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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人이여, 일보 전진하자
-임화(1908~1953), 『조선지광』(1930)
1. 땀내나는 그러므로 경건한 일상
예술가란 진정한 의미의 창조자여야 한다. 그 위대한 소통 능력 때문에 예술가는 게릴라만큼이나 위험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빅토르 하라(Victor Jara, 1935~1973, 칠레)
야곱은 하란을 향해서 갔다. 그가 어떤 장소에 이르렀을 때, 해가 이미 떨어졌으므로 그날 밤은 그곳에서 머물기로 했다. 돌을 하나 주워서 그것을 베개 삼고 누워 잠을 청했다. 야곱은 사다리가 땅 위에 세워지는 꿈을 꾸었다. 사다리의 끝은 하늘에 닿았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사다리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야훼께서 그 위에 서시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하느님 야훼다.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나는 너와 너의 후손들에게 주니, 너는 동서남북으로 세력을 뻗쳐 나갈 것이다. 너로 인해서 땅 위의 모든 족속이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지 않느냐? 네가 어디로 가든 너를 지켜 줄 것이며 또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리라." 야곱이 잠에서 깨어 말했다. "분명히 야훼께서 이 자리에 계시는데 내가 그것을 몰랐구나." 그리고 그는 두려워졌다. "이 장소는 그 얼마나 신성한 곳인가! 이곳이 바로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로구나."
-창세기
아버지는 자신이 만든 지도 위에 거리를 기록해두었는데, 킬로미터가 아니라 도보로 걸리는 날과 시간이 표시되어 있었다. 지도 위에 구체적으로 표시된 사항들은 그 고장의 실제 규모를 보여주며, 그가 그 지도를 좋아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 있다. 걸어서 건널 수 있을 만큼 야트막한 강 건널목, 깊거나 물살이 거센 강, 기어서 올라가야 하는 산등성이, 꼬불꼬불한 산길, 말을 타고는 갈 수 없는 계곡 깊숙이 있는 가파른 길, 넘을 수 없는 절벽들…아버지가 직접 그린 지도들 위에 적어둔 지명들은 하나의 기도문처럼 경건하며 태양 아래 초원을 횡단하거나 구름 사이로 솟은 산을 힘겹게 오르는 멀고 험한 강행군을 말해준다. 도보로 서른두 시간 거리는 험한 땅을 하루에 십 킬로씩 걸어서 닷새 만에 이르는 거리다…. 열다섯 해라는 긴 세월 동안 그 고장은 바로 그의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많은 곳을 돌아다니고 측정하고 고통받은 그보다 그 고장을 더 잘 느낄 수 있는 자는 영원히 없으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르 클레지오, 『아프리카인』(문학동네, 2005)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잠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1941, 문장)
시간적으로 볼 때 우주는 무시무종(無始無終)하게 '성, 주, 괴, 공'한다고 합니다. 우주는 성립되었다가[成] 머물다가[住], 파괴되었다가[壞] 텅 비고[空], 다시 성립되었다가 머무는 등의 과정을 무한히 되풀이 합니다. 마치 삼각함수의 싸인 곡선과 같이…. 한 번 '성주괴공'하는 데 80겁이 걸리고 이를 대겁(大劫)이라고 합니다. 성겁, 주겁, 공겁, 괴겁 각각의 기간은 20겁이며 이를 중겁(中劫)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1겁을 소겁(小劫)이라고 합니다. 사물은 생주이멸하고, 중생은 생로병사하며, 우주는 성주괴공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호흡이나 신체감각의 무상을 자각하는 수행이지만 이 거대한 우주 역시 무상합니다.
