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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龍雲의 ‘님’에 대한 정체성 연구
- 萬海의 ‘님’은 “衆生 속의 自我”
엄창섭(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 월간『모던포엠』주간)
1. 서론 : 연구사 검토 및 문제 제기
모름지기 문학을 생명의 양식으로 제시한 萬海 韓龍雲(1879~1944)은 이 땅의 예언자적인 선사요, 저항적 문인이며 신문화여명기의 진정한 혁명가요, 교육자로서 다양한 삶을 영위한 실존적 인물이다. 차제에 한국 근현대문학사에서 ‘현대시의 정점’인『님의 沈默』(회동서관, 1926) 간행 100주년 기념특별전이 필자와도 연이 남다른 전보삼 만해문학관 관장에 의해 남한산성의 만해문학관에 이어 현재도 인제 만해문학관에서 아카이브(archive) 전시회가 열리고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그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어 각종 학술논문과 문학상, 그리고 기념행사가 다채롭게 추진되고 있다. 그렇다. 민족시인 만해는 그 어느 때보다 정신적 지도자가 요청되는 현재성에서 우리의 사상사에 주요골격을 형성한 불교의 근대화와 대중화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실체다. 까닭에 민족사의 격동기를 체감하며 ‘자유와 평등을 통섭하는 사회의 구현’을 위해 민족의 생명력을 수긍하고 몸소 그 사상을 지켜냈음은 주지할 점이다.
까닭에 만해의 시집『님의 沈默』 간행 100주년 각종 기념행사에 때맞춰 동시대의 문인 중 민족시인 윤동주와 만해의 시문학에 지극한 애정과 관심을 지니고 문화예술 분야에서 초 장르적으로 활동하는 박성진 문화평론가가 만해의 삶과 문학, 불교사상과 독립운동의 정신을 현대인의 시선으로 다시 조명한 “『님의 沈默』백년, 다시 만해를 읽다 - 사랑과 자유, 저항과 침묵으로 되살아나는 한용운의 문학정신”을 차별성 있게 묶어낸 평론집 출간은 더없이 각별하다. 까닭에 만해를 독립운동가·승려·시인이라는 세 영역으로 구분 짓고 자신의 삶 전체를 관통한 자유와 존엄, 양심과 민족정신’은 박성진 문화평론가의 지론인 ‘소소한 삶의 일상을 철저하게 一切唯心造의 법리에 결부하여 “한 편의 작품을 완성하고 한 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는 일에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라는「날마다 삶을 축제로」의 각별한 제언은 놀라운 충격이다.
특히 동학란과 3·1운동의 격랑에 몸담으며 불굴의 신념과 강직한 지조를 소통의 도구로 표출한『님의 沈黙』에 표현된 ‘님’의 정체에 관해 그간에 ‘自然, 戀人(異性), 祖國, 佛陀, 涅槃의 세계’ 등으로 다각적인 연구가 수행되어왔다 여기서 만해의 경우, 그 자신은 어떤 때에 국한해서만 시인으로, 승려로, 불교 사상가 또는 민족주의자로 행동한 것이 아니라, 진정 이 모든 것이기를 항상 결단했다. 또 한편 그 자신의 시적 경향이나 특징은 지극히 전통적이면서도 근대와 전통 사이의 아이러니(ironic)로 매듭지어지고 있기에 위대한 역사성이 존재한다. 또 한편 그 자신의 진면목은 온갖 고뇌와 회의 속에서도 일세를 풍미한 위대한 존재감이다.
