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비전
-무엇을 위한 기도인가?
믿음으로 떠난 길인데도 고난을 겪고, 비전을 품고 가는데도 환난을 겪습니다. 믿음 안에서 왜 고난과 환난을 겪어야 합니까? 꿈이 없으면 고난도 없습니다. 비전이 없으면 환난도 없습니다. 꿈과 비전이 없다면, 모든 고통은 우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생 전체가 우연이기에 따로 해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짐승에게는 고난이 없습니다. 짐승도 고통을 겪고, 그 고통에서 빠져나오려고 필사의 노력을 다하지만, 고통을 해석할 능력은 없습니다. 먹이를 찾기 위해서나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서나 짝을 얻기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는 일은 있지만, 자유나 이상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일은 없습니다. 본능 외에는 고통 속으로 뛰어들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인간과 다릅니다.
하느님의 목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속으로 뛰어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난과 환난을 겪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그것을 이겨 낼 힘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고난이 지닌 의미와 높은 가치와 비전 때문에 기꺼이 인내하며 이겨 냅니다.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고난이 믿음 안에서 해석되기를 바랍니다. 그로써 하느님의 뜻 안에서 분명히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해석과 확신이 없으면, 가다가 흔들리고, 흔들려서 주저앉게 되기 때문입니다.
비전에는 반드시 유혹이 따른다
성당에 복 받으러 왔다가 자기가 기대한 한 바와 달라서 결국 믿음의 길에서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당에 다니면, 고난에서 단숨에 벗어날 줄 알았는데, 생각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어 그냥 제 갈 길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세례를 받고 나서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에게 유혹을 받으러 광야로 향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스스로 40일 동안 단식기도를 시작하십니다. 고난을 자청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모든 고난을 이겨 내셨습니다. 우리 눈에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놀라운 기적들이 크게 보이지만, 사실 그 뒤에는 주님의 치열한 기도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미처 보지 못합니다.
비전은 위로부터 옵니다. 신앙인은 땅의 것을 비전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가슴에 한 민족을 품는 비전을 받았다는 것은 지금 이곳에서는 되는 일이 없으니 그 땅에 가서 그들 위에 군림하며 평생 갑으로 살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비전은 여기서나 저기서나 사람을 사랑하며 살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회개하도록 돕고, 다시 태어나도록 돕는 일입니다. 말씀과 기도의 사람이 되도록 도와야 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비전을 공유한 곳이 바로 교회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면 말씀과 기도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도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밖으로 나가시어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 산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루카 22,39)
예수님께서는 평생 어떻게 기도하셨습니까? 늘 하시던 대로 기도하셨습니다. 새벽에도 밤에도 하시던 대로 기도하셨고, 기적을 베푸실 때는 특별히 더 기도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될 때면 홀로 산으로 가서 기도하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일에는 그 아래 기도의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40일 단식기도로 공생활을 시작하시고,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하며 마지막 십자가 사명을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일은 기도가 아니면 이루어지지 않고, 감당할 수도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비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 없이는 이룰 수 없는 비전이었습니다. 인류의 죄를 홀로 짊어지는 비전을 누가 감히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사람의 생각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축제 때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과월절에 맞춰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예루살렘에 올 때마다 늘 하시던 대로 기도하러 갔던 올리브 산에 제자들과 함께 올라가십니다.
올리브 산은 예루살렘이 내려다보이는 해발 800m 높이의 산입니다. 올리브 산 서편 기슭에 겟세마니 동산이 있습니다. 겟세마니는 '기름을 짜는 틀'이란 뜻입니다. 그곳에서 기름을 짜듯 몸과 영을 쥐어짜는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기도는 위로부터 오는 하느님의 뜻을 비전으로 품게 합니다. 일단 비전을 품으면, 신기하게도 내가 비전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비전이 나를 이루어 갑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까요? 비전을 위해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제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을 비전이 아닙니다. 성경의 비전은 하느님의 약속이고,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결단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만이 비전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방향을 잡아 주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이르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루카 22,40)
비전을 추구하면, 반드시 따르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전의 길을 걸으면서 유혹을 수도 없이 경험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기도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유혹이란 비전을 향해 가다가도 죄악의 곁길로 빠지게 하는 충동입니다. 유혹이라는 덫에 걸려드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목적은 죽이고 빼앗는 것입니다. 비전을 빼앗기 위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유혹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때로 인간을 테스트하시지만, 유혹하시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사탄은 인간을 유혹하지만, 비전을 주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자기 욕심을 비전으로 착각하게 만들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깨어서 기도해야 할까요? 깨어서 기도하지 않으면, 유혹에 너무나도 쉽게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바치는 기도를 하는 사람은 유혹에 오면 못 견딥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비전을 품은 사람은 어떤 시련이나 고난이 닥쳐도 기도로 그것들을 꺾어 냅니다. 하느님의 비전에 이끌려 사는 인생은 기도의 자리에서 버틸 힘을 얻습니다. 기도의 자리를 벗어나면, 자기 뜻대로, 즉 본성대로 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십자고상 앞에 무릎을 꿇고 본성을 꺾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십자고상 앞에 무릎을 꿇는 기도가 있어야만 비로소 하느님께서 주신 비전을 쫓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 주신 것은 사람 살리는 일, 즉 교회를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비전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꿈을 이루어 드리고, 하느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사람을 살리는 구원의 비전을 품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사람을 살리는 데 있습니다. 본질에서 벗어나면, 괜히 일이 많아집니다. 일이 많아지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일이라는 곁길에서 하느님의 비전을 잃어버리고 자기 욕망을 비전으로 합리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본질을 추구하는 일이 아니라면, 단호히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향한 하느님의 비전이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어좌를 버리고 내려오신 데서부터 시작되지 않았습니까? 그 비전이 어떻게 잉태되었습니까?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교회 탄생을 위해 이제 마지막 십자가 사명을 앞두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비전에는 타협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