-김성철, 『불교초보탈출 100문 100답』(불광출판사, 2009)
작년 어느 날
길거리에 버려진 신문지에서
내 나이가 56세라는 것을 알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아파서
그냥 병과 놀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내 나이만 세고 있었나 보다
그동안은 나는 늘 사십대였다
참 우습다
내가 57세라니
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
소녀처럼 포르르포르르 할 수 있는데
진짜 할머니맹키로 흐르르흐르르 해야 한다니
-최승자, '참 우습다', 『쓸쓸해서 머나먼』(문학과지성사, 2010)
탄생과 소멸은 정지된 '점'이 아니라 지속되는 '선'으로 존재하며, 그 선들은 동일한 선의 안팎을 이룬다. 다시 말해 탄생은 최후 소멸의 순간까지 계속되고, 소멸은 최초 탄생의 순간부터 계속되므로, 양자는 동일한 과정의 서로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우주의 여러 역설들을 통해 설명되는데, 가령 밤하늘을 바라보는 우리는 137억 년 전 최초의 우주의 목격자라고 한다. 즉 우주가 탄생하는 순간 생겨난 빛이 137억년 동안 초속 30만 킬로미터로 날아와 '우주 지평'을 넘어갔다가 아직도 돌아오고 있는 중이라 한다. 수많은 별들에도 불구하고 밤하늘이 어두운 것은 그 때문이라 하며, 어두운 밤하늘이 '우주가 젊다'는 증거가 된다고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기서도 젊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모순어법이 통한다.
-이성복, 『타오르는 물』(현대문학, 2010)
이 우주 어디엔가 인간 말고 또다른 지적인 생명체가 있으리라는 건 그리 새로운 생각은 아니다. 이미 2천여년 전에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는 은하수는 별들의 집단이며 공간은 무한하다고 상정했다. 그의 생각은 지구가 특별하지 않다고 보는 “다수 세계” 관념의 시초였다.
오늘날 과학자들이 관찰할 수 있는 은하의 수는 대략 600억개다. 그 은하들에 들어 있는 별의 수는 10²²개, 곧 10억개의 10억배의 1만배다. 그 많은 별들 주위를 도는 숱한 행성들 가운데 오직 태양 별의 일개 행성 지구에만 생명이 있다는 건 정말이지 믿어지지 않는 가설일 수 있다.
“다들 어디에 있을까?”
20세기 이탈리아의 천재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는 ‘우리들만 있을까’라는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 던졌다. 이 책의 지은이는 페르미가 던진 이 수수께끼, 다시 말해 ‘페르미 역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태양계가 특별하지 않다면 우리 은하에 있는 수십억개의 별들 중 일부에는 지구형 행성들이 딸려 있다. 그 행성들 일부엔 생명이 산다. 그 세계들 일부에 사는 생명은 진화하여 지능·기술을 획득할 것이다. 현재 우리 기술을 줄잡아 추정하면 우리는 광속의 1%로 여행할 수 있으며 그 속도면 우리 은하를 탐험하고 이주하는 데 1천만년이 걸린다. 1천만년은 우리 은하의 나이에 비하면 아주 짧은 세월이다. 그러므로 외계 문명들이 우리와 통신하거나 우리를 방문할 시간과 기회는 많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다들 어디에 있을까?
페르미의 역설은 다시 요약하자면 다음 세 가지 ‘주장’에서 비롯된다. 첫째, 통신 능력과 항성간 여행 능력을 갖춘 외계인들이 존재하거나 과거에 존재했다. 둘째, 외계인들이 우리 행성을 방문했다면 우리는 그들을 보아야 했다. 셋째, 우리는 그들을 보지 못했다.
만일 외계인이 존재한 적이 없다면 둘째와 셋째 주장의 모순은 사라진다. 이 경우 우리가 우주 공간을 여행하는 최초의 문명이 된다. 이 결론은 페르미 역설을 정면으로 맞받아치지만, 외계인이 있다는 주장이 거짓임을 증명해야만 한다. 만일 셋째 주장이 거짓이고 우리가 외계인을 본 적이 있다면 역설 전체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지은이는 외계인이 존재하며 이미 우리와 접촉했다는 믿음을 “전혀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일단 배격하고 얘기를 풀어간다.
대신에 지은이는 외계인은 존재하지만 아직 우리를 방문한 적이 없다는 가정 아래 페르미 역설을 파고든다. 요컨대 ‘드레이크 방정식’을 통해서다. 1961년 프랭크 드레이크가 미국의 외계지능탐사(SETI) 회의에서 발표한 방정식이다. 복잡한 전제와 수식을 사상하고 결론을 얘기하자면, 생명이 살 수 있는 지구형 행성들에서 거의 늘 생명이 발생한다고 보고, 그 영속성의 값을 ‘비관적으로’ 잡는다면, 우리 은하에는 대략 1천개의 문명이 흩어져 있을 것이다. 그 문명들은 신속하게 소멸하기 때문에 두 문명이 동시에 활동할 수 없으며 문명들 사이의 거리는 수천광년이다.