모처럼 평자가 “『님의 沈黙』에 表現된 萬海의 詩世界-衆生 속의 自我”에 대해 확증하였듯, 만해 시 정신의 근간인 ‘님의 정체성(identity)’을 다시금 술회하며 심도 있게 고찰하는 것은 뜻깊은 정신작업이다. 일단, 만해는 사색과 명상에 잠겨 생명의 구경을 노래한 인도의 시성 타고르(Rabindranath. Tagore)와는 달리 ‘我空과 혁명 속을 자유롭게 갈마(Karma)들며 민족과 종교에 생을 바친 불멸의 투혼이다. 앞서 그 자신이 ’破怯 못한 성악가임‘을 자인하고 예술가로서 시를 쓴 것이 아니라 ’一切唯心造‘의 법리에 철저하게 몰입하며 문학 활동도 전개하였다. 까닭에 일제강점기의 저항적인 시인으로 대별되는 만해는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실천적 행동인에 앞서 불교의 대중화와 선진화를 앞당긴 승려일 뿐 아니라, 민족에게 시집『님의 沈黙』을 간행하여 바친 모순의 시대에 민족혼을 고양시킨 사상가였다. 따라서 한국현대문학사에서 민중의 지속적 관심을 받은 상징적 시인으로 그의 시편은 대중성과 예술성을 조화롭게 수용하였다. 차제에 연구사적인 면을 분할·통합하면 1944년 6월, 만해가 입적한 직후부터 문학 전반에 관한 관심이 대두되었고, 1957년 서정주 편찬의『韓國詩人全集』에 “한용운편”이 수록되면서 문학인으로의 본격적 연구 또한 수행되었다.
그렇다. 뒷날 연이은 정태용, 조연현, 조지훈 등의 논의도 그렇거니와 朴魯埻·印權煥의『韓龍雲硏究』(通文館, 1960)는 마침내 시금석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한편 60년 후반에 송욱은 타고르 시와의 비교문학적 연구를 통한『詩學評傳』(一潮閣, 1967)에서 만해 시 연구의 시야를 보다 확대하였고, 백낙청은「시민문학론」에서 만해의 시민의식과 민족 문학론을 근대적 시각으로 분석하여 만해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까닭에 진리 그 자체는 언어 이전의 존재이기에『韓龍雲思想硏究』발문에서 “한국의 만해가 아니라, 세계정신사 속의 萬海 韓龍雲”이라는 전보삼의 “『님의 沈黙』은 단순한 시집이 아니라, ‘한글로 쓴 팔만대장경’이다.”라는 그 같은 단언은 논리의 비약이 아닌 합리적인 해법이다. 까닭에 비교적 연구사 검토에서 본격적 선행연구라면 김재홍의「한국현대시의 방법론적 연구」(서울대학원 석사학위, 1972. 2)를 비롯하여 최동호의「만해 한용운 연구-그의 시적 변모를 중심으로」(고려대대학원 석사학위, 1975. 2)를 제시할 수 있다. 모처럼 본고의 연구목적은 만공 선사의 지적처럼 “하나는 무엇인고, 의심하여 가되 의심한다는 생각까지 끊어진 寂寂하고 惺惺한 무념 처에 들어가야 나를 볼 수 있게 되나니라.”라는 불문을 축으로 그간에 줄곧 논란이 되어온 만해의 ‘님’에 대한 정체성을 통시적으로 분할·통합하는 구명에 있다.
2. 본론 : 님의 정체성 논증
모름지기 만해는 몸담았던 사회현상을 님이 침묵하는 시대로 인식하였기에, 그 자신에게 ‘님의 沈黙’은 그 자체가 님의 소리이며, 님의 부재란 님의 실재에 대한 직접적인 동기부여다. 따라서 그 자신은 ‘가시적인 현상(色)은 거짓이요, 헛것(空)임을 정확하게 갈파’하였다. 그 같은 연유로『님의 沈黙』에 수록된「道通詩」를 통해 성취된 깨달음(覺)의 경지를 보여줄 따름이다. 까닭에 ‘님의 정체성’ 논의에서 역사의 혼돈기를 바람처럼 살다간 한용운(兒名은 裕天, 字는 貞玉, 法號는 萬海)의 삶의 연보를 약술하면, 1879년 충청남도 홍성군 주북면 옥동에서 韓應俊의 차남으로 출생하여 1919년 일어난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일인으로「독립선언서」에 공약 3장을 첨가하였으며『님의 沈黙』과『朝鮮佛敎維新論』등의 저서 간행 및「朝鮮獨立의 理由書」를 통해 민족의 사랑과 연민, 또 의식의 변화를 못내 갈망하였다.
