은 골목을 따라 하코방(단칸 가건물) 같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술집, 다방, 음악 감상실, 식당…. 지금은 남루한 골목이 돼 버렸지만 1950년대 향촌동 골목은 한국최대의 문학거리였다. 6.25 전쟁으로 전국의 문인들이 대구와 부산으로 피란왔고, 향촌동은 피란 문인들의 근거지가 됐다.
당시 문인들이 오고갔던 골목은 70년대 80년대 대학생들이 많이 찾던 '무궁화 백화점'에서 중앙통 방향이 아니라 '무궁화 백화점'에서 북성로 쪽으로 이어지는 좁은 골목들이었다. 이 거리는 1920년대 일본인들이 유흥가로 조성했다. 일본인 상가였던 북성로가 있었고, 관청과 은행이 경상감영 공원 주변에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향촌동의 최대 전성기는 1930년대였다. 당시 골목에는 사미센(일본 악기)소리와 게다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떠난 후 쇠락기미를 보였지만 한국전쟁으로 문인들이 피란 오면서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 시인 구상이 단골로 묵었던 화월 호텔(현재 판코리아 성인텍), 화가 이중섭이 담배 은박지에 그림을 그리던 백록다방(현재의 비바리), 시인 이효상의 '바다' 출판 기념회가 열렸던 모나미 다방(현재 명성식당)이 있었고, 그 맞은편 북성로 골목 건너에는 음악가 권태호 선생과 그랜드 피아노로 유명했던 음악다실 백조(현재 제비표 페인트 위)와 문학계를 발간한 꽃자리 다방(국제 미공사 옆)이 있었다. 육사의 시, 청포도에서 이름을 따온 청포도 다방(현재 한일 유료주차장 옆, 성미 초밥집)과 소설가 최태응과 화가 이중섭이 묵었던 경복여관(현재 코끼리가 청바지를 입는 이유. 아세아 양행 자리)도 있었다.
피란시절 향촌동을 넉넉하게 만든 사람은 시인 구상이었다. 그는 대구 피란시절 문단의 궂은 일을 도맡아 했다. '구상'이란 이름 두 자면 도원동 유곽을 무상으로 드나들 만큼 명망과 신용을 갖춘 인물이었다. 문인들은 무시로 외상술을 마셨고, 시인 구상이나 정훈국 소속 군인들이 외상값을 갚아 주었다. 당시에 문인들은 외상술을 마시면서도 호기로웠고, 술집 주인들은 외상인 줄 알면서도 술상 내놓기를 꺼리지 않았다.
1950년대 후반 젊은 작가였던 김윤환, 허만한, 윤장근씨 등은 곤도주점과 건너집, 고바우집 등을 무시로 드나들었다. 그들 손에는 종종 책이나 우산이 들려 있었다. 여차하면 마시고 책과 우산을 맡길 요량이었다. 그깟 헌책과 우산으로 술값에 댈 수는 없었지만 아끼는 책과 우산인 만큼 반드시 다시 찾아갈 것이라는 보증수표가 됐다. 당시 술집 주인들과 다방 마담들은 문학을 알고 낭만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1956년이었을 겁니다. 술 한잔 마시려고 향촌동 골목을 걷고 있었는데 '허허허' 하고 호기롭게 웃는 목소리가 술집 대지바(지금의 대화식당)안에서 들리지 뭡니까? 구상 선생이었어요. 얼른 들어가 인사했지요. 구상 선생 눈짓 한번이면 무한정 마실 수 있었거든요."
당시 젊은 문인이었던 윤장근씨는 구상 선생의 허락을 얻은 다음 다시 골목으로 나왔다. 그리고 몰려다니던 젊은 문인들을 모아 대지바로 들어갔다. 그날 그들은 양주를 마셨다고 했다.
화가 이중섭이 담배값 은박지에 못을 눌러 그림을 그리던 백록다방(현재의 비바리)은 경북여고 동기인 정복향, 안윤주 두 인텔리가 마담으로 있었다. 마담들의 빼어난 미모와 지성미는 숱한 문인들을 불러모았다. '음악은 르네상스에서, 차와 대화는 백록에서' 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르네상스(현재의 최미용실·세명식당)는 호남의 갑부 아들 박용찬씨가 피란길에 레코드 한 트럭분을 싣고 내려와 문을 열었던 대구 최초의 클래식 음악감상실이었다. '르네상스'는 피란 문인들의 기항지였다.
화가 이중섭은 굶어죽을 만큼 가난했다. 구상 선생의 주선으로 그의 전시회가 당시 미국 공보원에서 열렸고 원장 맥타가드가 담배 은박지에 그린 그림 한 점을 샀다. 그 그림은 현재 미국 뉴욕 현대 미술관에 전시돼 있다고 한다.
피란기 전성기를 누렸던 향촌동은 문인들이 떠나고 60년대를 지나면서 쇠퇴했다. 70년대 80년대 젊은이들은 무궁화 백화점과 중앙통 쪽으로 옮아갔다. 그들은 향촌동에서 삽겹살에 소주를 마셨고, 김치에 막걸리를 마셨다. 술 마시고 노래하던 그들도 떠났고 현재 향촌동은 60대와 70대들의 공간이 됐다. 먼 인생길을 걸어온 노인들은 경상감영 공원의 그늘에 앉아 휴식하고, 근처에 밀집한 성인텍에서 춤을 춘다.
그때, 그 자리
르네상스
대구 최초의 음악 감상실이었다. 현재의 최미용실`세명식당이 있는 자리이다. 손님이 뜸한 것인지, 문을 닫은 것이지 취재진이 탐방했을 때 가게는 조용했다. 호남 갑부 아들 박용찬씨가 1951년 1.4 후퇴 때 트럭 한 대분의 레코드 판을 싣고 내려와 문을 열었다. 문인들은 르네상스에 앉아 음악을 들었고, 삼삼오오 인근 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막걸리잔을 기울였다. 외신기자들이 '폐허에서 바흐를 듣는다.'고 했던 기적의 공간이었다.
대지바
구상 선생이 자주 찾던 술집으로 향촌동에서 몇 안 되는 고급 술집이었다. 당시에 양주를 팔고 여급이 술을 따랐다. 대지바의 마담 최옥수는 상하이 댄서걸 출신으로 구상보다 연하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구상 시인을 '상아'라고 친구처럼 불렀는데 구상 시인은 그저 허허 웃어넘겼다고 한다. 지금의 '대화식당' 자리이다.
백록다방
천재 화가 이중섭은 1955년 초 대구로 와 이 다방에 앉아 담배 은박지를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렸다. 이중섭 화가는 구상 시인의 권유로 최태응과 함께 경복여관 2층 9호실에 한동안 머물렀다. 이중섭은 정신분열증을 앓았는데, 자신의 그림을 사가는 사람들에게 '멍텅구리, 내 사기에 속았다.'고 비웃기도 했다. 그 해 여름 서울로 돌아가 치료를 받았지만 9월 6일 타계했다. 백록다방과 경복여관은 화가 이중섭의 마지막 예술 공간이었다. 백록다방은 당시 대지바 옆에 자리잡고 있었고 현재 비바리 1층이다. |
첫댓글 산호초님 혹시 대구분이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