문명의 지속기간을 ‘낙관적으로’ 추정해서 1천만년 정도로 잡을 경우, 생명이 살 수 있는 행성 가운데 문명이 생기는 행성이 1천만개 중 1개보다 작은 비율로 존재할 때만, 우리가 외톨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심지어 살아 있는 행성 1천개 중에서 1개만 문명을 낳는다고 하더라도, 1만개의 문명이 기술과 우주여행에 도달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우리 은하의 외곽을 2만년 전의 모습으로 본다는 것이다. 언젠가 우리가 우리 은하의 다른 한쪽에 사는 외계인으로부터 신호를 받는다고 해도, 그 순간에 그 외계인은 이미 멸종했을 수 있다. 우리는 가장 가까운 다른 은하들을 300만~400만년 전 모습으로 보며, 가장 먼 은하들을 110억~120억년 전 모습으로 본다. 우리의 한계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크리스 임피 지음·전대호 옮김, 『우주 생명 오디세이』(까치, 2009)
마르크스는 1866년~1867년 겨울에도 병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그는 <자본> 1권을 끝내고야 말겠다는 결의를 굽히지 않았다. 엉덩이 주위에 종기 때문에 앉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1권의 마지막 몇 페이지는 일어서서 썼다. 엥겔스의 노련한 눈은 텍스트 가운데 '종기가 영향을 미친 부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마르크스도 허리의 열 때문에 글이 약간 납빛 색조를 띠었을지 모른다고 인정했다. "어쨌든 나는 부르주아가 그들이 멸망하는 날까지 내 종기를 기억하기를 바라네. 그 돼지들!"
-프랜시스 윈. 정영목 옮김, 『마르크스 평전』(푸른숲, 2001)
시를 쓰기 위하여 우리는 자신과 세계를 골똘히 들여다 보게 된다. 우리가 인식의 주체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불교의 세계에 대하여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우리만이 인식의 주체라는 신념은 버리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예컨대 산에 오를 때 우리가 진달래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진달래꽃이 우리를 보는 것이며, 내가 길바닥의 개미를 보는 것이 아니라 길바닥의 개미가 나를 보는 것이다. 또한 나귀가 우물을 엿보는 것이 아니라 우물이 나귀를 엿보는 것이다. 혹은 나르시스가 샘물에 얼굴을 비춰볼 때 샘물은 그의 눈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다.
겁에 질린 한 사내 있네
머리칼은 다복솔 같고 수염자국 초라하네
위태롭게 다문 입술 보네
쫓겨온 저 사내와
아니라고 외치며 떠밀려온 내가
세상 끝 벼랑에서 마주 보네
손을 내밀까 악수를 하자고
오호, 악수라도 하자고
그냥 이대로 스치는 게 좋겠네
무서운 얼굴
서로 모른 척 지나는 게 좋겠네
-김사인, '거울',『가만히 좋아하는』(창비, 2006)
이 시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때 이 시의 화자는 인식의 주체이면서 객체로 전환되고 있다. 이처럼 자신이 객관화되면서 지나친 주관화가 갖게 되는 상투성이나 관념성에서 성공적으로 빠져나오고 있다. '사내'와 '나'는 실은 한 사람이 갖는 두 개의 다른 자아일 것이다. "악수라도 하자고"하는 것은 "쫓겨온" 그곳으로 돌아가자는 것 같은데 "서로 모른 척 지나는 게 좋겠네"라고 하면서 현재의 갈등과 고통을 암시하고 있다.
2. 일보 전진해야만 한다.
일보 전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것은 진실을 향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얘기를 해 보자. 테베의 무시무시한 괴물 스핑크스가 도시의 성벽 바로 바깥에 있는 벼랑에 앉아서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어 답을 맞히지 못하면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 버려서 아무도 감히 도시에 들어가거나 나오려 하지 않았다.