그렇다. 우리 근현대문학사에서 인도의 타고르에 비견되는 그 자신은 장편소설『黑風』(1935)을『朝鮮日報』에 연재하였고 이듬해 자신이 이끌어오던 비밀 항일단체인 만당 사건으로 구금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평생을 조국과 불교의 발전을 위해 역사의 격랑에 몸을 맡긴 그 자신은 1944년 5월 9일 서울 성북동에서 고질병으로 입적하였다. 그 당시 이 땅의 대다수 수행자가 홀로 깨달음을 얻어 불타가 되려는 양상과는 역설적으로 ‘나라를 잃었는데 부처가 되면 무얼 하나? 중생들이 다른 민족에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가만히 앉아 부처가 된다고 한들 어찌 기쁘겠는가?’라는 물음 앞에서서 그는 고뇌하며 갈등을 감내하였다. 또 만해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불타가 되기를 갈망하였으며 1962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까닭에 그 자신의 시집에 수록된 다수의 시편은 ‘님’이라는 유일한 호칭을 축으로 일관된 가락을 유지하면서 임에서 비롯해 임으로 종결되었다. 이처럼 만해의 시 문학적 유산은 ‘님’의 사상으로 일관되었고, 또 생의 최후도 님을 향한 끝없는 절규와 결부되었다. 일단 만해의「군말」에서 밝힌 ‘님’에 대한 개념을 확정 짓고 있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리는 것은 다 님이다. 衆生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너에게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밑줄은 필자)
위에 인용한 시편처럼 그 ‘님’은 하나의 역설이면서 논리적 모순이다. 따라서 ‘작자의 형이상학적인 정신적 지주, 절대자, 생의 구경, 영적 절정, 피안의 경지, 열반의 세계’ 등과 같은 복합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에 유념할 당위성이 주어진다.
그의 님은 일제에 빼앗긴 祖國이다. 님은 멀어져 가려고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그 언저리를 떠나지 못하고 맴을 도는 萬海는
그리움에 때로는 자신이 「님」이 되기도 하는 혼연일체의 祖國이다.
용운의「임」은 일제에 빼앗긴 조국이다. 분명 그는 모든 정력을 조국에 바친 민족정기의 등불이었다. 다른 것은 다 그만둔다
하더라도, 1919년 3·1독립선언서에서 公約三章을 덧붙였을 뿐만 아니라.
각론하고 만해는 ‘불교사상-인도 사상-타고르의 시문학’과 연계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가적 기질의 소유자인 탓에 ‘현실참여-불교혁신, 독립투쟁-애국 사상’과 연관되고 있다. 따라서 그 자신의 시편은 고요하고 명상적이며 자연에 몰입하는 신비주의적 경향과 때로는 여성 편향적인 색채, 설의법적인 시적 기법을 수용하고 있다. 까닭에 조국을 상실한 통한의 심적 상황을 이해해야 할 것이나 그의 님은 조국과 민족의 구원, 종교적 피안에의 열망으로 상징되기에 그 실상은 못내 불확실성이다.
이처럼 선적 자세에서 자신의 주체적 인간 가치의 전반을 부정해 버리고 오직 님만을 숭배하며 소유한 모든 것을 일체 님의 영토에 종속시켜 완전한 가치 구명을 받아 충족감과 감정을 의식할 수 있음을 허심탄회하게 토로하는 지극히 순결한 나, 이 나로부터 선택받은 형상으로서의 님이란 그 정체성이 무엇인가? 이를 밝혀 정의하는 것이 만해의 시문학과 사상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핵심(core)이다. 또 한편, 단아 정중하면서도 고운 정서가 조화롭게 녹아 있는 시조집『百八煩惱』의 발문을 보면 六堂의 ‘임’은 ‘朝鮮’으로 명백히 제시되었으며, 그의 시조「봄길」에는 조국광복에 대한 신앙과 기원이 현저하게 표출되었음이 파악된다.
조국과 민족에 대한 끝없는 정열의 표현 두말할 것 없이 중생은 석가의 임이요, 또한 만해의 님일 것이며, 마찌니(Mazzini
Giuseppe)의 임이 이태리라면, 만해의 임이 조선일 것이다. 해 저문 벌판이란 이미 태양을 상실한 암담한 조국이요, 길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란 바로 나라를 잃어버리고 헤매어야 하는 이 나라의 겨레였던 것이다.
