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 재판관님 하나님의 법을 따라 재판해 주시고 선한 이름을 남기십시오
우리나라에는 기독교인 재판관들이 많이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기독교인 재판관님들께 호소합니다. 제발 하나님의 법을 따라 재판해 주십시오. 권력이나 돈에 의해, 인간적 연고 때문에 재판을 불공정하게 하신다면 나중에 큰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 남들은 어찌하든지 기독교인은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나라를 다스리고, 재판을 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슬프게도 오늘날 전 세계는 기독교인 재판관들이 성경 말씀과 자신의 양심을 따르기보다 세상 권력의 지시와 명예와 부를 따라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저버리고, 소수 권력자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악한 일에 손발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믿고 따르는 기독교인이라면 재판관이든 행정부 공무원이든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고 자기 양심을 두려워하면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일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특히 법이 무너지면 나라의 질서와 원칙과 도덕이 무너집니다. 겉으로는 나라이지만 속으로는 소수 권력자의 이익집단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재판관들의 역할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특히 기독교인 재판관들의 책임은 소돔 고모라의 멸망을 좌우하는 의인 열 명의 책임에 못지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간절히 호소합니다. 기독교인 재판관님들이시여, 하나님의 법을 따라서, 그리고 자신의 선한 양심을 따라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재판을 해 주십시오.
1. 우주와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대리 통치자로 세우시고 일하게 하십니다. 직접 하시면 쉽게, 그리고 빠르게 하실 수 있는 일도 사람으로 대신하게 하시거나 아니면 사람과 함께 하시면서 부족하고 느린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온전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따라서 일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뜻을 나타내시고 사람으로 그 뜻을 배워 실천하기를 원하십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서 불의한 것이나 억울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왕과 제사장과 재판관을 세우시고 선지자들을 보내사 가르치고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2. 구약의 재판관은 '신들'(gods)로 불려졌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 10:34)
이 본문 말씀은 시편 82:6의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gods)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라고 한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하나님이 재판관들에게 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시키려고 재판관들을 하나님의 대리자로 삼았습니다. 그러기에 재판관들은 하나님의 권위를 위임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법을 따라 공정하고 바르게 재판해야 합니다. 선입견을 가지고 힘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봐 주거나, 힘없는 사람이라고 해서 봐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율법에 따라 재판하는 하나님의 대리자 역할을 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당시 재판관들을 '신들'(gods)로, 그리고 '지존자의 아들들' (sons of the Most High)로 불렀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나 제사장 그리고 왕에게 그런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모세에게도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신(god)이 되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출7:1).
우리 시대에 재판관을 신이라고 부르지는 않지만 이 성경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한편으로는 재판관의 위치가 얼마나 높고 고귀한 것인지를 깨달아서 그 직책이 업신여김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 따르는 책임이 얼마나 크고 영향력이 있는지를 명심하며, 그래서 두려운 마음으로 자기 책임을 다하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3. 이세벨과 장로와 귀족들의 악한 계교와 재판과 살인과 약탈
“그의 아내 이세벨이 그에게 이르되 왕이 지금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일어나 식사를 하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께 드리리이다 하고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들을 쓰고 그 인을 치고 봉하여 그의 성읍에서 나봇과 함께 사는 장로와 귀족들에게 보내니 그 편지 사연에 이르기를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에 높이 앉힌 후에 불량자 두 사람을 그의 앞에 마주 앉히고 그에게 대하여 증거하기를 네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게 하고 곧 그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이라 하였더라
그의 성읍 사람 곧 그의 성읍에 사는 장로와 귀족들이 이세벨의 지시 곧 그가 자기들에게 보낸 편지에 쓴 대로 하여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히매 때에 불량자 두 사람이 들어와 그의 앞에 앉고 백성 앞에서 나봇에게 대하여 증언을 하여 이르기를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매 무리가 그를 성읍 밖으로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이고 이세벨에게 통보하기를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나이다 하니 이세벨이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다 함을 듣고 이세벨이 아합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돈으로 바꾸어 주기를 싫어하던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소서 나봇이 살아 있지 아니하고 죽었나이다 아합은 나봇이 죽었다 함을 듣고 곧 일어나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그리로 내려갔더라”(왕상 21:7-16)
