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도 않은 말
가뭇없이 빗줄기가 후두둑 굵어진다
선풍기 바람에 등 붙이며 책장을 넘기고 있는데
마늘을 까던 아내가 묻지도 않은 말을 꺼낸다
뒷골목 용이네가 대판 싸우고 집을 나갔대
한 열흘 실컷 돌아다니다,
돌아다니다 돌아왔대
실컷 돌아다닌 데가 글쎄 어딘 줄 알아
왜 돌아온 줄 알아
그게 말이여
(듣다 듣다 버럭) 그만 혀!
(넉살 좋게) 그래도 들어 봐
(초등학교 3학년) 용이가 전화를 했대
엄마 보고 싶다고, 울면서.
용이 핑계 대고 돌아와선 용이 아버지 끌어안고 울었대
보고 싶었다고
홱 돌아앉은 내게 넌지시
나도 집 한 번 나갈까?
그래, 대판 싸우자는 겨?
마늘이나 다 까놓고 나가
비 그치면 한 스무날.
서석대에 올라
주상절리로 곧게 선 뜻이 궁금했네
크게 입 벌려 소리쳐보고 싶었네
대오를 희망 삼아
설원은 희게 살아갈 사람들의 꿈인가요
어금니 악물고 설매화라도 보려고
이끼 자국 흔적을 보러 왔네요
수 세기를 수백 번 견뎌낸 가난한 날의 마른기침
근엄한 표정 앞에 내 종아리를 걷어
허투른 입을 봉하고 회초리를 맞을게요
서릿발 밟히는 칼날 위에 붙들려 온 것처럼
마침내 프롤로그를 기억해 내는
서석(瑞石) 절리 앞에
생의 맨 처음 고고지성(呱呱之聲)을 내지르다
태로각 협곡에서
다가서지 못하고 물러설 수 없는 절벽일 때 돌은 돌로써 바위는 바위로써 물이 되고 길이 되었다 아미족 발이 붓고 손이 부르트도록 산허리를 떼고 붙이고 뚫어 네 노래는 구절양장 대중(台中)과 화련(花連)을 막아선 산맥을 넘었다 긴장의 시선은 겨울비에 속눈썹이 젖고 육신의 발목을 적시는 석회수 물줄기 따라 비취빛 대리석은 형형색색 물길보다 깊나니 장춘사 누운 넋이야 잊을 날이 있으랴만 거친 호흡 지친 육신 자모교 정자에는 애타는 모정의 눈물이 퇴행의 역사를 쓰고 태로각 구곡동 연자구 너는 거기서 대양을 건너온 제비 한 쌍 또 하나의 연가(戀歌)를 읊고 있나니 *태로각 협곡: 대만 중부의 동 서를 잇는 험준한 계곡(관광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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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눈이 이야기
날개 안의 온기로 숲을 지켰을 오목눈이
노랫말을 재잘대다가
호젓한 산비탈에 산나리를 닮아간다
산 그림자를 따라나서지 못해
꺼내지 못한 말들이 쌓여갈 때
나는 도서관 가는 길을 읽는다
서가에 꽂힌 책을 고르는 일이나
고른 책의 꼬리말까지 뒤집는 일이나
늘어진 전선의 바람을 타는 일이다
더위를 견디는 오목눈이
울음이 노래가 되도록 오늘은 시를 토한다
추위를 감싸거나 더위를 삭히는 일 어디 쉬우랴
꼬리가 긴 오목눈이 목젖이 아프면
울음을 잠시 그칠 뿐이지
슬픔이 한 슬픔을 위해 말을 건넬 때
도시의 숲은 멀어서 오목눈이 노래는 들리지 않았다
길을 걸을 때는 한사코 장딴지가 저린다거나
귀의 울음이 시가 된다는 말을 믿으라
때로는 울음도 시도 질항아리 속 숙성을 기다릴 뿐.
株式 하는 놈 -夏林 안병석
허풍쟁이 친구 하나
술 회사 주식을 잔뜩 끌어안고
주가가 올라도
내려도
핑계 삼아 술타령이다
붙잡혀 술 시중 짜증이 섬이다
별것 아닌 세상이 별것인 양
이놈 말린 혀가 금세 입 밖으로 튄다
줄줄이 술병이 동난 후
술값은 더치페이 하자는 걸 보니
오늘은 주가가 곤두박질친 모양이다
술 안 권해서 ‘망할 놈’
안주만 축내서 ‘죽일 놈’이다, 난 .
독주만 들이붓다가 세* 빠질 놈
쓰디쓴 세상에 쓴 술 주식이라니
차라리 들큼한 막걸리 회사 주식은 어떠냐?
더치페이*/각자 내기
세*/혀
음흉한 생각
도시의 거리는 맨살 요지경이다
속살 비치는 블라우스
허벅지 드러낸 미니스커트
온통 보도를 점령한 살들,
어디까지 내보여
누구를 사랑하겠다는 거냐
아직 여름은 멀었는데
숨이 차다, 이 꽃 저 꽃 숨이 막힌다
도시의 밤은 맨살 요지경이다
화덕에 지글지글 삼겹살이 돌아눕고
석쇠에 조갯살이 몸을 비튼다
흐물흐물 혀를 내밀어 관음 중이다
도수 진한 소주에 취해
꼴깍 숨이 넘어간다
지독한 밤이 팍 팍 익어간다
유미사진관
'수정이 다르면 사진도 다르다.'
우리 동네 사진관 유리문에 적힌 글귀다
인물이 달라서 사진이 다른 게 아니고
박힌 점도 빼고
주름도 잡는 수정이 다른 집
사진 한 번 찍다가 결혼했을까?
수정이 달라서 다른 아이를 낳았을까?
언제 봐도 아내는 웃음이고
유미는 천방지축 명랑하다
뭐든 수정 기술이 다른가보다
윈도우 안에는
젊고 예쁘고 싱싱한 사진뿐이다
거친 얼굴도
들이밀고 활짝 웃기만 하면 된다
수정 한 방이면 끝이다
유미사진관.
귀여운 여우
숲에 가면 귀여운 여우 한 마리 산다
도시를 잠시 떠난 박쥐의 눈빛과
심해 상어의 레이저로 체온을 식히기도 한다
조심스레 과거를 되묻는 손톱이 자라고
쭈뼛거리는 미래의 고백을 듣느라 겹눈이 둥그레진다
모로 누운 벤치에 오늘을 해체한 책 한 권과
모자란 머리숱을 쓸어올리는 바람이면 충분하다
좁은 길은 더 좁아질 일 없어 잃어도 좋다
결별의 시간을 핑계로 잠들지 말라
운명의 시간에 입을 정장을 시침하지 말라
저장할 하루 치 활자를 꺼내쓰기 좋은 시간 아니냐
생존에 빈곤해지는 누우떼의 울음과
진실 또는 절실을 백지에 받아적기에 좋다
수심이 깊은 강에 교각을 세우듯
연륜과의 결별에 입을 다무는 다리를 놓는
여름을 번식하는 귀여운 여우, 풍경이 좋다
웃자란 항변을 풀어헤친
귀여운 여우의 침묵이 산다
여름과 숲(夏林)에 들어 빛을 깨무는 내 귀여운
여우를 만난다
-夏林 안병석
-경기도 오산시 수청로31 (수청동 우미이노스빌) 107동 1001호
-전남 화순생
-팔도문학, 오산시문학, 담쟁이문학 회원
-한국아파트신문 문화마당 시 필진
-대한주택관리사협회 회원(관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