이 점에 견주어 만해의 ‘님’을 김열규는 ‘단순한 이성’, 김재현은 ‘연인’ 또 정태용의 경우는『現代詩硏究』에서 ‘불타도 아닌 빼앗긴 조국’으로, 김관호는「만해의 종교와 생애」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님’의 다양성을 언급하였다. 또 한편「님의 沈黙」의 님은 만해가 권말에서 ‘이 시를 읽고 나도 슬퍼하고 여러분도 슬퍼할 줄 압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암시적으로 조국을 말한 것이다.”라고 역설하였다. 조지훈도「韓龍雲論」에서 “선생의 문학을 일관하는 정신이 민족과 佛을 일체화한 <님>에의 가없는 사모...한용운의 님은 조국...모든 사람의 <님>은 韓國이어야 한다.” 이처럼 님과의 비극적 해후를 위하여 읊은 주문이 바로 만해의 문학으로 치부할 때, 단일 개념으로 한정하여 님의 정체성을 확정한다면 근본적인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이 점은 앞서 지적하였듯이 복합적 개념으로 해석할 타당성을 지닐 수 있다. 그 같은 결과가 “정겨운 시심과 재질은 민족아로서의 일체를 이룬「님의 沈黙」을 빚어낸 뛰어난 시인”, "한용운의「님의 沈黙」에 나타나는 임이 곧 조국이요, 불이다.”, “모든 해탈은 마땅히 일절 중생의 心行 가운데서 체득된다. 만해의 님은 일체중생의 마음을 뜻하므로 조국과 민족이 그 실체라 할 수밖에 없다.” 등이 그 같은 일례다.
그렇다. 만해의 시적 형상화는 생각과 연상과 비유, 이미지들이 하나의 초점에서 출발하여 하나의 초점(님)으로 귀결되기에, 진정한 그의 님의 정체성은 님 자체로 귀결되고 근원으로부터 구명되어야 한다. 이제 그의 님은 그 베일을 벗어던지고 “범세계적인 형상으로 자신의 像을 부각해야 할 날이 왔다.” 고은도 ‘그 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민족이 되기도 하고 님 자체가 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무개념임’을 전제하면서 “한용운의 님을 무어다 무어다, 무엇과 무엇의 일체다. 따위로 말한다면 님을 민족이나 불교에서 말하는 중생의 윤곽으로 보지 않고 님 자체가 포괄하고 있는 梵我一如의 無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제시하였다. 그간에 님의 정체는 비교적 복합적인 의미의 대상으로 해석되었다. 반면에 김상일의 경우, “항시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사랑하지 않곤 그의 정신적 평형을 유지할 수 없었기에 사랑한 데 불과한 것”이라는 모호하게도 해석을 하였다.
까닭에 만해에게 ‘님’이란, “생명의 근원이고 영혼에의 極致였으며 또한 삶을 위한 信念의 결정”이었음을 고려할 때, 그의 시「알 수 없어요」에서 나 이외의 대상을 누구라는 그윽한 드러남으로 표출하고 있으나 최종 연에서 ‘나(我)-衆生’으로 종결하고 있음을 파악할 것이다. 까닭에 불교사상에 있어 만상의 깊음 속에는 佛陀의 境地가 있다. 즉, 만유는 저마다 의식의 내면에 님을 모시고 있다. “만해의 시「알 수 없어요」라는 처음 연에서 끝 연까지 의문형 종지부로 끝나고 있는 동시에 6번에 걸쳐 “누구의...입니까?”라고 묻고 있지만, 결국은 ‘누구’란 바로 ‘임’의 표현이다.“ 까닭에 나란 깨닫고 보면 님의 한 드러남이며 바로 그것은 ‘님’과 ‘나’와의 깨달음(覺)에서의 ‘나’는 ‘님’에 합일하고자 ‘님’을 사모하고 갈구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자신을 갖고 현상을 법신으로 관하고, 현상학적인 모든 것을 바로 법신으로 이해하는 그의 입장을 다음처럼 제시한 한종만의 지적은 유의미하다.
佛과 衆生이 一切이기 때문에 敎와 衆生도 一致하고 法과 衆生도 一致하기 때문에 說法敎化는 佛과 衆生이 同時物이라는 것이
다. 또한 佛法에서 度人하는 것은 醫學으로 病을 治療하는 것과 같이 衆生의 根機에 다라「無有定法」으로 濟度하라는 것이라.
