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이 초청한 시인_ 이경림 신작시>
밀크캐러멜을 우물거리며
이경림
장대비가 쏟아지지 않는 거실에서 장대비가 쏟아지는 아파트와 나무와 길들을 본다 내가 안을 떠나지 않듯 비는 밖을 떠나지 않는다 천지가 밖인데 밖인 비는 어디로 가는가 천지가 안인데 안인 나는 어디로 가는가 비가 온몸으로 밖을 살듯 나는 전신으로 안을 산다 밖인 비는 레고 불록 속 같은 이 칸칸의 안을 알까? 어쨌든 비는 퍼붓는다 퍼붓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듯 비는 내린다
우산을 쓰고 빗속으로 들어간다. 내리꽂히며 튕겨 나가는 비 꽂힌 자리에 질펀히 드러눕는 비 천지사방 몸을 늘이는 비 투명한 연체동물 같은 비
누군가 우산 밑에 숨어 길모퉁이를 돌아간다 빗줄기 사이로 난 가느다란 길로 무슨 그림자 같은 것이 사라진다 헤드라이트를 번쩍이며 자동차들이 달려간다. 장대비 쏟아진다
죽창 같은 빗속에서 한 남자를 죽이는 꿈을 꾼 적 있다. 아버지 같기도 남편 같기도 옆집 남자 같기도 했다 꿈속의 아버지, 꿈속의 남편, 꿈속의 옆집 남자는 무엇이 다른가?
밀크 캬라멜을 우물거리며 장대비가 쏟아지지 않는 복도식 아파트를 걸었다 난간 밖으로 팔을 뻗으면 장대비가 팔뚝을 적시는 길을 걸었다 층층의 빗소리 속으로 발자국들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길을 걸었다
<시편이 초청한 시인_ 이경림 대표시>
스윙 댄스
-시인 최정례 에게
이경림
*그 모호한 뭉게구름 속에는
예를 들어 이런 말들이 있었다
백혈구 떨어져서 무균실에 와 있어요
여름은 여기서 이렇게 날 것 같아요
그런데 초호화 1인 호텔이네
전망 끝내주고 여름 여기서 날 것 같아요
일생 나만을 위해 이런 호젓한 시간 가진 적 있나
역설적으로 코로나 시대에 가장 안전한 곳 같네
그럼 난 *구름 뚫고 지나가는 조용한 비행기처럼
이렇게 말해본다
-지금 여긴 비가 오네
‘타인의 자유’ 읽다가 울었어
-좀 어때? 좋아지고 있지?
아 참 산타모니카는 잘 있지?
그 모호한 뭉게구름 속에는 또
이런 말들이 있었다
-내일 무균실에서 나가 다시 치료시작
워낙 희귀세포라 나랑 비슷한 게 없어 그걸 연구한대요
머리카락은 다 밀었고
그리고 어느 새벽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가 갔습니다
그 모호한 뭉게구름 속에는
예를 들어 이런 말들이 생략되어 있었다
*머리에 붉은 꽃을 꽂고 그녀가
북당나귀라는 별에 내리는 걸 본 것도 같아
* 최정례 시 ‘스윙댄스’의 구절
이경림 시인
1989 《문학과 비평》 등단
시집 『급! 고독』 외 6권, 산문집 『나만 아는 정원이 있다』,
『언제부턴가 우는 것을 잊어버렸다』
시론집 『사유의 깊이, 관찰의 깊이』
영역시집 『A New Season Approaching, Devour 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