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마음
우리는 회초리를 드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3,19)
칭찬은 하나도 못 듣고 야단만 잔뜩 듣고 있는 라오디케이아 교회였지만, 주님께서는 아직도 이 교회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아직도 이 교회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일곱 교회 중에 하나로 포함시켜서 이렇게 편지를 보내서 책망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했습니다. 진짜 하느님께서 포기하셨다면 아예 침묵해 버리셨을 것입니다. 그래도 야단치고 계시다는 것은 아직 살아날 희망이 있다는 것이며, 아직 주님께서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징계는 자녀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아버지가 아끼는 아들을 꾸짖듯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꾸짖으신다.”(잠언 3,12)
주님께서는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순서가 뒤바뀌어야 될 것 같습니다. 먼저 ‘회개를 하고 열성을 다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순서가 맞는 것 같습니다. ‘열성을 다하라’는 말씀을 나는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것으로 해석해 보았습니다. 즉 열성을 다한다는 것은 은총을 체험하는 것, 성장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성령 기도회와 같은 기도 모임에 처음 왔을 때는 마음이 냉랭하다가 모임 어느 시점부터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자기도 모르게 회개가 터집니다. 억지로 회개하라고 강요해서, 혹은 분위기에 눌려서 마지못해 회개하는 건 진짜 회개가 아닙니다. 진찌 회개는 내 위에 부어지는 영적 열기, 은총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속 안에서부터 터져나오는 것입니다. 은총을 체험하고 처음 사랑을 회복하니까, 내 마음속 구석구석에서 회개의 강물이 솟구쳐 올라옵니다.
또한 문을 두드리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3,20)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을 믿지 않는 사람이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선교용 구절로 해석하는데, 그것은 틀린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미 예수님을 믿는 라오디케이아 교회에게 주는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안에 참으로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을 수 있지만, 이 말씀의 핵심 타깃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삶의 어좌에 주님께서 다스리시지 않는 세속화된 신자들입니다. 주님께서 두드리시는 문은 내 마음 한가운데, 내 인생의 컨트롤 타워입니다.
왜 주님께서 문 밖에 서서 두드리실까요? 그것은 라오디케이아 교회의 문이 정작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 닫혀 있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세상 쾌락에 빠져서 주님을 박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내 삶에 모시고는 있는데, 내 삶의 주인이 아니라 손님으로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안방이 아니라 사랑방에 모셔놓고 나오시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사 중에 주님의 현존이 없는 것입니다. 건물도 있고, 신자들도 있는데, 그 안에 영적으로 싸늘한 이런 성당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약한 힘만으로도 순종하며 주님을 감동시켰던 필라델피아 교회는 열린 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하늘 창고의 문을 열어 축복을 부어주시고, 교회가 마음껏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선교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적 풍족함에 취해 영적으로 마비되어 있는 라오디케이아 교회의 경우는 닫힌 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일어서셔서 안타깝게 마음문을 두드리는 수고를 하셔야만 했습니다.
주님께서 문 밖에서 두드리신다는 말은 그리스어로 현재 진행형 동사입니다. 주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면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참으로 오유한 분이셔서 문을 부수고 들어오시지 않고 노크하면서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자유의지, 우리의 인격을 그만큼 존중해 주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말씀을 주시면서 두드리고 계심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주어지고 있다는 것은 주님께서 지금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말씀을 많이 들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들어야 내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주님을 내 인생 한가운데로 초대할 열망이 생기고 결단이 섭니다.
‘문을 열면’이라는 말씀은 내 삶 중심의 어좌에 주님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정말 주님이 필요해요. 주님 기다렸어요. 예수님, 목마릅니다.” 이처럼 가난한 마음으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린이의 특징은 철저하게 부모에게 의존한다는 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철저하게 주님께 의지하는 마음으로 돌아오길 원하십니다. 어린이는 아빠가 집에 돌아올 때 열렬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달려나와 문을 엽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맞이하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라는 말씀은 그렇게 될 때, 주님께서 내 안으로 ‘들어오신다는 것’입니다. 빛이신 주님께서 들어오시면 내 안의 어둠이 없어지고, 마귀가 물러갑니다. 주님께서 들어오시면 내 안에 평화와 담대함이 충만해집니다. 주님께서 들어오신다는 것은 내 인생의 어좌, 내 인생을 다르시는 주인의 자리에 주님이 앉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던 내 인생이 자리를 잡기 시작합니다.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와 풍성한 친교를 나누심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마음을 열어주시고, 지혜와 사랑과 격려의 말씀을 들려주실 것입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것과 그 사람과 식사하면서 오랜 시간 친교를 나누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깊이, 따뜻하게, 새롭게 알고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과의 식탁 친교는 영적 승리의 약속입니다. 다윗은 “당신께서 저의 원수들 앞에서 저에게 상을 차려 주시고”(시편 23,5)라고 노래했습니다. 원수들이 몰려왔다가 내가 만군의 주 하느님의 상에서 함께 사랑을 받으며 식사하며 친교를 나누는 것을 보고, 두렵고 놀라서 물러가게 됩니다. 주님께서 내 삶을 지배하시면 마귀가 두렵지 않습니다.
“승리하는 사람은, 내가 승리한 뒤에 내 아버지의 어좌에 그 분과 함께 앉은 것처럼, 내 어좌에 나와 함께 앉게 해 주겠다.”(3,21)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오른편에 앉히신 것처럼, 주님께서는 믿음의 승리자들을 영광의 하늘 나라에서 당신의 어좌에 함께 앉히겠다고 하십니다. 고대 중동에서 이것은 가장 큰 공을 세운 신하에게 주는 영예입니다. 칭찬은 하나도 못 듣고 야단만 실컷 들은 라오디케이아 교회에 주는 상급치고는 너무 엄청나지 않습니까!
라오디케이아 교회가 비록 심각하게 영적으로 병들어 있었지만, 회개하고 돌아오면 엄청난 영적 반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얼마나 놀라운지요! 은총을 향한 목마름이 있다면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믿음, 더 큰 은총을 갈망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세상과 교회를 적당히 오가는 믿음이 아니라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하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에겐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큰 은총을 베푸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