이처럼 만해의 시집은 생생한 현실주의가 비전이나 예언의 형태로 전환되는 과정에서의 탁월한 정신적 산물임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다. 시집의 제목이『華嚴經』의 ‘法界緣起說’에 기인한 점을 고려할 때, 그의 시 세계에서 ‘님의 정체’란 형이상학적인 높은 정신적 지주에 해당하는 “衆生 속의 自我”라 정의는 지극히 논리적이고 객관성을 지닌다고 할 것이다. 만해 자신도 “인생과 자연이 어찌 양계가 있으리요, 오동 즉 나요, 나 즉 오동이나 我與梧桐이 非一非二니라.”고 주장하였다. 이 점에 있어 조종현은 자신의 저서에서 “時空에 처해 있으면서 또한 시공을 초월하고, 초월했으면서도 항상 처해 있는 不生·不滅의「님」엄연히 존재하는 그「님」은 곧 절대적인 ‘絶對者我’ 곧 ‘眞我’이다.”라고 천명하면서 “임과 나(我)가 동일체로 승화된 거기에는 자비와 보살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영원한 사랑을 받는 것이며 ‘眞空卽妙有라는 절대적 경지’를 뜻한다.”는 이론으로 뒷받침하였다.
그 같은 측면에서『님의 沈黙』에 내재된 ‘님’의 진면목은 한층 더 밝히 드러난다. 불경에서 모든 중생이 불도에 용맹정진하면 그들 자신이 해탈하여 불타가 될 수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시편에 상징된 님은 곧 불타로서의 가능성을 지닌 自我와 자기를 초월한 무상무념의 상태에서 진정한 자기와의 이별을 설워하고 못내 그리워하는 것을 수긍할 때, 김해성의 “<님>과 <당신>은 일체다. 님과 당신의 일체화는 자기-만해 시인의 모든 것이며, 사랑의 대상이고 전부다.”라는 지론은 그 나름의 호소력을 지닌다. 따라서 만해에게 ‘님’은 곧 ‘衆生 속의 自我’로 상징된 실체다.
각론하고 일제강점기라는 시대 상황에서 보편적으로 지식인은 다음과 같이 ①굴복과 타협, ②은둔과 도피, ③저항과 투쟁이라는 세 가지 유형의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현상에서 만해는 불퇴전의 용기와 불굴의 투혼으로 끝까지 일제에 저항하고 대결한 민족혼의 결정체였다. 안병욱은「抵抗의 人間」이란 논제의 글에서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님의 존재에 따라 그 인간이 결정되고, 그 생애가 좌우되고, 그의 행동이 지배된다.’라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만해의 시 세계는「님의 沈黙」이라는 시제와는 달리 님이 절망하고 체념하는 침묵의 세계가 아니라, 님을 전취하고 실현하는 의욕이 상기된 역동적인 세계의 역설로 마땅히 이해되어야 한다. 만해 시집의 근본 양상이 존재와 부재의 역설적 상호작용으로 접목된 현상을 인식할 때, 다시금 “인간존재의 부정성-사르트르식으로 거론한다면 인간존재의 본질이「결여(manque)」라는 사실에 그 존재적 근거를 갖게 된다.”는 점에 합법성이 주어진다.
차제에 시집『님의 沈黙』의 내면에서 존재와 부정의 변증법이 남녀의 애정 관계로 표현되듯 부재가 존재로 채워질 때, 존재와 부재는 기묘한 상관관계를 맺는다. 즉 몽환 자에게 촛불의 불꽃은 피안의 저편, 에텔 적인 비존재 쪽으로 몸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본질적으로 수직이다. 이 촛불은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 걸쳐진 불의 다리’로 그 속에는 ‘존재와 비존재가 끊임없이 공존한다.’라고「촛불-불꽃의 수직성」에서 바슐라르는 기술하고 있다. 이처럼 만해에게 있어서도 ‘님의 沈黙’ 속의 님은, 정치·사회·종교 행위 전체에 다리를 걸쳐 놓고 있는 근본적인 존재 양식에 대한 반성이며 오로지 그 반증에 해당한다는 점은 한 번쯤 수긍할 일이다. 혹여 만해의 ‘님’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것은, 곧 ‘님’의 정체와 의미에 대한 바른 이해에 관한 학구적인 문제로 그의 시 세계를 바르게 고증하는 키워드에 해당한다. 모처럼「님의 沈黙」에서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이처럼 님을 떠내 보내지 않은 시인(自我)의 정서를 통해 님의 실체는 존재되고 인식된다. 보내지 않은 마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님은 또 상대적으로 큰 무게로 존재한다. 비교적 참된 시어란 표현에 있어서나 어조는 은밀하고 나직하다. 그렇다. 그 내면의 사상성에서 어떤 웅변이나 설교보다도 굳세고 열정적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만해의 시편에 담백하면서도 진실성이 내포된 시어를 즐겨 사용하고 있다.