“아침에는 네 다리로, 낮에는 두 다리로, 밤에는 세 다리로 걷는 짐승이 무엇이냐”
그러나 오이디푸스가 “그것은 사람이다(사람은 어렸을 때 네 다리로 기고, 자라서는 두 발로 걷고, 늙어서는 지팡이를 짚어 세 다리로 걷기 때문에)”라고 대답하자, 스핑크스는 물속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 테베의 시민들은 환호했고, 오이디푸스를 새 왕으로 추대했다. 그리고 미망인 이오카스테와 결혼하게 되었다. 자신의 어머니라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수년 동안 이들은 부부로서 행복하게 살았다.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 두 딸 안티고네와 이스메네를 두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와 서양 문화'라는 책의 내용 중에 이러한 글이 있다. 스핑크스가 던진 수수께끼의 정답은 '인간'이었다. 오이디푸스는 자랑스럽게 답을 맞혔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신탁이 완성된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는 영광의 길이 아니라 비극의 길로 인도하고 있다. 오이디푸스가 푼 것은 수수께끼의 본질이 아니라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수수께끼는 '인간'이라는 단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하는 근본적인 의문에 대한 성찰을 기대하는 것이 아닐까. 세월의 흐름에 따라 네 발, 두 발, 세 발로 바꿔가며 걸을 수밖에 없는 인간은 변화무쌍한 '수수께끼 같은' 존재이면서 결국은 심신의 쇠약함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즉 '한계의 틀'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수수께끼가 아닐까.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좀더 깊이 성찰했더라면 오이디푸스는 어머니와 혼인하는 죄는 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미국의 멕시코 침략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납세를 거부하고 자발적으로 감옥살이를 했던 소로처럼 리 호이나키도 베트남전쟁을 시작한 미국의 부도덕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박사학위 과정을 중단하고 베네수엘라로 자발적 망명을 강행하였다. 그는 이후 다시 미국의 대학으로 돌아와 결국 정년보장 교수가 되었으나 영혼 없는 대학의 현실에 절망하여 마침내 교수직을 버리고 시골로 들어가 농부가 되었다. 그의 책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는 지상에서의 ‘좋은 삶’을 실행하기 위해 호이나키가 비틀거리며 찾아 걸어간 거룩한 길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는 인간의 덕행을 가로막는 모든 체제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한 뒤 자발적으로 자신의 충성심을 다른 것에 바치기로 하였다. 그것은 바로 땅이요, 이웃이고, 시(詩)이며, 우정이었다. 그 길은 일찍이 소로가 앞서 걸어간 길이기도 했다. 소로 역시 대학을 마친 뒤 고향으로 내려와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살며 인간의 존엄성과 고결성을 지키기 위해 부도덕한 사회에 저항했기 때문이다. 소로는 “한 사람이라도 부당하게 가두는 정부 밑에서 의로운 사람이 진정 있을 곳은 역시 감옥이다”라고 말했는데, 지금의 우리 현실에 비춰보면 그곳은 어쩌면 바로 촛불집회의 현장이거나 아니면 철거민의 망루인지도 모른다.
한번은 호이나키가 인도를 여행한 적이 있었다. 간디의 제자들을 만나러 간 여행에서 이 초행길의 나그네는 내심 걱정이 많았다. 안내표지판도 찾기 어렵고, 기차는 수시로 연착되지만 안내방송조차 드문 이국의 낯선 기차역에서 혹시 길을 잃지는 않을까, 차를 놓치지는 않을까 하고. 하지만 그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마다 기차에서 만난 인도사람들은 어김없이 선행을 베풀어 주었다. 시끄러운 인파를 뚫고 다음 기차역까지 데려다 주기도 하고, 표를 대신 사주기도 하고, 소박한 아침식사를 나눠주기도 하였다. 다른 사람에 대한 사심 없는 관심과 친근함은 인도의 민중들이 무상으로 베푸는 선물이었다. 그것은 호이나키가 이른바 선진국들을 여행할 때는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덕행이었다. 소위 선진국일수록, 경쟁적 성장논리에 사로잡힌 곳일수록, 그래서 인간이 빵만으로 살 수 있다고 믿는 사회일수록 인간적 고결함에 대해 냉소가 가득한 불경스런 장소가 되고 있었다. 그래서 호이나키는 이렇게 결심하였다. “내게 분명히 열려 있는 한 가지 행동의 가능성은 ‘아니오’라고 하는 것이다. 아니오, 나는 조용히 따라가지 않겠소. 아니오, 나는 복종하지 않겠소. 이것은 오늘날 인간답게, 가능한 한 자율혀적으로 고결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이런 결정은 명확히 말해야 하고, 매일 말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것이 되기 위해서, 내게는 규칙적인 성찰, 곧 내가 무엇을 거부했으며, 내가 아직 무엇을 받아들이고 있고, 무엇을 마지못해 견디고 있는지를 살피기 위해서 내게는 나 자신 속으로 들어갈 고요의 시간이 필요하다”라고.
