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과 함께 가파도에 가서 며칠 동안 묵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선착장 매표소 직원을 알고 지냈다. 그냥 지나가는 말로 가파도 매표소 직원을 해보고 싶으니 그만둘 때 연락을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얼마 후 진짜 연락이 왔다. 마침 코로나 영향으로 수입이 대폭 줄어들어서 고생하던 때였다. 크게 정리할 것 없이 그냥 가파도로 향했다. 가족들도 환영했다(!)
이렇게 가파도에서 나의 중년, 제2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가파도에 살면서 느낀 점을 말해보겠다. 첫째, 처지가 달라지면 풍경이 달라진다. 가파도 주민들도 매표소 직원은 하지 않으려 한다. 매표소 직원은 가파도에서 가장 천한 직업인 셈이다. 고양시에서 나름 대접받고 살던 내가 가파도에서는 바닥에서 살게 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내게 보이는 풍경이 달라졌다. 그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남의 욕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매표소 직원인 나를 함부로 대하던 외지인에게서 예전에 보지 못했던 어떤 모습이 보였다.
사람은 누구나 처지가 바뀐다. 날개가 있으면 하늘로 높게 날 수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더 이상 날 수 없다. 새처럼 높은 데서 아래를 봐 왔더라도 언젠가는 바닥으로 내려와 벌레처럼 아래서 위를 볼 줄 알아야 한다. 높이 올라간 사람일수록 더 많이 내려와야 한다. 벌레가 바닥에서 본 하늘도 아름답다. 새로운 세상이 보인다. 그런데 처지가 바뀌어도 그걸 깨닫지 못하면 제대로 된 풍경을 볼 수 없다. 유식한 말로 메타 인지 능력이 부족하면, 즉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면 불행이 시작될 수 있다.
둘째, 루틴(routine)을 바꾸면 생활이 달라진다. 고양시에서 살 때는 새벽까지 뭔가를 했고 아침 10시 반쯤 일어나 생활을 시작했다. 잠도, 식사도 불규칙했다. 하지만 가파도에 와서는 바뀌었다. 매표소 직원이 된 이후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 출근한다. 세끼도 모두 챙겨먹는다. 도시에서는 가까운 거리도 차를 타고 이동했지만, 호수공원 크기의 가파도에서는 대부분 걷는다. 바쁘면 자전거를 이용한다. 도시에서 한 때 123kg였던 몸무게는 어느새 103kg까지 줄어들었다. 가파도에 온 지 6개월만에 10kg을 뺐다.
루틴만 바꾼 게 아니라 루틴과 리추얼(ritual)을 연계시켰다. 리추얼이란 거룩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동이다. 성당에서 맛없는 빵과 포도주를 마시면서 그걸 예수의 살과 피라고 믿으면서 감사해하는 마음가짐과 행동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세종대왕보다 10배 이상 편하게 살지만, 세종대왕이 가졌던 거룩한 마음가짐은 전혀 갖고 살지 못한다. 가파도에서의 나의 리추얼은 글을 쓰는 것이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최소 1시간 정도라도 꼭 글을 쓴다. 보잘 것 없는 삶이지만 솔직히 드러내려고 노력한다.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이 어떻게 달라져도 상관없다. 설령 자식이 그를 버리거나 외면하더라도 상관없다.
셋째, 태도를 바꾸면 마음이 달라진다.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는다. 가파도에 가고 싶은 마음으로는 가파도에 가기 힘들다. 하지만 가파도 가는 배의 티켓을 끊으면 가파도에 갈 확률이 높다. 그만큼 태도는 마음보다 훨씬 중요하다. 가파도에서는 종종 술을 마시고 매표소 직원에게 갑질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때마다 공손하게 대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공손한 태도가 실제로 내 마음을 바꾼다.
논어 ‘학이’편에서 공자는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가 나지 않는 사람”을 군자라고 했다. 공자는 평생을 공부했지만 결국 출세하지 못했다. 요즘 말로 루저였다. 하지만, 화내지 않고 세상을 원망하지 않았다. 우리는 사실 남을 위한 공부를 하고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산다. 그렇기 때문에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남이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되면, 화가 난다. 내가 종종 가파도 오는 손님들에게 갑질을 당할 때 “네가 나보다 많이 아냐? 공부를 더 많이 했냐?”고 반발한다면, 그건 그 동안 나 스스로가 아니라 남을 위해 공부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공자의 위대함을 느끼고, (공손한) 태도의 중요성을 느낀다.
지금까지 가파도에서 내가 깨달은 것을 짧고 투박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아무 것도 되지 말고, 온전히 내가 되자”다. 이대로 산다면, 다른 사람에게 섭섭할 일도 없고, 나 자신에게 실망할 일도 없고, 매일매일 가장 좋은 선택을 하며 살 수 있을 것 같다.
(추신) 김경윤 작가님이 생각한 노자의 세 가지 명문과 가파도에서 재미있게 읽은 책, “고양이 철학”은 생략합니다. 첨부자료 참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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