또 한편 만해의 시 세계에 있어 불가분의 연계성을 지닌 정신적 뿌리는 불교적 空의 사상이다. 그의 님이 복합적 의미를 지닌 ‘衆生 속의 自我’로 검증될 때, ‘님’의 존재 여부는 空, 즉 ‘五蘊皆空’으로 이는 五蘊 중의 ‘受, 想, 行, 識’인 주관적 心識에 속한다. 인간의 의식작용은 ‘根, 意, 識’의 화합으로 형성되지만, 이 모든 것은 나의 인식에 의해 존재한다. 때문에 주객관의 세계는 모두 空의 상태이면서도 色과 상호의존의 관계이기에, 자아의 개념은 ‘자기와 타인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自他不二의 사상으로 인도 사상과 연계성을 지닌다. 따라서「우파니샷드(Upanisad)」에 ‘너는 全世界다. 나는 너다.’라는 지침이나 불경의 ‘타인을 자기 안에서 윤회시키는’ 즉 自他互融의 자타 평등을 주장하는 것으로 개별적 자아와 절대자의 일치를 뜻하는 것이다.
여기서 만해의 시집에서 ‘님’의 정체는 단순한 인간적인 애인으로 국한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또 한편 혹자의 주장처럼 ‘어떤 때는 불타도 되고 자연도 되고 일제에 빼앗긴 조국이 되기도 하였다. '님'이 지닌 상징적 의미는 그만치 형이상학적 다양한 신비성을 띄우고 있었다.’ 최원규나 심종언에 의하면 연구자의 주장인 만해의 ‘님’은 불도의 궁극적 경지 또는 그 경지를 인격화한 절대자를 내포한 형이상학적인 정신적 支柱로서 ‘衆生 속의 自我’로 결론짓기에 더 이상의 주저함이 있을 수 없다.
현실적으로 출현한 ‘佛’ 이상의 영원한 本體, 즉 상징적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물론 詩作은 자체의 분석과 구조에 의해서 다양한
의미로 표현할 수 있지만, 보다 근원적인 면에서 바라볼 때「十玄談註解」에 깔린 ‘法身’으로서 現象, 그 자체를 ‘眞空妙有’란
‘本體’로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만해의「님의 沈黙」을 분석하여 생명 사상의 표출양식으로 그의 문학과 사상, 그리고 독립운동을 일관된 축으로 윤무하며 생명의 존엄성을 도출한 이선이의『만해 시의 생명사상 연구』(월인, 2001)나 이선중의 “만해 시 연구-님의 침묵의 의미와 화자의 기다림 양태 연구”(창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06)는 가일층 다양하고 발전적인 새로운 양상의 연구업적 물에 해당한다. 만해의 내면 심리의 심층부에 파고들며 무의식의 발현 양상과 ‘님’의 정체성에 대한 분할·통합은 ‘무의식 발현과 原型象徵, 자아 倒置的 자아와 아니마의 콤플렉스, 그리고 아니마와 나르시시즘의 合一에 충실한 결과물로 평가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까닭에 류양선은 “만해의 시집『님의 沈黙』의 창작 동기”(한국현대문학 연구, 2007)라는 새로운 측면에서 접근한 반면, 어떤 개념이 은유적 기반이 되어 ‘사랑’이라는 추상적이고 정서적인 개념을 구조화하여 심층적으로 실증하여준 이강하의 “만해 한용운의「님의 침묵」에 대한 인지 시학적 분석”(한국현대문학 연구, 2009)에 있어 일단, 인지 시학은 ‘사랑’을 개념화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어떻게, 무엇에 의해서 개념화되었는가를 심도 있게 탐색한 연구로, 그간의 침체된 만해 시 연구에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 결과물로 확인될 것이다. 그렇다. ‘만해는 님을 뜨겁게 절규한 웅변가로 존재감을 확보한 것이 아니라, 처절하게 그 길을 걸어간 위대한 한국인임’을 주창한 김광식은『만해 한용운 평전-첫 키스로 만해를 만나다』(참글세상, 2009)를 역설하였으나, 비교적 만해 시의 연구를 통시적 관점에서 심층적으로 검색한 김용직의『님의 沈黙 총체적 분석 연구』(서정시학 신서·19. 2010)는 괄목할 공적이다.