머리 위에서 터지던 사과탄은 붉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둥글고 주먹만한 회색빛 사과탄은 그 매운
최루가스만큼이나 붉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수원에 이르러, 우리는 쉬이 잊혔던
어떤 사소한 기억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것은 돌팔매처럼 먼 전선으로부터 날아왔다는 것
날아와선 꽃씨 주머니처럼 인정사정없이 터졌다는 것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은 아직 꽃밭이 아니어서 그걸 도로 집어 던지기도 했다는 것
과수원은 사과 따기가 한창이었다
그 중 어떤 건 이 계절 내내
가지에 매달려 있어야 하겠지만
우리는 발아래 사과 하나를 주워 들었다
대체 누가 이 사과의 핀을 뽑아 버렸을까
사과는 붉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만큼 붉다
-송찬호, '사과',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문학과지성사)
이제 허리 구부러진 저 늙은 사과나무의 무릎에서 사금을 캐지 말자 탈옥의 휘파람도 불지 말자 생의 달콤함을 훔쳐 달아나던 팔월의 사과도 저렇게 붉은 가죽 조끼 한 벌로 포박돼 가지 끝에 매달려 있으니
여기쯤 파란 대문이 서 있었겠다 이 문으로 사내들은 진귀한 낙타 눈썹을 찾아 사막으로 떠나고 얼굴 검은 여자들이 태양의 분을 바르고 십 리를 걸어 마마와 기근을 영접했겠다 그래도 여길 다시 한 번 보아라 돌로 찧은 여뀌즙 사랑은 여전히 물고기 눈을 찌르고 갈라진 시멘트 틈에서도 아이들은 분수처럼 솟고 그대의 어미들은 천 일의 밤을 팔아 아침 한때를 맞이하리니
-송찬호, '사과',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문학과지성사)
3. 너무 예쁘게만 쓰려고 하는 건 아닌가?
예쁘게 쓰려고 했다가 봉착할 수 있는 문제가 왜곡의 문제이다. 사실에 덜 전달되는 정도가 아니라 사실을 왜곡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저널리스트이자 미술평론가이기도 한 서경식은 한국 미술을 포함한 한국 예술 전반이 너무 예쁘게만 표현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나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화가들의 작품들을 보고 '잘 그렸다'거나 '예쁘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오히려 '얼마나 절실한 그림인가' 혹은 '얼마나 치열한 그림인가'라고 늘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마디로 나는 그들의 작품에서 정신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인간들의 격력한 고투를 봤던 것이다. 한국의 근대미술은 '지나치게 예쁘기만 하다'. 여기에서 '예쁘다'는 것은 찬사가 아니다. '예쁘다'는 것은 보는 이가 그다지 저항감을 느끼지 않는 것으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지루하다는 것도 된다. 미술도 인간의 영위인 이상, 인간들의 삶이 고뇌로 가득할 때는 그 고뇌가 미술에 투영되어야 마땅하다. 추한 현실 속에서 발버둥치는 인간이 창작하는 미술은 추한 것이 당연하다. 진실이 아무리 추하더라도 철저하게 직시해서 그리려 했다. 그것이 우리를 감동시킨다. 거기에서 '추'가 '미'로 승화되는 예술적 순간이 생긴다. '미의식'이란 '예쁜 것을 좋아하는 의식'이 아니다. '무엇을 미라고 하고 무엇을 추라고 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의식이다. 자신의 '미의식'을 재검토한다는 것은 자신이 무언가를 '예쁘다'고 느꼈을 때,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느끼는지, 그렇게 느껴도 좋은 건지 되물어보는 것이다. 국가의 지배로부터 독립한 인간이고자 하는 이들은 '미의식'에서의 독립을 쟁취해야만 한다.