아합 왕이 선한 백성 나봇의 포도원을 갖고 싶어서 결국 나봇도 죽이고 포도원을 차지하는 죄악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여기에 악한 재판이 등장합니다. 이세벨은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를 쓰고 인을 치고 봉하여 나봇이 사는 지역의 장로와 귀족들에게 보냈습니다. 실제는 이세벨이 썼지만 아합 왕이 쓴 것처럼 하여 사람들을 속인 것입니다. 편지의 내용에 금식을 선포했는데 나라에 중대한 사건이 있음을 알린 것입니다. 나봇을 죽이려는 악한 일을 위해서 거룩한 종교의식을 이용한 것이니, 결국은 하나님도 속이고 사람도 속이는 일입니다. 겉보기에는 경건의 탈을 쓰고, 믿음이 좋은 것처럼 위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히라고 했으니 공개 재판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불량자 두 사람을 증인으로 세우라고 했는데 두 사람의 증인이 있어야 정당한 재판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량자에게는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고 말하도록 하고 곧 돌로 쳐서 죽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나봇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을 잘 지키는 사람인데 이런 거짓 증거를 하게 했고, 온 성읍 사람들이 참여해서 나봇을 죽이도록 처리했습니다. 사실을 잘 모르는 사람이 볼 때는 합법적으로 죄인을 처리하는 것처럼 율법을 이용해서 범죄를 숨겼습니다. 그러나 이 재판은 불법이고 거짓된 재판입니다. 정상적인 것처럼 꾸미고 형식을 갖추었지만 다 조작된 것이었습니다. 나봇은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서 자신이 죄 없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변호의 기회조차 없이 바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이세벨의 악행을 주로 이야기하지만, 그녀의 악행에 항의하지 않고, 그 부조리에 대해서 모른 척하고 동의하고 협력하는 성읍의 원로들과 귀족들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악한 일에 동업자가 되고 말았던 그들 때문에 선한 나봇은 죽임을 당하고, 그의 아들들도 죽임을 당했으며(왕하 9:26), 그의 재산은 빼앗긴 것을 크게 생각해야 합니다(왕상 21:19).
이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오늘날 벌어지는 상황과 어쩌면 이렇게 비슷할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대는 다를지라도, 권력자와 억울한 피해자는 다를지라도, 벌어지는 모습은 거의 똑같습니다. 악한 권력자와 동조하는 지배계급 특히 재판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서 선한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빼앗는 모습은 여러 독재국가와 공산국가, 그리고 민주국가의 탈을 썼지만 사실은 소수가 지배하는 권위주의 국가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런 곳에서는 형식적으로 헌법도 있고, 자유도 주장하지만 사실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는 원칙만이 존중됩니다. 이세벨에게 동조하는 원로들과 귀족들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며, 율법의 가르침에 맞게 행한다고 연극(?)을 하는 것이 우습기만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 재판관들이 이런 정도의 생각으로 재판 자리에 앉아 있다면 국민들에게는 큰 불행이요, 고통입니다.
4.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38문에는 로마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은 원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지만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빌라도 총독에게 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사 53:4~5, 고후 5:21, 갈 3:13, 눅 23:13~24, 요 19:4). 당시 유대인들을 관장하던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의 재판을 관장하는 재판장을 겸직하고 있었습니다. 폭도로 변해버린 유대인들과 그들의 시위에 굴복한 빌라도는 균형을 잃은 재판으로 예수님에게 무죄하다는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눌러가면서 십자가형을 선고하였습니다. 십자가형은 사형선고로 지체없이 집행되었고 예수님의 고난은 밤이 새도록 이어졌습니다.
빌라도는 AD 26-36년까지 유대의 총독으로 재임한 실제 인물입니다. 2천 년 역사에 걸쳐 그는 예수를 죽인 자로 언급됩니다. 기독교 교회에서 사도신경을 암송할 때마다 그의 이름이 기억됩니다. 빌라도의 죄는 무엇입니까? 자기의 위치에서 마땅히 해야 할 바른 것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재판을 책임지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군중들의 요구와 협박을 이기지 못하고 로마법의 원칙과 자신의 양심을 짓밟아버린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구원자로 오신 예수를 죽인 희대의 악인으로 역사의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기독교 재판관들도 이 사실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자신을 어떻게 기억할지, 우리의 후손들이 자신을 어떻게 기억할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일시적으로 살다가 떠나는 나그네의 삶을 살면서 돈 때문에, 권력 때문에, 쾌락 때문에 혹은 다른 인간적인 이유로 재판관의 자리에서 마땅히 해야 할 것은 하지 않고, 반대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은 서슴없이 하는 자가 되다가 부끄러운 이름으로 기억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조금 덜 받고, 조금 덜 누리더라도 떳떳한 재판관이 되고, 할 말은 하는 재판관이 되어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일에 충실하다면 그분의 이름은 당장에는 알아주는 사람이 적을지라도 결국에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기억될 것이요, 혹시 사람들에게는 끝까지 인정을 받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기억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