3. 결론 : 문제의 제기
모름지기 필자의 학위논문인「韓龍雲의 ‘님’에 대한 정체성 연구-萬海의 ‘님’은 “衆生 속의 自我”」에 대하여 새로운 의미부여로 다시금 언급하였다. 앞서 영국의 시인 엘리엇(T. S. Eliot)이 그의 시「The Hollow men」에서 ‘우리는 텅 빈 사람, 우리는 가득한 사람’이라는 역설처럼, 만해는 공간이면서도 텅 빈 공간이 아닌 님의 실체를 찾아서 고뇌하며 윤무하였다. 이 같은 행위는 강렬한 신앙에 의한 종교적으로 無我의 경지까지 승화시킨 애국심의 발로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옥중투쟁 3대 원칙」이나 심야에 焚香黙坐하며 佛典에서 ‘나는 약소국에 태어난 한 박복중생입니다. 이 철천지한을 참을 수 없으니, 이 민족에게 서광이 돌아오게 하소서.’라고 절규하면서 염원한 일은 눈물겨울 뿐이다. 따라서 1967년 후학에 의해 파고다 공원에 세워진「龍雲堂 大禪師碑」의 비문에 ‘韓國末年에 山中 佛敎를 都市로 끌어내어 大衆化하고 아울러 衰之하는 國運을 만회하여 민주사회를 실현하려던 指導者’라고 각인하였듯이 그는 수난의 역사 앞에 통분하면서 절망과 좌절감에 사로잡히지 않은 조국광복을 예감하되 자존감을 상실하지 않은 초지일관한 민족의 큰 스승이다.
그렇다.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 조국의 불확실한 시간대에서 우리는 상실한 자아를 되찾아 따뜻한 감성과 자존감을 회복해야 한다. 앞서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가 ‘현대인의 병리성을 비자립성, 무사상성이라.’고 역설하였듯, 치열한 지식·정보화 사회에서 생존하고 있는 현대인의 불안과 비극은 진정한 자아와 삶의 좌표, 사랑과 열정의 상실에서 비롯된다. 위대한 인물이 가도 그의 사상과 업적은 빛을 발하듯 이렇게 만해의 인간적 위대함을 거론하는 정신작업은 오로지 철학과 사상, 용기와 민족애의 계승함의 비롯됨이다. 까닭에 모든 확신은 대상이 올곧고 참되다면 강렬하게 진정한 자아의 내면의식에 그 정체성을 확장할 일이다.
결론적으로 김현승이 19세기 영국의 시인 테니슨(Alfred. Tennyson)의 사상적인 장시「In Memoriam」의 시구를 인용하면서 “무형한 신을 실체를 껴안듯 포옹하는 테니슨의 신앙이 더할 수 없이 강력한 것이라면, 빈 공간을 님의 실체로 보고 그곳을 돌며 춤추는 한용운의 신앙은 얼마나 강력한 것인가?”라고 지적했듯 만해는 단순히 시인이나 선사, 그리고 사상가로 시를 쓴 인물이 아니다. 까닭에 박성진 문화평론가의 시혼을 불사른 평론집「『님의 침묵』백년, 다시 만해를 읽다 - 사랑과 자유, 저항과 침묵으로 되살아나는 한용운의 문학정신」은 끝내 그 가치와 의미가 지대하다. 모쪼록 2%의 염분이 오염된 바다를 정화하듯 ‘극소수의 창조자’로서 궁핍한 민족을 구제하려는 절박한 정신작업의 방책으로 준엄한 시대에 시 짓기에도 몰입한 만해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날(刃) 푸른 이 땅의 정신적 큰 스승임은 지극히 확정적이다.
* 약력 : 강릉태생,「華虹詩壇」(발행인, 1965),『시문학』출신, 한국시문학 학회 회장 및 김동명학회 회장, 관동대학교 교수
(대학원장 및 총장대행) 역임, 현재 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 한국현대문예비평학회, 한국기독교문인협회, 아태문협, 문화앤피플
고문, 사) k-정나눔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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