-서경식, 『고뇌의 원근법』(돌베개, 2009)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 철길 우에
느릿느릿 밤새어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내리는가
-이용악, '그리움'(1947)
바늘구녕만한 예지를 바라면서 사는 자의 설움이여
너는 차라리 不正한 자가 되라
오늘 이 헐벗은 거리에 가슴을 대고
뒤집어진 不正이 正義가 되지 않더라도
그러면 너의 벗들과
너의 이웃사람들의 얼굴이
바늘구녕 저쪽에 떠오르리라
축소와 확대의 중간에 선 그들의 얼굴
강력과 기도가 일체가 되는 거리에서
너는 비로소 겸허를 배운다
바늘구녕만한 예지의 저쪽에서 사는 사람들이여
나의 현실의 메에뜨르여
어제와 함께 내일에 사는 사람들이여
강력한 사람들이여…………
-김수영, '예지'(1957)
예지를 바라는 것과 부정한 자가 되는 것을 대립적으로 인식하는 한 그의 삶은 늘 시를 배반하게 되겠지만 그는 "헐벗은 걸이에 가슴을 대"기 위해 "차라리 不正한 자가 되"고자 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방법적 변신이다. 이 방법적 변신을 통하여 그는 민중을 본다. 그들은 "축소와 혹대의 중간"에 즉 과장되지도 폄하되지도 않은 모습으로 그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들이 사는 거리는 "강력과 기도가 일체"가 되는 어떤 혁명적 응집력을 느낄 수 있는 곳이며 그는 거기서 비로소 겸허를 배운다. 그들은 "나의 현실의 메에뜨르(소재, 질료)"이며 "어제와 함께 내일을 사는" 즉 역사를 담지한 "강력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 시를 통해 민중은 처음으로 김수영 시의 '메에뜨르'로 떠오르는데 그의 민중의식은 의외로 풍부하다.
활자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나의 영은 죽어있는 것이 아니냐.
벗이여,
그대의 말을 고개 숙이고 듣는 것이
그대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어라.
이 황혼도 저 돌벽 아래 잡초도
담장의 푸른 페인트 빛도
저 고요함도 이 고요함도.
그대의 정의도 우리들의 섬세(纖細)도
행동이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郊外)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어라.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김수영, '死靈(사령)'(1959)
버드 비숍 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 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
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 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 제3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
-김수영, '거대한 뿌리'(1964)
원효사 처마끝 양철 물고기를 건드는 눈송이 몇 점,
돌아보니 동편 규봉암으로 자욱하게 몰려가는 눈보라
눈보라는 한 사람을 단 한 사람으로만 있게 하고
눈발을 인 히말라야 소나무숲을 상봉으로 데려가버린다
눈보라여, 오류 없이 깨달음 없듯,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사람은 지금 후회하고 있는 사람이다
무등산 전경을 뿌옇게 좀먹는 저녁 눈보라여,
나는 벌받으러 이 산에 들어왔다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눈보라, 눈보라
더 추운 데, 아주아주 추운 데를 나에게 남기고
이제는 괴로워하는 것도 저속하여
내 몸통을 뚫고 가는 바람 소리가 짐승 같구나
슬픔은 왜 독인가
희망은 어찌하여 광기인가
뺨 때리는 눈보라 속에서 흩어진 백만 대열을 그리는
나는 죄짓지 않으면 알 수 없는가
가면 뒤에 있는 길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앞에 꼭 한 길이 있었고, 벼랑으로 가는 길도 있음을
마침내 모든 길을 끊는 눈보라, 저녁 눈보라,
다시 처음부터 걸어오라, 말한다
-황지우, '눈보라'(1988)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摩旨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정호승 '그리운 부석사',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어디서 나왔을까 깊은 산길
갓 태어난 듯한 다람쥐새끼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 맑은 눈빛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고집할 수가 없다
세상의 모든 어린것들은
내 앞에 눈부신 꼬리를 쳐들고
나를 어미라 부른다
괜히 가슴이 저릿저릿한 게
핑그르르 굳었던 젖이 돈다
젖이 차올라 겨드랑이까지 찡해오면
지금쯤 내 어린것은
얼마나 젖이 그리울까
울면서 젖을 짜버리던 생각이 문득 난다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
난만한 그 눈동자,
너를 떠나서는 아무데도 갈 수 없다고
갈 수도 없다고
나는 오르던 산길을 내려오고 만다
하, 물 웅덩이에는 무사한 송사리떼
-나희덕, '어린것,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 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 놓은, 뭉게 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 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최영미, '가을에는', 『서른, 잔치는 끝났다』
주걱은
생을 마친 나무의 혀다
나무라면, 나도
주걱으로 마무리되고 싶다
나를 패서 나로 지은
그 뼈저린 밥솥에 온 몸을 묻고
눈물 흘려 보는 것, 참회도
필생의 바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뜨건 밥풀에 혀가 데어서
하얗게 살갗이 벗겨진 밥주걱으로
늘씬 얻어맞고 싶은 새벽,
지상 최고의 선자(善者)에다
세 치 혀를 댄다. 참회도
밥처럼 식어 딱딱해지거나
쉬어 버리기도 하는 것임을,
순백의 나무 한 그루가
내 혓바닥 위에
잔뿌리를 들이민다
-이정록, '주걱', 『제비꽃 여인숙』
빽빽한 소나무숲 속에서 무언가 후다닥 가지 위로 달려 올라가다간, 휙 이쪽을 본다. 길고 탐스러운 꼬리에, 날씬한 검은 몸이 영락없는 청설모다. 소나무 가지에 날름 앉은 녀석의 작고 가만 눈이 영검하다. 먼 기억 속에 언젠가 한번은 만난 것 같은 그 마음으로 나는 서 있다. 어쩌면 어머니도 꼭 그 마음으로, 당신이 그 안에서 나온 것만 같은 가만 눈을 들여다보고 앉았고, 나도 또한 그렇게 당신의 눈을 바라보고 누워서 서로 어르던 때도 있었거니, 당신은 그 영검으로 날 키우셨거니,
오래 바라보다간,
울창한 소나무 사이로 청설모도 나도 갈 길을 간다.
-장철문, '청설모', 『바람의 서쪽』
4. 사물이나 정경 보고 생각하기
1. 어두운 밤 곧추 일어선 몽구스가 두 다리를 내려뜨리고 늑대의 기습을 경계하는 모습이라거나, 불시에 낯선 별에 착륙한 외계인이 은빛 금빛 가루를 방사하며 망연자실 서 있는 모습이라거나, 그도 아니면 어미 짐승의 자궁 속에서 눈도 뜨지 못한 채 혼몽한 잠을 자고 있는 태아의 모습이라거나…이처럼 다양한 연상을 통해 떠오르는 은유들은 그러나 결코 무작위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들은 조심스레 포개놓고 보면 막막한 삶의 가장자리에서 떨고 있는 존재들의 고독감과 무력감이 공통 속성으로 드러난다. 모든 형체는 은유의 조명을 받아 의미를 갖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도 모르는 숲 속에서 저 혼자 쓰러지는 나무와 같을 것이다.
2. 사진 속 형체의 고독감과 무력감은 다시금, 네 개의 다리를 같은 쪽으로 뻗고 잠자야 하는 뭇 짐승들의 고단함과 만나게 된다. 가령 겨울날 오후 살얼음 낀 시멘트 바닥에 곤히 잠들어 있는 동네 개들이 말할 수 없는 슬픔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무도, 아무것으로도 덮어 가릴 수 없는 그들의 헐벗음뿐만 아니라, 무감각한 다리들을 한쪽으로 뻗고 누운 무기력한 자세 때문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사람을 제외한 어떤 짐승도 제 등의 온 면적을 바닥에 깔고 편안한 잠을 이루는 경우는 드문 듯하다. 모로 누워야만 잠들 수 있는 고달픈 자세는 짐승들의 것이기에 측은한 것이 아니라, 그 자세를 지닌 뭇 존재들은 측은할 수밖에 없다. 밤늦게 돌아와 모로 누워 잠든 아이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도 다른 이유에서가 아닐 것이다. 하물며 숨 끊어진 짐승들이 영원히 몸을 버릴 때도 그와 다른 자세를 취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던가.
3. 위 사진의 형상이 모로 누워 네 다리를 뻗고 혼곤히 잠든 짐승의 모습을 떠올리게 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몇몇 남은 가지들을 한쪽 방향으로만 써레처럼 펼쳐든 높은 산 고사목을 연상시키는 것도 모양보다는 자세, 형태보다는 운동이 보다 심층적인 차원에서 은유의 작동 원인이 됨을 시사한다.
4. 그렇다면 왜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것, 행복보다는 불행이 언제나 힘 있는 은유의 동력이 되는 것일까. 어째서 기쁨은 슬픔에 비해 감동적인 은유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일까. 이 시를 보자.
10년. 얼마나 우스운 세월인가. 그간 어머니는 팔순이 되었고 9살 조카는 고3이 되었고 형은 알콜 중독 초기 증상을 보이고 동생은 여전히 금융 브로커 노릇이고 나는 염세적 시인이 되었다. 이종 해영이 형의 용달로 처음 짐을 부렸던 상계동 그 어두컴컴한 단칸방에서 그 시무룩한 짐짝들과 함께 순장될 것만 같던 어머니가 어찌어찌 영구임대아파트를 얻었다. 10년 세월이란 아이들이 딱지 한 장 뒤집는 시간밖에 되지 않지만 어머니는 지금 돌아가셔도 호상이라는 말을 들을 나이가 되었다. 그런 어머니가 네 형이 먼저 갈 것 같다고 한 건 작년 추석 때였다. 어머니가 떡국 먹은 그릇을 덜그럭덜그럭 씻는 소리를 들으며 불암산 자락을 바라보았다. 노파 한 사람이 은회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내쪽으로 손짓을 보내고 있었다. 손등을 위로 한 그 손짓이 익숙했다. 어머니였다.
-송태웅, '상계동'
가령 긍정적인 것은 이미 주어져 있으므로 부정적인 것만이 인간의 몫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이미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욕심을 내지 않는다.(그러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또한 일종의 동종요법으로서 부정적인 것을 반복기억하고 응시하는 것이 긍정적인 것을 강화시키는 유일한 방법일 수도 있다. 치료하기 어려운 불치병을 친구처럼 데리고 살겠다는 마음을 먹는 것처럼 부정적인 것이나 슬픔 같은 것들도 늘상 그것들을 어루만지며 살 수밖에 없는 것처럼.
새들이 마주 오는 죽은 새들을 마주칠 때
그들은 서로의 속눈썹을 얼굴로 쓰다듬고 지나간다
바람은 그 높이에선 늘 눈을 감는다
서로 다른 붓털이 만나서 만들어 가는 하나의 획
이상하게 한 획을 긋는 붓에서는 바람 냄새가 난다
붓을 삶는다
삶은 붓은
혈압에 좋다
-김경주, '획(畫)'
가장 먼저 학교에 온 날엔 총채를 들고 교실 바닥에 떨어져 죽은 어린새를 털고 있었고 무심히, 새는 단지 허공에 회귀하고 있는 먼지에 불과하다고 여기던 저녁엔 가장 늦게 교실을 나간다 장난감 총구를 들여다볼 땐 검은 숲에 누워 있던 소녀를, 내가 제일 먼저 발견한 눈꺼풀을, 아름다운 목이 잘려 있는 그 숲의 머리통과 눈꺼풀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다짐했고 겅중겅중 목 없이 뛰어 다니며 소녀는 누군가 매달아 놓은 나무의 그네 위에서 마을 쪽으로 장난감 총을 쏘고 있었다
-김경주, '매복'
불을 끄고 방 안에 누워 있었다
누군가 창문을 잠시 두드리고 가는 것이었다
이 밤에 불빛이 없는 창문을
두드리게 한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곳에 살았던 사람은 아직 떠난 것이 아닌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 문득
내가 아닌 누군가 방에 오래 누워 있다가 간 느낌
이웃이거니 생각하고
가만히 그냥 누워 있었는데
조금 후 창문을 두드리던 소리의 주인은
내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시간들을 두드리다가
제 소리를 거두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곳이 처음이 아닌 듯한 느낌 또한 쓸쓸한 것이어서
짐을 들이고 정리하면서
바닥에서 발견한 새까만 손톱 발톱 조각들을
한참 만지작거리곤 하였다
언젠가 나도 저런 모습으로 내가 살던 시간 앞에 와서
꿈처럼 서성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를 어룽어룽 그리워하는 것인지도
이 방 창문에서 날린
풍선 하나가 아직도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을 겁니다
어떤 방을 떠나기 전, 언젠가 벽에 써놓고 떠난
자욱한 문장 하나 내 눈의 지하에
붉은 열을 내려 보내는 밤,
나도 유령처럼 오래전 나를 서성거리고 있을지도
-김경주, '누군가 창문을 조용히 두드리다 간 밤'
첫댓글 태웅아, 해화씨가 2010년 문학아카데미 방을 따로 만들어놓았구나. 나도 거기에 강의록 올렸다. 그쪽으로 올려놓거라. 참 네 강의 듣고 배운 것이 많았다. 수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